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르코 복음의 진실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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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3,216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마르코 복음의 진실성
마르코 복음의 결론
모든 성서 번역은, 어떠한 종교적 고백으로 이루어지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그 시대의 결정적인 관점 혹은 개념의 재현(再現)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프로테스탄트의 다양한 번역에서 각 종파의 서로 다른 해석이 발견되는 까닭을 알 수 있다. 특히 마르코 복음의 결론과 관련 있는 몇몇 번역에서 눈에 띄는 상이점과 마주치게 된다. 신앙심이 깊어 보이는 옛 번역 하나는 두 번째 복음서를 이렇게 끝맺고 있다. “그러자 그들은 떠나가서 도처에서 주님의 도움을 받으며 설교하였다. 주께서는 그들의 말을 기적들로 증명해 주셨던 것이다”(마르 16,20). 반면에 20세기에 들어서 회의적인 합리주의 시대에는, “여자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마르 16,8)로 끝나는 프로테스탄트 번역이 출판되었다. 처음의 프로테스탄트 번역들은 마르코 복음의 옛 결론 앞에서 망설이며 마르코 복음 16장 9절부터 20절을 큰 괄호 속에 담고 있는데, 이렇듯이 어느 시대나 그 나름대로의 확신과 의심은 있는 것이다.
가톨릭의 경우, 트렌트 공의회는 성서 내용에 관한 교의적인 결정 가운데서, 마르코 복음의 마지막 열두 구절(마르 16,9-20)이 성서에 속한다는 것을 틀림없는 사실로 천명하였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하느님의 말씀이고, 우리는 그것을 신약 성서의 번역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트렌트 공의회의 오류 없는 선언은 저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즉 마르코가 복음의 저자라고 믿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 저자 마르코가 그 전통적인 긴 결론의 저자라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의심한다면, 그 의심은 영감(靈感)이 아니라 저자에게만 국한된다.
앞서 말한 구절들의 진실성에 반(反)하는 중대한 논거는 몇 가지 고사본에 그것들이 빠져 있다는 점이다. 4세기 중엽의 썩 훌륭한 두 개의 사본은, 마르코 복음을 신심 깊은 여인들의 두려움에 관한 수수께끼 같은 구절(마르 16,8 참조)로 끝맺고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본들은 전통적인 결론에 명백히 대립된다. 어쨌든 다른 사본들이 또 다른 결론 형식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따라 논거는 보강된다. 따라서 고대 교회에는 문제의 구절들의 진실성에 관한 의심이 명백하게 있었다.
열두 개의 구절이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자료의 연속이라면 더욱이나 여자들의 두려움에 대한 묘사가 기쁜 소식의 결론으로 어렵사리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여하튼 알려져 있는 결론이 바로 앞선 구절들의 연속은 아니다. 왜냐하면 부활에 대한 보고에서 이미 막달라 마리아의 문제가 있었고(마르 16,1), 반면에 계속되는 이야기에서는 그녀가 독자에게 아직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으로 소개되기 때문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 예수께서는 부활하신 뒤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는 예수께서 일찍이 일곱 마귀를 쫓아내어 주셨던 여자였다”(마르 16,9). 이 사실은 마르코 복음과 문제의 결론이 서로 통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논의된 구절들은 부활에 대해 이미 알려진 묘사들을 짤막하게 요약한다는 인상을 준다. 엠마오 제자들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짧고 간소하게 암시된다. “그 뒤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시골로 가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마르 16,12). 다른 일화들 - 넷째 복음서에서는 폭 넓게 작성되어 있다. - 은 오히려 두 단락으로 요약된다. “그 뒤 열한 제자가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께서 나타나셔서 마음이 완고하여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신 것을 분명히 본 사람들의 말도 믿지 않았던 것이다”(마르 16,14). 또한 마태오의 파견 명령도 극히 짤막하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따라서 이 열두 구절은 이미 알려져 있는 이야기들로 구성된 결론 대용품이라는 인상을 준다.
문제의 구절들에서 마르코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몇 가지 말들이 나오고, 예수께서 바오로의 편지에서처럼 “주님”(마르 16,19)으로 불린다는 사실을 고려해 불 때, 많은 이들에게 이 일은 결정적이고, 그들은 더 이상 마르코를 이 적절하지 않은 결론의 저자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열두 구절에서 마르코 복음의 중요한 다른 주제들을 찾아낸다. 즉 예수께서는 악마들의 주님이시고(마르 16,9-17), 사도들은 - 적어도 원칙에 관하여 - 의심이 많은 증인들로 묘사된다(마르 16,11.13.14). 예수에게 주어진 호격 “주님”은 있을 법하지 않은 것으로 혹은 바오로의 제자 입에서 나온 새로운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말하기를, 전통적인 결론은 마르코 복음에 뒤늦게 덧붙여질 수도 있었다고 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8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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