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복음서 저자 루카의 시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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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3,082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복음서 저자 루가의 시각
의사 루가
루가는 그의 복음서와 사도 행전을 기록할 때 신약의 기원에 관한 많은 자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그에 대하여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 대한 보고에서 루가라는 이름을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루가의 이름은 포로가 되어 감욱에 갇힌 바오로의 편지에서만 발견된다. 61년에서 63년 사이에 첫 번째 감금 생활을 하던 중 바오로는 로마에서 이렇게 썼다. “사랑하는 의사 루가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골로 4,14). 죽기 얼마 전에 사도는 감금 생활의 고독 속에서 “루가만이 나와 함께 있습니다.”(2디도 4,11)고 썼다.
이러한 몇 안되는 자료에서 루가가 의사였다는 것을 확실히 추정할 수 있다. 그가 화가라는 표현이 전통적인 환상에 근거하는 반면에, 의사라는 칭호는 성서에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루가의 복음서를 살펴볼 때, 과연 루가가 의사였다는 것을 어떤 본문에서 알 수 있는가?
우리는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루가 8,43-48 참조). 마르코는 그의 이야기에서 의사들에 대해 완고한 판단을 내린다 “군중 속에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마르 5,25-26). 의사인 루가는 그러한 일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의사가 환자에게 가능한 모든 일을 한다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의 보고에서는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있었는데, 아무도 그 병을 고쳐 주지 못하였다.”(루가 8,43)는 것을 읽을 수 있다. ‘불가능성’은 의사들을 좀더 유리한 입장에 놓고 동시에 기적의 위대함을 부각시킨다.
그리고 복음서 저자 루가는 병에 관하여 특별한 관심을 드러내 보인다. 어떤 때는 질병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어떤 때는 병약한 사람들에 대한 근동의 치유 방법을 우리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상처의 치유가 어떻게 실시되었는가를 묘사한다. “그는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부었다”(루가 10,34). 알코올은 상처를 소독하고 기름이 고통을 덜어 준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떤 본문에서 루가는 그 시대에 사용되었던 의학 용어를 채택한다. 그래서 병자인 베드로의 장모에 대한 이야기에서 마태오(8,14)와 마르코(1,30)는 그녀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다고 말하고 있고, 루가(4,38)만이 좀더 특별하게 ‘심한 열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한 것을 말하는 일이 있다. 길고 고전적으로 작성된 루가 복음 서두의 해설(루가 1-4장)은, 고대에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던 의술에 관한 논문의 서두와 현저하게 유사한 점들을 드러낸다. 이러한 추론의 각 부분들이 불충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의사 루가에 관한 바오로의 본문에서 출발해 볼 때 인용된 모든 관찰들이 새롭게 밝혀진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심지어 예수께서도 바로 루가 복음에서 나자렛의 동향인들에게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는 속담을 들어……”(4,23)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이해한다.
루가는 의사의 신분으로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이해함으로써 예수 자신을 바로 의사의 눈으로 보았다. 달리는 어떻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고유한 방식에 따라 보고 작업을 하는 것이니까. 이러한 자신의 시각에 따라 루가는 주로 약한 사람에게 쏠리는 예수의 태도를 강조한다.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도 기적적인 치유에 대해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으나, 루가만이 하늘의 의사로부터 모두를 치유하는 힘이 나온다는 것을 언급한다(루가 6,19; 8,46). 루가 복음에서 예수의 태도는 모든 약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해질 무렵에 이집 저집에서 온갖 병자들을 다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어 모두 고쳐 주셨다”(루가4,40).
그러나 루가는 예수를 육체적인 병에 마음을 쏟는 의사로 보면서 그것을 더 한층 불치병과 정신적인 형벌에 대한 위안으로 드러낸다(루가 7,36-50).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안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 5,31-32).
십자가 위에서 의사 구세주께서는 옆에 있는 강도에게 귀기울이시기 위하여 자신의 고뇌를 잊으신다. 그리고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는 위안의 말씀이 울려 나온다. 그것은 영원한 치유다. “사람의 아들은 앓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루가 19,10).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3년 10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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