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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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2,919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우리는 성탄의 대사건에 관해 묵상하고자 할 때 전례에 따라 주로 루가와 마태오 복음을 이용한다. 전승에 따르면, 루가는 예술적인 복음서 저자로서 성탄의 신비로움, 특히 마리아에 대한 생생하고 감미로운 그림을 우리한테 남겨 주었다. 그의 묘사는 늘 그렇듯이 그의 고유한 색채, 단순성과 위대함이라는 그의 고유한 분위기를 지닌다. 그는 포대기에 감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여 주고, 구유 곁에서 깊은 애정을 품고 어머니의 초인간적인 기쁨에 넘쳐 있는 마리아를 묘사한다. 루가의 성탄 그림에서 마리아의 아들은 중심적이고 지배적인 모습이다.
반면에 마태오는 아기의 선조들이 열거되어 있는 긴 족보를 성탄에 앞서 소개한다. 족보에 나오는 모든 이름들은 이 다윗의 아들이 유다 백성과 인류와 결속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루가 복음과는 달리 첫 번째 복음에 구세주의 혈통과 인간적인 면모가 더욱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어서, 복음서 저자 마태오는 흔히 인간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예수의 공생활에 대한 묘사에서도 마태오와 루가는 예수의 인간적 면을 조명한다. 예를 들면, 그들은 예수를 광야의 유혹에 사로잡히게 한다. 예수의 말씀을 언급하는 데도 그들은 일생 동안 그분이 얼마나 자연에 매료되셨는지, 그 풍경의 구석구석이 그분에게 어떠한 인상을 남겼는지 부각시킨다. 그 뒤 그들은 올리브 동산의 고뇌를 생생하고 강하게 묘사한다. 의사 루가는 두려움의 결과인 땀이 핏방울에 섞여 땅바닥에까지 흘렀다고 언급한다. 같은 복음서들에서 기적들은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예수의 연민을 입증하고, 종종 “이 사람들이 …… 참 보기에 안되었구나.”(마태 5,32; 마르 8,2)라는 말씀으로 선도(先導)된다.
반대로 네 번째 복음서는 전혀 다른 구조와 태도를 지닌다. 성탄의 사건은 높은 곳으로부터, 즉 하느님에 의해 의도되었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이 지상에 내려오신 것이고, 신성이 인간의 형상으로 출현하신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요한 1,14). 이 지극히 짤막한 묘사에서는 우리가 마구간에서 고려하는 데 익숙해 있는 성탄의 친밀한 분위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별과 구유를 찾는 것이 헛될 뿐 아니라 베들레헴이나 아기에 대한 암시를 찾는 것도 헛되다. 모든 관심은 땅에 내려와 사람들 사이에 천막을 치시는 하느님께로 집중된다. 예수 생애의 사건들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것, 그 자신 안에서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한다. 신학적인 복음은 말씀이 사람이 되셨음을 끊임없이 보게 해준다.
복음 이야기를 따라가 보면 하느님 아들의 광채는 예수의 생애에서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서, 네 번째 복음서는 인간적인 일 저 너머에 시선을 두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사탄 때문에 당하는 예수의 시련은 상상할 수 없다. 타볼 산의 변모에 대한 묘사는 필요하지 않고, 기적들 자체는 하느님의 영광을 밖으로 빛나게 하는 ‘표징들’이다.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요한 2,11). 올리브 동산에서 체포되신 뒤에 그분은 왕다운 태도로 빌라도 앞에 재판을 받으러 출두하신다(18,33-37). 총독은 “자, 여기 너희의 왕이 있다.”(19,14)는 말로 그분을 백성한테 공개한다. 예수의 죽음 뒤에까지 총독은 계속해서 이 왕권을 십자가 위의 명문(銘文)으로 증언한다. “한번 썼으면 그만이다”(19,22).
그런데도 요한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빛나는 논증 가운데서도 그분이 완전하게 인간이심을 분명히 보여 준다. 때때로, 이러한 방향으로 암시되는 기록들이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너무 적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일단 발견되면 그러한 기록들은 더욱 오래 된 복음서들의 많고 긴 묘사들을 능가하는 설득력 있는 힘을 지닌다.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여행 중에 예수께서는 한때 몹시 지지셨다. 여행으로 지치신 예수께서는 단순히 우물가에 앉으셨다(요한 4,6). 그리고는 갈증을 풀기 위해 물을 청하셨다(4,7). 모든 관습을 거슬러서(4,9) 그리고 사도들의 놀라움 속에(4,27) 그분은 한 사마리아 여인과 긴 대화를 하셨다.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중에 그분은 종종 베다니아에 있는 한 절친한 가족을 방문하셨다(11,3). 그리고 가족의 변화를 생생하게 들으신 그분은 라자로의 죽음에 눈물을 홀리셨고(11,35), 비통한 심정에 잠기셨으며 울고 있는 마리아와 그 주위 사람들을 보시고 동요하셨다. 친구의 무덤 앞에 가신 그분은 다시 한번 강한 비애를 느끼셨다(11,38). 한마디로 어떤 면에서도 그분은 친구 라자로의 무덤 곁에서처럼 더 인간적인 태도를 드러내신 적이 없다.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은 목마르다고 외치셨다(19,28). 그리고 한 병사가 그분이 죽으신 뒤 그 시체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고, 거기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19,34).
네 번째 복음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는 분명히 하느님이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분명하게 인간적인 요소, 특히 인간적인 고통을 타고나셨다. 말씀의 육화는 참으로 ‘육화’가 되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인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은 서문의 숭고한 종합인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속에 함축되어 있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4년 9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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