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나는 세상의 빛이요 부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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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5 | 조회수3,349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나는 세상의 빛이요 부활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많은 학자들은 요한의 복음서를 하느님의 구원과 그 부정(否定)을 설명하려고 애쓰면서 ‘이원론(二元論)적 복음서’라고도 한다. 즉 그것은 진리와 거짓, 생명과 죽음, 빛과 어두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아가 어떤 때는 대립이 ‘위에서’와 ‘아래서’라는 표현과 함께 지역적 실재로서 제시된다. 이러한 판단에서 두 개의 개념과 지속적인 투쟁으로 대립하는 두 개의 세력조차 짝지어 나타난다.
심오한 서문은 두 개의 대립을 번갯불처럼 신속하게 보도록 해준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 1,5). “(말씀이 곧 참 빛이었다.)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 말씀이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이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9-10). 이러한 투쟁을 지배하는 참된 동기로서 네 번째 복음서 페이지마다에는 사람들의 투쟁으로 끝이 나는 개념의 투쟁이 반복해서 나온다.
서문의 핵심에는 추상적인 빛에서 참된 빛으로 넘어가는 가운데 갑자기 세례자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그 빛을 증언하러 왔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증언을 듣고 믿게 하려고 온 것이다”(요한 1,7). 이러한 묘사는 세례자가 빛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가 세례자의 제자들도 알고 있고(사도 18,25) 예수께 그들을 데려가고자 했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는 빛이 아니라 다만 그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요한 1,8). 다른 데서도 복음서 저자는 그의 옛 스승 -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세례자의 제자였다. - 이 빛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한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냈을 때에 요한은 진리를 증언하였다. 요한은 환하게 타오르는 등불이었다”(요한 5,33.35). 증언을 하는 요한의 불은 그가 증언하는 분, 참된 빛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복음서의 첫 번째 이야기에서 빛은 - 바로 서문의 첫 절에서처럼 - 비인격적이고 추상적으로 나타난다. “빛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행실이 악하여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 이것이 벌써 죄인으로 판결받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과연 악한 일을 일삼는 자는 누구나 자기 죄상이 드러날까봐 빛을 미워하고 멀리한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은 빛이 있는 데로 나아간다. 그리하여 그가 한 일은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라 한 일이라는 것이 드러 나게 된다”(요한 3,19-21).
교훈적(정신적)이었던 것 같은 빛으로부터 참된 빛, 즉 그리스도로 넘어감은 태생 소경의 치유에 앞서는 긴 담화에서 눈에 띄게 나타난다. 예수께서는 명백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라고 확언하신다. 이 말씀에서 “그 빛이 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었다.”(요한 1,9)는 서문의 연결은 분명하다. 이 빛은 사람에게 봉사한다는 분명한 과제를 지니고 있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이와 같이 빛은 생명과 관계를 맺고 있고, 이것은 태생 소경의 이야기에서 설명된다. 태어날 때부터 이 사람에게는 중요한 신체기능의 결함이 있었다. 구걸하기 위해 길가에 앉아있는 그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관대함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오로지 전능하신 순례자만이 그에게 빛을 주실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은 내가 세상의 빛이다”(요한 9,5). 이 기적적으로 건강이 회복된 사람만이 자기 자신 안에 기적적으로 실현된 것을 지니고 있으며, 그는 실로암 못의 벽을 보고 탄복할 수 있게 되자마자 예수께서 빛이심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만 부분체험이었다. 참되고 고유한(본연의) 체험은 정신적인 면에서 실현된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보는 사람과 못 보는 사람을 가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눈멀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다음 장에서는 빛의 인격적인 내용이 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걸려 넘어지는 것을 피하게 하고 나아가 사람 안에 뚫고 들어오는 낮의 빛에 대해 말한다(요한 11,9-10 참조).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낮에 걸어다니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빛이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빛이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그리하면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할 것이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러니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는 선언 뒤에 우리는 이 본문에서 ‘빛’이라는 말을 인칭대명사 ‘나’와 대치할 마음이 생긴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뿐이니 내가 있는 동안에 걸어가라.” 이러한 국면에서 유다문학의 많은 본문에 나오는 ‘빛의 자녀’라는 표현은 요한의 서문에 이미 나와 있는 “하느님의 자녀”(요한 1,12)라는 말을 환기시킨다. 빛속을 걸음으로써 빛의 자녀가 된다.
미사 신경은 하느님의 아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신 하느님이시오,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라고 선언한다. 그분을 믿으면 우리는 빛의 자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요한 12,46).
“나는 부활이다”
요한복음에서 연속되는 일곱 개의 ‘표징’은 점차로 라자로의 부활이라는 예수의 공생활의 최고 현시로 성장해 나간다. 포도주의 기적으로부터 시작하는 시리즈는 빵을 많게 하심, 태생 소경과 중풍병자의 치유 뒤에 죽은 이의 부활로 절정에 이른다. 이러한 상승하는 선과 함께 예수를 따르는 이들의 수도 늘어난다. “마리아를 찾아왔다가 예수께서 하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요한 11,45). 이것은 그분의 적들에게 극도의 미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요한 11,53). 네 번째 복음서 전체는 점차적으로 이러한 절정을 향해 움직인다.
아마도 라자로의 부활을 예수의 공생활 전체의 정점으로 고려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네 번째 복음서에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세 번 언급된다. 막 죽은 야이로의 딸의 부활(마태 9,18; 마르 5,35; 루가 8,49), 그리고 이미 죽어서 무덤으로 가다가 성 밖에서 예수께서 생명을 불러일으켜 주신 젊은이의 부활(루가 7,11-15), 가장 놀라운 세 번째 기적은 이미 무덤에 묻힌 시체와 관련된다. 돌은 치워 져야 했고, 물러섰던 사람들은 부패된 시체 때문에 뒷걸음질친다. 다른 부활들과 나아가 예수의 다른 행위들과 비교해 볼 때 라자로의 부활기적은 의심의 여지없이 가장 위대하다. 그러나 이 놀라운 이야기에서 예수의 가장 심오하고 장엄한 확언이 발견된다. 라자로의 무덤에 다다르기 전에 주께서는 “나는 부활이다.”(요한 11,25)라고 선언하신다. 묘사의 복잡함 속에서 이 선언은 다만 감동적일 뿐 아니라 또한 예수께서 완성하시려는 기적에 대한 명백한 선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 말씀의 의미는 육체의 부활을 첫자리에 놓지 않는다. 자신의 전개방식에 맞추어 복음서 저자는 자신의 사고를 대화의 형식으로 발전시킨다. 예수께서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요한 11,23)라고 말씀하신다. 마르타는 이해한다고 믿고 미래에 있을 육신의 부활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한다.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요한 11,24). 예수께서 대화를 계속하시고, 이렇게 계속하시는 동안에 그러한 응답을 내치시기 때문에 여기에 포함된 것이 다만 육신의 부활에 관한 문제라고 간주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신의 장엄한 선언으로 말씀하신 새로운 것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따라서 그 선언은 내적인 부활, 영에 따른 생명, 사람의 영혼 안에 일어나는 기적을 나타낸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께 달려있다. 그분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부활로 주실 것이고, 그것은 육체의 부활과 독립적으로 지속될 것이다. 마르타는 이 새로운 국면을 믿음의 조항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전반적인 서원으로 자신의 동의를 고백한다. “예 주님,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시기로 약속된 그리스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것을 믿습니다”(요한 11,27).
또한 요한복음서의 다른 곳에서도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선언으로 육신의 최종 부활을 첫 자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영신적인 부활을 뜻하신다는 것이 명백하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그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섰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때가 오면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것이며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아날 터인데 바로 지금이 그때이다”(요한 5,24-25). 이 선언에서 두 개의 큰 진리가 부각된다. 음성을 알아듣는 죽은 이들이 부활할 때는 이미 와있다는 것이고, 부르는 음성은 하늘의 음성이 아니라 이 세상을 걸으시는 사람의 아들의 음성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듯이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요한 5,21).
어떤 해석학자들은 “나는 부활이다.”는 예수의 선언을 순전히 지성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문체상으로 볼 때 여기서는 원인보다 결과가 언급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는 부활이다.”는 말로 예수께서는 “나는 부활의 원인이다.”를 뜻하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명은, 문법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으나 예수의 의향을 비이성적으로 축소시킨다. 그분은 다만 우리한테 부활의 원인 이상이시다. 그분은 살아있는 하느님이요, 부활하신 분 또는 부활하실 분이며, 따라서 그분 자신이 부활이시다. 우리의 부활로 우리는 그분의 생명과 그분의 부활에 참여한다.
이미 볼 수 있는 부활에 대한 입증으로서 예수께서는 라자로를 밖으로 나오게 하시어 그에게 생명을 돌려주셨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이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요한 12,11). 즉 많은 이들이 볼 수 있게 라자로와 함께 부활하였다. 라자로의 부활과 예수의 인격 안에서 영적 부활은 구체적으로 현존한다. (L’uomo mo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5년 3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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