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갈리오 앞에 선 바오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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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13 | 조회수2,609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신약] 갈리오 앞에 선 바오로
금세기 초 델포이에서 실시된 발굴 작업에서 갈리오의 이름이 나오는 묘비의 발견으로 성서학계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였다. 그 누구도 이 그리스어 신탁들 가운데서 이전의 성서 자료를 새롭게 조명해 줄 무엇이 나올 수 있으리라고 예측할 수 없었다.
대리석에 새겨진 비문은 황제령으로 델포이에 대한 특권을 승인하고 있다. 대리석판은 단 네 조각만 발견되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가장 큰 조각에 황제의 친구이자 아카이아의 지방 총독이었던 갈리오의 이름이 있었다.
바로 그가 바오로의 생애에서 마주치게 되는 갈리오인데, 바오로는 재판을 받기 위해 그 앞에 끌려갔었다. 날짜가 기록되어 있는 델포이의 비문은 언제 갈리오가 지방 총독이었고, 바오로가 언제 법정에서 그 앞에 서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그 날짜는 비문에서 나타난 것 - 52년 1월과 8월 사이 - 처럼 대략적일 뿐이다. 사실 우리는 갈리오의 지방 총독 재임시간이 51년 5월에서 52년 5월까지라고 확신있게 단정할 수 있다.
그해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생겨났다 “갈리오가 아카이아 지방 총독으로 있을 때 유다인들이 작당을 하여 바오로를 붙잡아 법정으로 끌고가서 ‘이 사람은 하느님을 예배하라고 사람들을 충동하며 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하고 고발하였다. 바오로가 답변하려 하자 갈리오는 유다인들에게 ‘유다인 여러분, 만일 이 사건이 무슨 범법이나 악한 범행에 관련된 것이라면 당신들의 고발을 들어주겠소. 그러나 이것은 말과 명칭과 당신들의 율법에 관련된 것이니 만큼 당신들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나는 이런 사건을 처리하는 재판관 노릇을 하고 싶지 않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법정에서 몰아냈다”(사도 18,12-16).
이 묘사에서 냉정하고 완고하며 나아가 오만한 태도를 지닌 지방 총독은 멸시당하는 소수 민족 유다인들 앞에 있다. 이들은 자기네 법과 규범을 실제로 가지고 있지만 중요한 결정에서는 명백하게 로마에 복종한다. 고발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있었던 움직임과 아주 흡사하고, 갈리오는 빌라도처럼 유다인들에 대해 완고하고 경멸적이다. 그는 그들을 자기의 법정에서 내쫓아버린다.
그러자 몹시 화가 난 군중은 자기들의 분노를 회당장 가운데 하나에게 폭발시킨다. “그들은 일제히 회당장 소스테네를 붙들어다가 법정 앞에서 매질을 하였다. 그러나 갈리오는 그 일에 도무지 참견하지 않았다”(사도 18,17).
바오로는 여전히 여러 날을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브리스킬라와 아퀼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났다(사도 18,18). 두 여행 동료는 그가 고린토에 도착했을 때 알게 된 이들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본도 출신인 아퀼라라는 유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아퀼라는 글라우디오 황제가 모든 유다인은 로마에서 나가라는 칙령을 내렸기 때문에 얼마 전에 자기 아내 브리스킬라를 데리고 이탈리아를 떠나온 사람이었다. 바오로가 그들을 찾아갔다”(사도 18,2). 글라우디오 황제의 그러한 반유다적인 법령은 역사가들에 따르면 49년에 공표되었다.
사도행전 18장의 이런 자료들을 가지고 1년 6개월에 걸친 바오로의 고린토 체류 날짜를 아주 정확하게 정하기 위해 두 가지 좋은 기준을 설정해 보자. 로마에서 유다인들의 추방이 있은 지 얼마 뒤에 바오로는 고린토에 도착했다. 아마 50년쯤이었을 것이다. 오래지 않은 기간 뒤에 갈리오 법정의 일화가 있었고, 51년 또는 52년에 그는 떠났다. 그렇기 때문에 안티오키아로부터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바오로의 두 번째 선교여행은 50년에 시작해서 53년에 끝났다.
그것으로 우리는 바오로의 격동의 생애에 하나의 확실한 자료를 갖게 된다. 바오로의 두 번째 선교여행 얼마 전에 있었던 예루살렘 공의회는 49년에 열렸음에 틀림없다. 키프로스와 소아시아를 통과하는 첫 번째 선교여행은 공의회 바로 전인 46-49년에 이루어졌다. 두 번째 선교여행에 바로 이어서 이루어진 세 번째 선교여행은 54-58년의 일이다. 이 마지막 해에 바오로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체사레아로 이송되었고 다시 체사레아에서 로마로 이송되었으며 적어도 63년까지 죄수로 있었다.
고린토에서 일어난 이러한 작은 일화는, 실제로 바오로의 생애에서 약간 또는 전혀 관련을 갖지는 못하지만, 사도행전과 델포이의 비문에 나오는 갈리오에 대한 언급 덕분에 사도의 생애 연도를 파악하는 데 확실하고도, 주요한 단서가 된다.
로마인들과 관련지어 볼 때, 바오로는 고린토에서 갈리오의 법정에 있었고, 체사레아에서는 펠릭스와 보르기오 페스토 총독 앞에 있었으며, 로마에서는 네로 황제 앞에 있었다. 로마법과 로마 사법부의 마찰은 우리가 사도행전으로부터 잘 알고 있으며 그의 생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마법의 보호를 거듭 호소했음에도 마침내 그는 머리를 로마의 칼 아래 떨구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 패배였다. 왜냐하면 바오로의 순교 직후 그의 교리는 총독들, 지방 총독들, 그리고 황제들에게도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은 휘청거리고 실패해버린 반면, 사도의 말은 남아있고 승리한다. (L’uomo moderno di fronte alla Bibbia에서 박래창 옮김)
[경향잡지, 1997년 2월호, 베난시우스 더 레이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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