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하느님 현존의 자리, 성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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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15 | 조회수2,983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하느님 현존의 자리, 성전 (1)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성전입니다”(2고린 6,16)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면 ‘통곡의 벽’이라는 곳을 보게 된다. 이 벽은 온 세상에 퍼져 사는 유다인들에게 가장 거룩한 곳이다. 유다인들은 그곳에 가서 슬픔 속에 자기들의 역사를 회상하며, 성전의 파괴와 조상들의 유배살이를 되새긴다. 또한 옛 조국의 영광을 돌이켜보며, 그 영광이 다시 찾아오기를 기도한다.
‘통곡의 벽’이 유다인들에게 성스러운 까닭은 그곳이 옛날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곳인 지성소에 제일 가깝기 때문이다. 옛 성전자리에는 회교 사원이 들어서 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공식적으로 성전의 옛터에 ‘통곡의 벽’보다 더 가깝게 갈 수가 없다.
이 성전이 예수님 시대에는 유다 땅에서 가장 중요할 뿐더러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어떤 제자가 새삼 감탄하면서 예수님께,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 만합니까?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마르 13,1). 이러한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는 예수님 시대에서 다시 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전의 모태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에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계약궤이다(출애 25,10-22 참조). 시나이산에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의 문서인 십계명판을 담은 이 궤를(1열왕 8,9), 반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늘 함께 모시고 다녔다. 양떼를 먹일 풀밭을 찾아 돌아다니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원성전은 ‘천막 성전’이었던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면서, 이 ‘이동 성전’도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어느 한 장소에 고정되지 않고, 사정에 따라 실로나(1사무 3,3) 키럇여아림(l사무 7,1) 같은 곳으로 옮겨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 계약궤가 있는 곳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중심을 이루는 성전이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계약궤가 그곳에 옮겨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다윗은 왕국의 수도로 정한 예루살렘에 계약궤를 모셔다 놓음으로써, 이 도시를 명실공히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로 만든다. 그는 이어서 계약궤가 가리키는 하느님에 걸맞는 성전을 지으려 한다. 다윗의 이런 의도에 대해서 ‘이동 성전’의 오랜 전통에 따른 반대도 없지 않았다. 역대기 저자는 다윗이 나라를 세우면서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 때문에 성전을 지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1역대 28,3).
결국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칠 년의 큰 작업 끝에 예루살렘 성전을 완공한다(1열왕 6장). 성전은 이 밖에 ‘성소’ ‘주님(하느님)의 집’ 또는 그냥 ‘집’으로 불린다. 그리고 이 명칭들 앞에는 하느님을 뜻하는 ‘그분의’나 ‘나의’가 붙기도 한다. 이 예루살렘 성전이 처음부터 유일한 성전은 아니었다. 지방 성전들이 나름대로 계속 기능을 수행하였다. 그러면서도 예루살렘 성전은 중요성을 점점 더하게 된다.
특히 유다 임금 히즈키야(2열왕 18장)와 요시아의 종교개혁을 거치면서(2열왕 22-23장) 예루살렘 성전은 유일 성전으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러나 백성의 종교생활과 함께 성전의 문제점도 드러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주님의 성전’으로서 절대적인 것이라 여기게 된다. 주님의 절대성을 그분 현존의 자리인 건물에까지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있으니. 곧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니 어떤 재앙도 미치지 않는다.”(미가 3,12)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의식만 거행하는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종교 중심지인 성전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미 기원전 8세기 후반부에 미가 예언자가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는데(미가 3,12), 백 년이 지난 다음 예레미야가 같은 예언을 하기에 이른다(예레 7; 26장). 하느님의 백성이 하느님을 저버리므로, 그분께서 당신의 현존을 약속하신 성전도 버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기원전 587년, 성전은 예루살렘과 함께 약탈당하고 불에 타 파괴된다. 이때 계약궤도 없어진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에게 성전은 없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그들은 성전이 없이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길 수 없었다. 오십 년이 지난 다음, 페르샤 임금 고레스가 근동의 패자로 나서면서, 바빌론으로 유배 갔던 유다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으라는 허락을 받는다. 그려나 기원전 537년에 시작한 공사는 갖가지 어려움 때문에 곧바로 중단된다. 그러다가 하깨와 즈가리야 예언자의 격려 아래 520년에 공사를 재개하여, 515년에 끝낸다(에즈라, 느헤미야 예언서 참조). 페르샤 왕국의 도움을 받아가며 솔로몬 성전을 본따 짓기는 했지만, 새 성전이 제1성전보다 여러 면에서 소박했을 것임은 쉬 짐작할 수 있다.
유배시대 이후, 독립을 상실한 유다 공동체에게 이 제2성전은 유일무이한 성전이었다. 집회서 저자는 기원전 180년경, 대사제가 성전에서 전례를 거행하는 모습을 경건한 유다인의 눈으로 감격스럽게 묘사하기도 한다(집회 5,1-21).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기원전 167년에, 외국 임금에게 약탈을 당하고, 한때나마 제우스 신전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2마카 6,2). 그러다가 기원전 19년에 이방인이었던 헤로데 대왕이 유다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성전을 대대적으로 증축한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헤로데 성전’에서 활동하신다. 그러나 이 성전은 오래가지 못하고 기원후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파괴된다. 130년에는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 예루살렘이 로마 이름으로(엘리아 카피톨리나) 불리고, 옛 성전 터에는 주피터(제우스의 로마식 이름) 신전이 세워진다. 예루살렘은 뒤에 옛 이름을 되찾지만, 성전은 다시 지어지지 못한 채 ‘통곡의 벽’만 그 흔적을 보여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처럼 성전 전례에 참석하다가(사도 2,46), 점점 성전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바로 성전이라는 믿음 때문이다(마태 12,6; 요한 2,21). 그리고 그분의 몸은 그분의 교회이므로, 교회가 이제 새로운 성전이 된다(1고린 3,9; 에페 2,19-22).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느님의 진정한 현존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7년 3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성서의 세계 : 하느님 현존의 자리, 성전 (2) “‘주님의 집으로 가세!’ 하고 사람들이 나에게 이를 제 나는 기뻤노라”(시편 122,1)
지난달에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를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성전이 어떻게 생겼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열왕기 상권 6장과 7장을 보면, 기원전 980, 970년대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모습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그 서술을 바탕으로 성전을 복원하는 일은 쉽지 않다. 구체적으로, 건물의 겉모습이 어떠하고 벽이 얼마나 두꺼운지 등에 관해서 성서 본문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건축 전문용어들까지 있어서 성전 복원을 시도할 때마다 늘 문제를 안기 마련이다. 이런 사정을 함께 생각하면서 그림 1(평면도)과 그림 2(옆모습)를 보자.
성전은 동쪽을 향해서 직사각형으로 지어졌다. 본건물의 너비는 9.4미터, 길이는 282미터 가량 되는 석조건물이다(히브리 도량형을 우리의 도량형으로 정확히 환산할 수 없기 때문에, 다음에 나오는 수치들도 모두 대략적인 수치이다.). 9.4미터는 그때의 건축기술로 중간에 기둥 없이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너비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전의 이 본건물은 성소와 지성소로 나뉜다.
안쪽에 있는 지성소는 말 그대로 성전에서 가장 거룩한 곳이다. 벽과 바닥을 나무로 씌우고 금으로 호화롭게 장식하였지만, 창이 하나도 없어서 캄캄한 이곳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모두 9.4미터이다. 여기에 십계명판이 든 계약궤가 모서졌다. 그리고 올리브나무로 만든 커다란 거룹 둘이 이 계약궤를 보호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높이가 47미터, 그리고 날개를 펀 길이도 각각 4.7미터여서, 이 거룹 둘이 지성소를 가득 채운 것과 같다. 계약궤는 바로, 보이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 지성소에는 대사제가 일년에 한 번, 그것도 엄격한 예식을 거친 끝에야 들어갈 수 있었다.
지성소와 성소는 두께가 2.8미터 되는 벽과 거기에 달린 나무문과 계단으로 분리된다. 지성소와 마찬가지로 치장된 성소는 길이가 188미터, 높이가 14.1미터이다. 지성소와는 달리 좌우의 벽 높은 곳에 창문들이 나있다. 의식을 거행하는 사제들만 들어가는 이곳에는, 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힌 작은 제단이 지성소 앞에 놓여 있다. 이 금제단은 향을 피우기 위한 것이다. 역시 나무로 만든 다음 금을 입힌 것으로 여겨지는 등잔대가, 남쪽과 북쪽에 각각 다섯 개씩 나란히 배열되었다. 그리고 금으로 만들었는지, 아니면 금만 입혔는지 분명하지 않은 상이 있는데, 그 위에는 ‘(하느님) 현존의 빵’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제사 빵’이 놓인다. 성전에서 행해지는 전례 대부분이 이 성소에서 거행된다.
성소에 이어서 두께가 2.8미터 되는 벽과 거기에 달린 문으로 분리된 ‘현관’이 나있는데, 너비는 성소의 너비보다 더 길게 뻗어있다. 성소와 지성소와는 달리 지붕이 없던 것으로 생각되는 이 현관의 구체적인 기능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성전 둘레의 개방된 뜰에서 거룩한 성전 안으로 들어가는 중간지역 구실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현관 앞에는 특별히 ‘야긴’과 ‘보아즈’라 불리는, 높이가 114미터 되는 청동 기둥들이 따로 세워졌다. 이것들도 현관처럼 그곳이 거룩한 곳임을 가리키는 구실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 성소와 지성소의 바깥 벽에는 세 면을 돌아가며 돌 또는 나무로 된 부속방들이 삼층으로 지어졌는데, 각 층에 방이 서른 개 정도였다.
열왕기는 성전 건물을 둘러싼 뜰은, 그것이 다듬은 돌 세 줄과 나무 들보 한 줄로 울타리 쳐졌다고만 말한다. 이 뜰 안에 여러 기물들이 배치되었는데 중요한 것으로는, 먼저 성전의 남동쪽에 높이가 2.35미터, 지름이 4.75미터 되는 커다란 물통이 있었다. ‘청동 바다’로 불리면서(2열왕 25,13)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여겨지는 이 물통은 열두 마리 황소 위에 얹혀졌는데, 황소들은 세 마리가 한 짝을 이루어 네 짝이 각기 동서남북 한 방향씩을 향하였다. 또 지름이 1.9미터 되는 물두멍이 받침대와 함께 성전 뜰 오른쪽과 왼쪽에 각각 디섯씩 배열되었다.
그리고 역대가 하권 4장 1절에 따르면, 길이와 너비가 각각 9.4미터, 높이가 47미터 되는 청동 번제 제단이 있었다. 성전의 이 기물들 가운데에서 계약궤는 기원전 587년 성전이 파괴되면서 없어지고 두 청동 기둥과 ‘청동 바다’는 유배 뒤의 제2성전에서 복구되지 못한다.
기원전 19년에 성전을 증축할 때, 헤로데 임금은 본토에 사는 유다인들만이 아니라, 세계의 여러 대도시에 살면서 신전들을 많이 본 유다인들도 고려하였다. 그래서 거룩한 곳인 성소와 지성소의 규모는 건드리지 않은 반면, 그 밖의 부분들은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몄다.
지붕에는 금을 입힌 꼬챙이들을 세워놓아 새들이 앉아서 더럽히지 못하도록 하고, 현관은 너비와 높이를 각각 47미터로 늘렸다. 헤로데는 유다인들의 종교 심성을 고려하면서도 현관에는 금 독수리를 만들어 달았다. 이는 제우스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유다인들의 분노를 사기도 하였다. 그는 또 성전 지붕만이 아니라 바깥 벽에도 금으로 치장을 많이 하여, 해가 비칠 때에는 눈이 부실 정도였다고 한다.
역시 거룩한 곳으로 간주된 성전 뜰은 여러 구역으로 정리되어, 해당되는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그림 3 참조). 가장 안쪽에는 ‘사제의 뜰’, 그 둘레에는 전례에 참석할 수 있는 정결한 ‘남자의 뜰’(또는 ‘이스라엘인의 뜰’) 그리고 성전 본건물을 마주보는 정문 쪽에는 ‘여자의 뜰’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는 유다인이 아닌 사람은 들어갈 수 없고, 이방인은 들어가면 사형을 받는다는 팻말이 그리스말과 라틴말로 쓰여 있었다(사도 21,27-31 참조).
헤로데는 성전 뜰 밖으로 ‘이방인의 뜰’이라 불리는 큰 광장을 만들었다. 이는 로마나 그리스식 도시의 공공 광장에 해당하는 곳으로 아무나 들어갈 수 있었다. 헤로데는 이 광장 한쪽 끝에 ‘안토니아 성채’라는 것을 세웠는데, 성전을 보호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감시하기 위한 것이었다. 네 면이 회랑으로 둘러쳐진 이 성전 바깥 뜰을 만드는 것은 공이 많이 드는 큰 공사였다. 세 면이 골짜기이기 때문에 때로는 백 톤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들을 끌어다가 기초공사를 해야 했다. 이렇게 조성된 성전 산의 전체 기본 터는 43,500평이나 되는 것으로, 당시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문 구조물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성전은 과연, 예수님의 제자가 “선생님, 저것 보십시오. 저 돌이며 건물이며 얼마나 웅장하고 볼만합니까?”(마르 13,1) 하고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헤로데의 증축공사는 십년이 걸리지만, 부수공사는 그 뒤로도 몇 십년 동안 이어진다(요한 2,20 참조). 그러나 작업이 완전히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기원후 70년에 이 ‘헤로데 성전’은 영원히 파괴되고 만다. [경향잡지, 1997년 4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성서의 세계 : 하느님 현존의 자리, 성전 (3) “영원히 당신의 것으로 삼으신 성소에 와서 너희 하느님이신 주님을 섬겨라”(2역대 30,8)
지난달에,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와 이 성전이 어떤 모습으로 지어졌는지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어떤 이들이 성전에서 봉직하였고 이스라엘인들은 어떻게 성전 의식에 참여했는지, 유배 이후에 다시 지은 ‘제2성전’과 예수님께서도 다니신 ‘헤로데 성전’을 중심으로 알아보자.
성전에서 첫째가는 위치를 차지하는 이들은 가장 중요한 일들을 수행하는 사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공동체와 개인의 제물을 바쳐 제사를 거행한다. 성소의 등잔을 켜고 끄며 분향제단에 향을 피우는 것도 그들의 일이다. 그리고 사제들은 향을 피우거나 제사를 바친 뒤에 전례에 참석한 백성을 축복한다. 성가를 부르는 것과 성전을 지키는 것은 본디 레위인들의 임무지만, 사제들은 이 일에도 레위인들의 상급자로서 관여한다. 그래서 축일이 시작될 때라든가, 노래를 시작할 때와 중간중간에 나팔을 부는 것도 사제의 직무이다.
전국에 흩어져 사는 사제들은 가문에 따라 24조로 나뀐다(1역대 24,7-19). 예컨대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는 여덟 번째인 ‘아비야조’에 속하였다(루가 1,5 참조). 각 조는 순서에 따라 일년에 두 번씩 성전에 가서 일주일 동안 일한다. 사제들의 임무 배당은 주사위를 던져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 방식으로 우선 공동제물을 바칠 사제 스무 명이 뽑히고(루가 1,9 참조), 그 밖의 사제들은 개인들이 가져오는 제물을 바치는 일에 참여한다.
사제직은 세습제로 이어진다. 사제 가문의 남자는 원칙적으로 사춘기에 도달하면 어른들과 함께 성전 일을 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스무 살이 되어야 사제로 나서게 된다. 사제는 늙을 때까지 봉직할 수 있는데, 몇 살인지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사제 가문의 출신이라 할지라도 “몸에 흠이 있는 사람은” 사제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레위 21,17-23). 그러나 이런 이들도 때가 되면 자기 조의 사제들과 함께 성전으로 가서, 여러 가지 부차적인 일을 하고, 다른 사제들과 함께 백성을 축복하며, 제물 가운데서 자기들의 몫도 받는다.
사제들 가운데 이른바 ‘고위 사제들’이 있다. 이들은 주마다 바뀌는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통솔하며 그들한테 작업을 할당하고, 성전 문을 여닫는 것이라든지, 제사에 필요한 물품의 판매를 책임지고, 성전의 보고와 창고를 관리하는 일을 한다. 이 관리 사제들은 대사제 가문에 속한 이들로서, 그들의 직무도 대부분 세습제로 이어진다.
대사제는 사제들의 우두머리로서 독립을 상실한 유배 이후의 유다인 공동체에서는 종교만이 아니라 정치의 수장 구실까지 한다. 그는 사제들의 조에 관계없이 아무 때나 제물을 바칠 수 있다. 또 안식일과 축일의 전례를 주례하고, 일년에 한 번 돌아오는 속죄일에는(레위 16장) 혼자서 지성소에 들어가 분향한다. ‘대사제 대리’라 할 수 있는 ‘수(首)사제’가 또 있다. 그는 대사제가 전례를 집전할 때 그를 보좌하고, 성전의 모든 일을 관장한다.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성전 수위대장’으로 나오는 사람이 바로 이 ‘수사제’이다(루가 22,4; 사도 4,1).
레위인들도 성전 봉직자였는데, 유배 이후에는 그들의 직무가 점점 줄어든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 후기 작품인 에즈라서와 느헤미야서, 역대기 등에서는 성전과 관련해서 레위인들이 늘 등장하는데, 그 뒤의 작품인 집회서와 마카베오서 상권의 비슷한 상황에서는 이들이 언급되지 않는다. 사제들처럼 24조로 나뉜(1역대 25,9-31) 레위인들의 직무는 결국 주로 성가를 부르거나, 문지기로서 성전문을 지키는 일에 한정된다. 사제들이 나팔을 들고 제단 오른편에 서면, 레위인 성가대는 ‘사제의 뜰’과 ‘남자의 뜰’ 경계선에 마련된 단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문지기들은 보기에 불결하거나, 전례에 참석할 수 없는 부정한 상태에 있는 이들이 성전에 들어와 그것을 ‘더럽히지’ 못하게 한다. 레위인 문지기들은 밤낮으로 성전을 지키며 정한 시각에 문을 열고 닫는다. 성가대와 문지기는 집안별로 정해진 채(1역대 9장), 성전이 파괴될 때(기원후 70년)까지 변함없이 세습된 것으로 여겨진다.
성전의 전례는 사제와 레위인뿐만 아니라 백성이 참석해야만 거행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인들은 개인으로, 또 집단으로 성전에 가서 참배한다. 이스라엘인들은 개인으로, 또 집단으로 성전에 가서 참배한다. 개인으로는, 재물이나 예물을 바치기 위해서, 마리아처럼 아기를 낳은 뒤나(루가 2,22) 악성 피부병과 같은 부정한 병에서 나은 뒤에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성전을 찾는다.
성전은 ‘기도의 집’이기도 하다(이사 56,7; 마르 11,17). 특별히 사제가 성소에서 분향하거나(루가 1,10) 제물을 바칠 때, 많은 이들이 모여 기도한다. 그리고 분향을 마친 사제한테 축복을 받는다(민수 6,22-27 참조).평신도가 성전 안에 들어서면 신을 벗고, 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물에 몸을 담그는 ‘정결 의식’을 한다.
사제들과 레위인들이 24조로 나뉜 것처럼, 일반 백성도 24조로 나뉜다. 차례가 돌아온 조는 온 백성을 대표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일주일 동안 날마다 정기적으로 거행되는 제물 봉헌에 참석한다. 이 의식에 참석할 때에는 흰옷을 입도록 강조한다. 봉헌이 끝나면 그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성서를 봉독하며, 단식을 하기도 한다. 사정이 생겨서 성전에 가지 못한 이들은 사는 곳에서 한데 모여 성서를 봉독한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한, 이스라엘인은 누구나 성전에 갈 수 있고 또 제물을 바칠 수 있다. 외국인들도 성전 안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제물을 바칠 수는 있다. 성전에서 참배한 이는 성소 쪽으로 등을 보이지 않은 채 성전 밖으로 나간다.
성전 봉직자의 복장
사제의 복장은 네 가지로 구성된다. (1) 허리에서 넙적다리까지 닿는 고운 아마포 속바지, (2) 아마포로 된 저고리(유배시대 이후에는 이 저고리가 위 그림에서처럼, 소매는 손바닥까지, 기장은 발목까지 닿은 겉옷이 된다.), (3) 이 저고리 또는 겉옷 위에 두르는 아마포 띠, 그리고 (4) 아마포로 된 머리 쓰개가 그것이다. 사제들이 “영광스럽고 장엄하게 보이도록”(출애 29,40) 하려는 이 옷들은 ‘거룩한 옷’으로 여겨졌다.
레위인들의 복장에 대해서는 성서에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다만 그림에서 볼 수 있듯, 사제들보다 더 수수한 차림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사제들의 옷과는 달리 레위인들의 복장은 거룩한 것으로 간주되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대사제도 사제들처럼 위의 네 가지 의복을 갖춘다. 다만 띠가 아마실만이 아니라, 여러 색의 털실로 무늬를 놓아가며 만들어졌다. 대사제의 복장에는 네 가지가 더 첨가되는데 먼저 (5) 사제가 입는 저고리 또는 겉옷 위에 소매 없이 순자색 실로 만든 ‘에봇 - 겉옷’을 입는다. 이 옷자락 둘레에는 자색과 자홍과 다홍 털실로 된 석류들이 달렸고, 석류 사이사이에는 돌아가면서 금방울을 달았다. 그래서 대사제가 전례를 거행하면서 움직일 때마다 방울소리가 울렸다. (6) 이 위에 금실, 자색과 자홍과 다홍 털실, 그리고 가늘게 꼰 아마실로 정교하게 만든 것으로서, 어깨까지 닿는 앞치마처럼 생긴 에봇을 입는다. 에봇 위에 띠를 두른 다음, (7) 에봇과 같은 재료로 만든 가슴받이를 금줄로 어깨에 고정시킨다. 길이와 너비가 한 뼘씩인 이 가슴받이 위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 이름을 새긴 열두 가지 보석을 박았다. (8) 대사제는 일반 사제의 머리 쓰개 위에 특별한 건을 또 쓴다. 그리고 그 위에 왕관처럼 생긴 순금 패를 두른다. 이 패 위에는 ‘주님께 성별된 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사제의 신발에 대해서는 사제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규정이 없다. 다만 주님께서 모세에게, “네가 서있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출애 3,5) 하신 말씀에 따라 사제와 대사제들도 성전에서 맨발로 직무를 수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향잡지, 1997년 5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성서의 세계 : 하느님 현존의 자리, 성전 (4) “제가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당신의 좋으신 이름을 찬송하리이다”(시편 54,9)
우리는 세 번에 걸쳐서 예루살렘 성전의 역사와 모습, 그리고 그곳에서 봉직하는 이들과 참배하는 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구체적으로 무슨 의식이 어떻게 거행되었는가? 우리가 사용하는 ‘미사전례서’(미사경본)에는 전례의 주례자나 참석자가 미사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적혀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는 그렇게 상세한 지침이 들어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성서와 더불어 예수님 시대 전후에 쓰인 유다교의 문헌에 따라서 ‘성소의 하루’를 다시 구성해 보기로 한다.
성전의 일과는 날이 샌 직후 전례의 세 구성원, 곧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평신도들은 저마다 제 위치로 가서 자리를 잡으라는 큰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맨 먼저 사제들이 ‘사제의 뜰’에 있는 번제제단으로 가서 재를 치우는 일을 한다. 전날에 바친 짐승의 제물이 밤새 타올랐기 때문에 적지 않은 재가 쌓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그전에 주사위를 던져서 결정된 사제가 한다. 영예로 생각되는 이 작업을 맡으려는 이는 일찍 일어나 성전에 와서, 책임 사제가 오기 전에 목욕재계하고 기다린다. 주사위를 던져 직무를 배당한 다음, 책임 사제가 ‘남자의 뜰’과 ‘사제의 뜰’로 들어서는 문을 열면, 사제들은 횃불을 들고 두 무리로 나뉘어 성전 밖을 한 바퀴 돌면서 이상이 있는지 확인한다.
지명된 사제가 재를 치우는 작업을 시작하면 다른 사제들도 와서 도와준다. 그 사제는 재를 말끔히 치운 다음 새 장작을 제단 위에 쌓는다. 이 일을 마치고 한 자리에 모인 사제들은 다시 주사위를 던져, 일일 번제물의 봉헌, 분향제단에 남은 재의 제거, 등잔대 청소, 그리고 곡식제물과 제주(祭酒)의 봉헌 등 작업을 할당받는다.
이어서 밖을 내다보던 사제가 동녘이 밝아온다고 알리면, 나팔이 울리면서 성전의 대문들이 열리고, 성소 안에 있는 분향제단과 등잔대를 청소하는 사제를 비롯하여 저마다 제자리로 가서 일을 시작한다. 일일 번제물로 바칠 어린 숫양을 잡고, 사제들은 다시 모여 신자들과 함께 십계명을 봉독하고 기도한 다음, 주사위를 던져서 분향제단에 향을 피울 사람, 번제물을 바칠 사람들을 뽑는다. 나머지 사제들은 나가서 사제복을 벗는다.
먼저 성소에서 향을 피우는데, 이 시간에는 성전에서 거행되는 아침 제사에 참석한 이들만이 아니라, 집에 있는 이들도 기도한다(유딧 9,1; 루가 1,10 참조). 분향이 끝나면 사제들은 줄을 지어 성소에 들어가서 경배한 다음, 밖으로 나와 손을 펴들고 공동으로 백성에게 축복한다(민수 6,22-27). 이때 백성은 무릎을 꿇고 얼굴을 숙인다.
축복이 끝나면 아침 전례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짐승제물을 제단의 불타는 장작 위에 갖다 놓고 곡식제물과 제주를 바친다(민수 28,3-8). 제주를 바치기 전에 나팔을 불고, 바치기 시작하면서는 책임 사제의 신호와 함께 레위인들의 합창대가 성가를 부른다.
우리가 드리는 주일의 ‘회중미사’에 해당하는 이 아침 제사가 끝나면, 개인들이 가져온 여러 종류의 제물들을 바치기 시작한다. 제물의 종류에는 우선 감사하는 마음에서 바치는 ‘감사제물’, 어떤 제물을 바치겠다고 정식으로 서원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서원제물’, 어떤 규정이나 전제 없이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 바치는 ‘자원제물’이 있다.
이 제물들을 바칠 때, 짐승의 굳기름은 제단 위에서 불에 태워 하느님께 바치고, 살코기 일부는 사제들이 차지하며, 나머지는 봉헌한 사람과 가족과 친구들과 초대받은 이들이 성전에서 정해진 기일 안에 함께 먹는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제물을 ‘친교제물’이라 한다(레위 7,11-17).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또는 따로 바치는, 고운 곡식가루와 기름과 향으로 이루어진 ‘곡식제물’과 제주(祭酒)가 있다(레위 6,7-16).
개인이 의무적으로 바쳐야 하는 제물들도 있다. 우선 실수나 부정한 상태로 말미암아 짓게 된 죄 때문에 바쳐야 하는 ‘속죄제물’(레위 4,1-5,13),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잘못에 대한 보상으로, 손해를 끼친 짐승이나 물건의 본디 값어치에 오분의 일을 더한 값을 바치는 ‘보상제물’이 있다(레위 5,14-26). 이 밖에도 마리아의 경우처럼(루가 2,22) 아기를 낳고 나서(레위 12,1-8), 악성 피부병을 앓고 나서(레위 14,1-32) 등등. 레위기가 강조하는 정결(淨潔)과 관련된 부정(不淨)을 씻기 위해서 바치는 제물들이 있다.
이렇게 갖가지 개인제물들을 오후 2시 30분까지 바치고 나면, 다시 저녁 제사가 아침 제사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거행되기 시작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장작을 제단에 다시 쌓지 않고 백성에게 축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녁 제사가 끝나면서 제단에는 장작을, 성소의 등잔에는 기름을 더 넣어 밤새 불이 꺼지지 않게 한다. 성전의 하루 일과가 정확히 몇 시에 끝나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지만, 해질녘인 것으로 여겨진다. 대부분의 사제들과 레위인들과 백성이 돌아가고 문들이 닫히면, 북적거리던 성전은 밤의 고요 속으로 빠져든다. 몇몇 사제만 남아서 낮 동안 다 바치지 못한 짐승의 부분들을 제단 위에서 계속 태운다.
안식일의 전례도 평일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거행된다. 다만 평일의 제물 외에 아침저녁으로 각각 숫양 한 마리에 곡식제물과 제주를 곁들여 바친다(민수 28,9-10). 개인제물은 받지 않고,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기 위해서 제사 준비 가운데 일부는 전날 저녁에 해놓는다.
그리고 이날 제사 상에 올린 빵(레위 24,5-9)을 바꾼다. 많은 순례객들이 올라오는 축일에는 지정된 공동제물 외에(레위 23,4-36; 민수 28,11-29,39) 개인들이 청하는 제물도 바친다. 그리고 이때에는 순례객들이 성전을 잘 살펴보고 전례에 잘 참석할 수 있도록, 성전의 개방 시간을 더 늘리는 등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진다. [경향잡지, 1997년 6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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