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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하느님 나라를 발전시키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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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5 조회수2,804 추천수0

[성서의 세계 - 신약] 하느님 나라를 발전시키는 힘

 

 

그분은 비유로 가르치셨다

 

근동 사람과 서방 사람 사이에는 다만 지중해의 푸른 거울만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거리상으로는 비교적 짧지만 사람들의 성격과 심성 면에서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 “근동과 함께 고대 아시아라는 다른 대륙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 그것은 기후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 대륙이다.

 

서양 사람은 혼란스럽고 동요되고 시간이 없다. 반면에 근동 사람들은 활동을 좀더 서서히 착수하고 좀더 서서히 살아가며 좀더 서서히 철저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나 언제나 충분한 시간을 갖고 있다. 서양 사람도 동요되는 그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 열정적인 사람이 된다. 그는 종합적이며, 강인하고 사려 깊게 생각하나 짧고 간결한 형식으로 본질을 자신의 눈앞에서 곧바로 보려고 한다. 동양 사람은 반대로 모든 전달에 신비스러움을 담는다.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고 생각을 화려하고 형이상학적인 표현으로 갈아입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한 동양적 심성에서, 우리는 복음서에 예수 자신의 말씀과 함께 비유가 지속적으로 스며 있는 것을 본다. 또한 우리는 주일의 복음적 단편에서 하나의 비유가 설교단에서 읽혀질 때 더욱 명료하게 듣게 된다. 이것은 서방 세계를 위한 동양적인 가르침이다.

 

복음서에는 많은 비유들이 소개되나 모든 복음서에서 같은 방식으로 소개되지는 않는다. 실제로 그것들은 세 복음서에 집중되어 있다. 반면에 네 번째 복음서는 엄밀히 말해서 그것들을 다루지 않고 있으며, 정확히 마르코는 비유를 대체로 단 하나의 설교에, 마치 예수가 단 하루만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처럼 한정시킨다(마르 4장 참조). 반면에 마태오와 루가의 복음에서는 거의 전복음서에 퍼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비유를 두 부류로, 즉 교리 혹은 삶의 방편을 제시하는 것에 따라 교리적인 비유와 도덕적인 비유로 구분할 수 있다. 도덕적인 비유는 교화적인 예로 소개된다. 그것은 그 자체로 분명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착한 사마리아인, 방탕한 자식, 라자로와 부유한 연회 손님, 바리사이파 사람과 세리를 떠올려 보자. 첫 부분은 언제나 하나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습니다”(루가 10,30). 결론은 도덕률을 담고 있다. ‘가서 당신도 그렇게 행하시오”(루가 10,37). 혹은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낮추어지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은 높여질 것입니다’(루가 18,14). 마음 깊이 울리는 가장 아름다운 교훈적인 비유는 이렇듯 루가 복음에서 발견되는데, 이 경우에도 그리스도는 곳곳에서 행하시며 사람들 가운데서 선을 베푸시는 사람이 되신 하느님 아들의 모습을 뚜렷하게 취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오히려 교리적인 비유가 발견되는데, 거의 모두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하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로 요약된다.

 

교리적인 비유는 모든 면에서 볼 때 연속적인 유사함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의 비교로 소개되는데, 하늘 나라는 겨자씨, 누룩, 보물, 그물과 비슷하다. 모든 것은 한 쌍의 명제 안에 포함되어 있으나, 하나의 도덕률을 따르지 않으며, 청중과 독자는 거기서 하나의 빛줄기를 발견하고 하늘 나라라 불리는 것에 대해 명상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비유들은 폭넓은 설명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지상의 어떤 실재와도 적절하게 맞추어 볼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비교이기 때문이다. 하늘 나라에 대해서는 대개 가치, 깊이, 기간, 성장과 같은 어떤 특성만이 암시되는데, 언제나 한 가지 이미지 안에 한 가지 특성만이 들어 있다. 그리한 비유는 거의 언제나 갈릴래아의 일상 생활에 바탕을 두었다. 어떤 이야기들은 씨 뿌리는 이와 씨, 혹은 그물을 가진 어부와 진주를 가진 상인에 대한 이야기처럼 상세하다. 그러나 어떤 때의 이러한 소묘들은 현대화와 비슷하다. 선이 날카롭게 그려져 있는 반면 형상이 정밀하지 않고 그 의미가 불확실하고 수수께끼 같기 때문이다.

 

마태오는 앞서 말한 비유의 담화(마태 13장 참조)에서 일곱 가지를 제공하는데, 그 가운데 셋은 루가에서, 둘은 마르코에서도 발견된다. 마태오 복음에서 두드러진 형식은, 마지막 비유에서도, 예수의 모습과 복음서 저자의 메시지에 강하게 유다적인 악센트를 찍을 만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비유들의 정확한 의향을 알고 싶어 한다. 여하튼 두드러진 의도는 나라의 이런저런 성격이 우리의 내적 생활에 영향을 주고, 이 나라를 위해 이 나라 안에서 삼고 일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는 점이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하는 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하느님 나라의 전파와 선교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즉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해 서두른다. 그러한 인간적인 조급함에는 한 가지 숨은 위험이 있다. 하느님 친히 나라에 대해 가지고 계신 염려를 거의 잊게 될 만큼 자신의 노력을 과대평가하는 위험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한계를 모르신다. 하느님의 은총은 사도들과 신자들 안에서 느낄 수 없고 볼 수 없게 작용한다. 바오로가 필립비에서 선교할 때, 그의 인간적 열의는 많은 청중들에게 이르렀으나, 그의 말은 은총이 내면적으로 작용했을 때만 감동을 주었다. “그들 가운데는 리디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는 티아디라 출신으로 자색 옷감 장수였고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주께서는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오로의 말을 귀담아듣게 하였다.”(사도 16,14). 바오로는 어디에서든 은총의 이러한 볼 수 없는 작용을 눈치챘다.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1고린 3,6).

 

이처럼 비옥하게 하는 은총의 덕에 대하여, 하느님 나라의 볼 수 없는 힘에 대하여 교리적인 몇 가지 비유가 다루고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마르코에서만 발견되는 짧고 치밀한 비유는 지극히 의미 심장하다. “하느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앗을 뿌려 놓았다. 하루하루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그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싹이 돋고 그 다음에는 이삭이 패고 마침내 이삭에 알찬 낟알이 맺힌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추수 때가 된 줄을 알고 곧 낫을 댄다”(마르 4,26-29).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많은 이들은 잡다한 부분들을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유혹에서 헤어날 줄 모른다. 그들은 씨 뿌리는 이를 어떤 역사적 인물로 구체화하려고 한다. 낮과 밤에 대한 설명을 꾀하고, 씨가 계속해서 자라나는 단계에서 교회사의 한 시기를 본다. 그리고 추수는 명백히 공심판과 부합시키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상세한 설명은 단지 환상의 열매일 뿐이다. 그것은 가치가 없고 나아가 비유에 대한 설명을 가로막는다. 사실 비유는 달리 이해하기가 어려운 진리나 가르침을 예증하고 명백히 해야 할 경우를 위해 애써 만든 비교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형식, 문학상의 방편에 대한 문제다.

 

밭에 뿌린 씨에 대한 비유는 대비 전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유일한 특성, 즉 볼 수는 없지만 발전하는 힘을 제시한다. 일단 씨앗이 밭에 뿌려지면 사람은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씨앗은 자신의 힘으로 발아하여 사람의 도움없이 자란다. 나아가 사람은 싹트고 자라나는 과정이 본래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과정이 끝날 때가 되어서야 씨 뿌리는 사람은 손에 낫을 들고 돌아온다. 이러한 인간의 작업을 통해 곡식은 성장의 힘이 새롭게 드러나게 될 다음해 봄까지 보관된다.

 

같은 성장의 힘은 겨자씨의 비유에서 보충된다. ‘겨자씨는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르 4,31-32). 또한 누룩의 비유도 같은 사실을 설명한다. 그것은 성장과 확장이라는 볼 수 없는 힘을 놀라운 방식으로 조명한다. 그리고 근동의 밭에 떨어진 씨에 대한 긴 비유까지도 그렇다. 길가에 떨어진 씨, 돌밭에 떨어진 씨,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 그리고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마태 13,1-23)도 그와 같이 나라의 성장하는 힘을 새롭게 가리킨다. 그것을 통해 모든 신자는 각기 삼십 배, 육십 배, 또한 백 배의 결실을 낼 수 있다.

 

나라의 발전하는 힘과 관련 있는 비유들은 하나의 볼 수 없는 신비를 제시한다. 우리는 이 신비를 주제넘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주의와 반성을 위해 제공할 뿐이고, 그 본질적인 부분을 우리 자신에게 돌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볼 수 없는 영향에 돌릴 것이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2년 11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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