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거룩한 동정녀의 초상화가 - 루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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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3,096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거룩한 동정녀의 초상화가 - 루가
루가의 작업 방식
스물일곱 권의 신약 성서 가운데 복음서 저자 루가의 두 작품은 다른 것들보다 서구인들 구미에 잘 맞는다. 그리고 이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루가는 유다인도 셈족도 아닌 그리스인인 까닭이다. 즉 유럽인이라 할 수 있다.
루가가 태어난 곳은 정확하게 모른다. 어떤 자료들은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근방을 암시하나,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루가가 트로아스나 그 고대 도시 가까운 곳 출신이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루가의 두 번째 작품인 사도 행전의 이야기에 근거한다. 사도 행전은 한동안 바오로에 대해 삼인칭으로 말한다. “그 뒤 바오로는 데르베에 들렀다가 리스트라로 갔다”(사도 16,1).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는 바오로의 길동무가 되어 함께한다. 그런데 이야기는 복수 삼인칭으로 계속된다. “…… 그들은 프리기아와 갈라디아 지방을 두루 다니다가…”(사도 16,6). 그러나 바오로가 트로아스에 이르자 이야기는 갑자기 복수 일인칭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였다”(사도 16,11). 트로아스로부터 사도 행전의 저자는 여행자 무리에 초빙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소아시아의 이 도시의 그리스인일까?
어느 경우든 루가는 그리스인이다. 언어와 양식이 그것을 드러낸다. 그의 작품들은 순수 그리스어로 쓰였고, 또한 개념의 논리적 연결성도 그리스적 풍미를 띠며, 따라서 관심, 변증법적 양식, 끊임없이 그리스-유럽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행동과 기록 방식이 특히 서구인들의 심성에 맞아 떨어진다. 종합적으로, 루가의 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도 더 유럽 사람들의 사고 방식에 들어맞는 것이다.
이 복음서의 특색 있고 주목할 만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의 역사 기록에 대한 관심이다. 본래의 의미에서, 복음서들은 설교의 근본인 기쁜 소식의 보고이다. 그러나 루가는 자신의 이야기의 역사적 성격에 관해 특별한 배려를 하였다. 이것은 이미 그의 이중 작품의 목적에서도 드러난다. 사도 행전은 교회 역사의 첫 번째 소묘이며, 세 번째 복음서는 일종의 서언인 셈이다.
루가가 역사적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가 보편적 역사를 두 번이나 참고하면서 이러한 틀 속에 이 복음적 사건을 끼워 넣은 사실로 명백해진다. 그는 예수의 출생을 아우구스토 황제 시대에 시리아 총독 퀴리노가 포고한 인구 조사로 시작한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 공적으로 나타난 때와 비교되는 시기를 지적한다. “로마 황제 티베리오가 다스린 지 십오 년째 되던 해에 본티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었다. 그리고 갈릴래아 지방의 영주는 헤로데였고…… 즈가리야의 아들 요한은 광야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루가 3,1-2). 따라서 그는 역사에 관심이 있었던 것처럼 예수의 나이에 관심을 갖는 유일한 복음서 저자다. “예수께서는 서른 살 가량 되어 전도하기 시작하셨다……”(루가 2,23).
복음서 서문(루가 1,1-4)에서부터 루가의 행동 양식, 그의 정확함, 그리고 반복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역사적 감각을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실상 그보다 앞서 착수되었던 시도들에 관심을 가졌다. 게다가 그는 그 가운데 많은 것을 알고 있고 그것들을 자기 작품의 본보기로 취한다. 그의 선구자들처럼 그는 이미 말씀의 직무에 관련 있었던 목격 증인들을 환기하면서 그의 소식을 전한다(루가 1,2 참조). 바꾸어 말해서, 그는 정리된 보고서를 작성할 수 있기 위하여 애초부터 모든 사실을 주의 깊게 조사했음을 눈에 띄게 명확히 하였다.
심지어 루가가 진술한 복음서의 기적적인 이야기들에 대해 조금은 회의적인 현대에 와서는, 복음서를 역사 기록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에 대한 확증으로 바로 루가의 진술이 인증된다. 그러한 진술에 따라 그는 “말씀의 직무자들”(말씀을 전파한 사람들, 루가 1,2)이었던 사람들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반하여 루가 자신은 “우리에게 전해 준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예고한다. 그는 존경받는 목격 증인들에 의지한다. 즉 그가 그들로부터 알게 된 것을 그는 일관된 또 하나의 목적을 위해, 즉 “이미 듣고 배우신 것들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기 바라서”(루가 1,4) 걸려내고 정리하였다.
사도적인 설교를 보급하는 것이 그의 의도는 아니었고, 그는 폭 넓게가 아니라 깊이 있게 작업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이미 믿음을 지닌 독자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하고 굳건하게 하기 위하여 전해진다. 그러므로 루가는 바로 유럽인의 심성을 만족시키듯이, 무엇보다도 하나의 기초와 정당성을 제공하면서 복음서를 썼다. 이 때문에 세 번째 복음서는 가장 역사적인 복음서로 간주되며, 참으로 가장 역사적인 복음서다.
화가 루가
로마의 성 마리아 대성전 부속 성당 안에는 ‘로마 민족의 구원’으로 존경받는 지극히 거룩하신 마리아의 ‘가장 오래 된 초상화’가 빛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비잔틴 아이콘을 복음서 저자 루가의 작품이라는 의견을 갖고 있다. 화가와 예술가들 협회도 화가 루가의 작품이라는 전승을 논의의 여지없이 자연스러운 일로 기억하고 있다. 사실 성 루가는 화가들의 수호자로 존경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전승의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리 확실한 것 같지 않다. 게다가 널리 퍼져 있는 확신은 오히려 대중적인 환상에 근거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물론 몹시 순결한 대중적인 환상이다.
화가로서 루가에 대한 첫 번째 통지는 6세기에야 나타난다. 530년경 테오도로라는 사람이,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에우도시아 황후가 알려지지 않은 풀케리아라는 사람에게 루가가 직접 손으로 그런 마리아의 아이콘을 선물로 주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확실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기에는 몹시 때늦은 자료다. 그런데도 이 자료는 중세기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후에 루가는 마리아 앞에서 캔버스와 화필을 든 모습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루가에 대한 이 마지막 표현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우리는 말해야 한다. 루가는 초상화 전문가라고 부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확실히 그는 손에 화필을 든 적이 없었다. 자신의 책자를 고정시키기 위하여 마리아의 발치에 앉아 있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는 그 형체를 색감이 풍부한 일련의 그림 안에 붓으로 고정시켜 예수의 유년기 복음이라 불리는 것을 이루어냈다.
루가는 마리아의 섬세한 초상화를 기쁜 메시지의 순간에 고정시켜 놓았다(루가 1,26-38). 후광을 띤 한 천사가 순박한 소녀를 부른다. 나아가 어린데도 소녀는 이러한 응답밖에 할 줄 모른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복음서 저자가 다시 한번 소녀를 묘사하는 다음 장면에서, 그녀는 이번에는 사촌 엘리사벳 앞에서 행복감으로 충만된다(루가 1,39-56). 천사의 메시지가 있던 순간에는 겨우 한마디만 찾아 볼 수 있는데, 이제 그녀는 그녀의 찬미 노래 ‘마니피캇’ 안에서 기쁨으로 용약한다.
세 번째 틀에서는 띠로 감싸인 새로 태어난 아기에게 향한 경탄으로 충만한 채 구유 곁에 무릎 꿇고 있는 마리아를 본다. 마리아의 모성적 기쁨이 담긴 그림이다(루가 2,6-7).
조금 뒤에 마리아는 아기를 팔에 안고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다(루가 2,22-28). 시므온과 안나는 그녀 곁에 서 있고, 그들의 말은 마리아의 모습에 관해 묘사된다. 즉 파멸과 부활, 그리고 그녀의 심장을 꿰뚫는 칼. 행간을 좀더 내려가 보면, 마리아는 같은 성전 안에서 박사들 가운데 앉아서 그들의 말에 귀기울이며 질문도 던지는 자기 아이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침묵 속에 있다(루가 2,41-51). 불안과 고뇌는 상당히 크나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는 단 한 행으로 드러난다.
다른 어떤 복음서 저자도 마리아의 생애에 대한 주요한 순간들을 이렇게 폭 넓게 고정시킨 바 없다. 섬세한 감각과 심오한 색깔로 루가는 마리아의 모습을 후대를 위해 보존하였다 그를 지극히 거룩한 동정녀의 초상화가라 부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재능을 지닌 화가, 초상화가가 단 하나의 인물에만 제한된다면 놀라운 일일 것이다. 사실 우리는 루가의 복음서에서 다른 부수적인 모습의 초상화도 발견한다. 그는 몇몇 여인들을 ‘화폭’ 위에 찍어 놓는다. 그리고 복음적 사건에서 지나가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다른 사람들조차도 비범한 방식으로 묘사된다. 게다가 루가는 복음서들의 주요 인물 가운데 예수를,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훨씬 더 뚜렷하게, 철저히 인간적인 초상화로 묘사하였다. 그것은 고통과 고뇌 속의 인간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관대한 사랑의 초상화다.
그리고 최상의 공헌으로 루가는, 예수께서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분,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이미지도 소묘하려고 애썼다. 그는 그것을 아주 잘 알려진 방탕한 자식에 대한 묘사로 하였다(루가 15,11-32). 진실로 이 비유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방탕한 자식이 아니라, 모든 것을 용서하는 사랑을 지닌 그 아버지다.
비유의 서두에서 아버지는 연민에 가득 차서, 어린 자식이 자기 것을 주장할 때 침묵을 지킨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제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달라고 청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재산을 두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계속된 기다림 끝에 그가 돌아오는 날, 이미 멀리서부터 그가 오는 것을 본다. 그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들은 자신의 뉘우침을 드러낼 시간이 전혀 없었다. 축제의 식사와 함께 귀환은 모든 가족에게 축하받았다. “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기 때문이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았기 때문이다.”
요한이 사랑의 사도로서 짧은 정식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16)라고 제시하는 것을, 화가 루가는 매혹적인 색깔로 표현한다. 요한은 하느님의 ‘본질’을 제시하고 루가는 그것을 살아 있는 초상으로 그린다. (L'uomo me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9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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