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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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2,646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
죄인들을 위하여 왔다
‘바리사이’란 말은 흔히 유쾌하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얕은 신앙을 가진 위선자들, 까다롭게 트집잡는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이같은 냉혹한 판단은 복음서의 본문과 예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스승은 여러 차례 바리사이파의 과격한 행위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하셨다. 그러나 원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착하고 순수한 종교적 의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유다 율법에 대하여 연구함으로써 율법을 훌륭하고 정확하게 준수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 그들은 이러한 목표를 무엇보다도 외적인 일에서 찾으려 하였고 겉치레에 머물게 되었다. 그것은 죄인에 대한 그들의 반감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죄인을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피하였고, 율법에 충실한 특권 계급 혹은 ‘분리된 집단’을 형성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의 이름 ‘바리사이’는 실제로 ‘분리된 자’를 뜻한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세리의 이야기(루가 18,9-14)로 바리사이적인 태도를 지극히 준엄하게 소개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보라는 듯이 서서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욕심이 많거나 부정직하거나 음탕하지 않을 뿐더러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고 기도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율법을 준수하기 때문에 죄인들과 스스로 분리된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찍이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죄인들 사이에는 강한 단절이 있으나, 예수께서는 그러한 대립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으시고 죄인들의 편을 드신다. “하느님께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은 바리사이파 사람이 아니라 바로 세리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눈에 예수의 큰 잘못은 세리들과 죄인들과 관계를 맺으셨다는 데 있었다. 그들은 분명히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쉬는 날에 기적을 행하신 데 대해 비난하였다. 다시 말해 그분의 자선 행위가 그들에게는 율법을 위반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죄인들과 맺은 우정은 그들에게 더욱 현실적인 스캔들이었다.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저 사람은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나누고 있구나!’ 하며 못마땅해 하였다”(루가 15,1-2). 물론 그들은 그들의 비난을 곧바로 예수께 돌리지는 않았으나 그런 말을 자기들끼리는 하였다. 좀더 용기있는 이들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시험해 보았다. “저 사람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같이 음식을 나누고 있으니 어찌 된 노릇이오?”(마르 2,16) 예수께서는 차분하고 품위 있게 대답하시며 당신의 계획을 선언하셨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이렇게 계획이 담긴 요점은 처음의 세 복음서에서 거의 같은 말로 발견되고(마태 9,12; 루가 5,32), 그러한 처신은 직접적으로 또한 분명히 예수 자신에게서 드러난다. 그분은 위선적인 바리사이파 사람들 앞에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시고 죄인들에게는 그들의 어려움과 처지를 이해하시는 까닭에 관대하게 대하신다. 이러한 그분의 태도는 주로 루가 복음에서 눈에 띄는데, 이는 세 번째 복음서가 하느님의 관대하신 자비의 메시지임을 다시 한번 드러낸다. 이 경우에서도 화가 루가는 이른바 하느님의 관대하심을 극적인 수법으로 새기지 않고는 못 배긴다.
많은 예술가들이 루가로부터 영감을 얻는 잘 알려진 그림은 참회하는 죄녀에 대한 이야기다(루가 7,36-50). 거기에는 중요한 세 인물이 짝지어 나온다. 식탁에 앉으신 예수, 값진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스승의 발치에 무릎 꿇은 죄녀, 그러고 대접하는 역할을 맡은 바리사이파 사람 시몬. 죄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으나 예수의 발을 눈물로 씻기기 시작하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바른다. 바리사이파 사람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릴 뿐이다.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텐데!” 예수께서는 다만 참석한 사람들에게 솔직하게 말씀하시고 죄녀의 모든 행동을 설명하신다. 그 행동들은 모두 그분을 향한 사랑의 행위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마찬가지로 루가가 묘사한 다른 극적인 이야기는 십자가 상의 일곱 말씀 가운데 하나다. 죄인들의 친구는 죄인처럼 두 강도 사이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셔야 했다. 오로지 루가만이 이 강도들의 말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 그들 중 하나는 조롱조로 말한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 보시오!”(루가 23,39) 반면에 다른 강도는 믿음으로 가득 차서 구원을 청한다.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시어 오실 때에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루가 23,42). 이 시점에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죄인에 대한 말씀이 따라 나온다. “오늘 네가 정녕 나와 함께 낙원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루가 23,43).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께서는, 루가 복음에 따르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루가 15,7)라고 천명하셨다. 이러한 하늘의 기쁨에 착한 강도는 들어갔다. 낙원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는 회개하는 모든 죄인들 때문에 영원히 기쁨을 누린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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