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회당, 하느님의 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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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15 | 조회수2,585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회당, 하느님의 집 “예수께서는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루가 4,16).
예수님께서는 고향에 들르셨다가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가신다. 이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한 구절을 봉독하시고, 거기에다 그 구절을 설명하는 말씀까지 하신다(루가 4,16-30). 예수님만이 아니라 사도들도 다른 유다인들처럼 열심히 다녔던 회당은 어떤 곳인가? 그리고 아무 직책도 없었던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서를 봉독할 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강론까지 하실 수 있었는가?
회당이 언제, 무슨 계기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지만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적군의 손에 완전히 파괴되고, 많은 유다인이 바빌론 땅으로 유배 간 사건과 관련이 있지 않나 생각된다. 종교생활의 중심이었던 성전이 없어지고, 게다가 이국 땅에 살면서, 유배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종교생활을 계속할 장소가 필요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회당의 설립이라든가 운영 등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는다. 아무튼 성전의 가능 가운데 일부를 수행하기 위해서 세워진 회당은, 기원전 510년대에 제2성전이 건축된 다음에도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가파르나움이나 나자렛처럼 웬만한 동네에는 모두 회당이 있었다. 그리고 유다 땅 밖, 곧 바빌론이나 이집트나 로마와 같이 유다인들이 흩어져 사는 곳곳에도 회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지중해변에 고루 퍼진 이 회당들이,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펼친 활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예수님 때에 웅장한 성전이 우뚝 솟은 예루살렘에도 회당이 여럿 있었다(사도 6,9; 24,12 참조). 예수님께서 어렸을 때, 부모님이 “사흘 만에 그를 찾아냈는데 거기서 예수는 학자들과 한자리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는 중이었다”(루가 2,46). “거기”가 바로 성전 안에 있던 회당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까지 발굴된 옛날의 회당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대지 1,090평에 건평이 257평 가량 된다. 회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모세 오경, 곧 토라가 쓰인 두루마리를 보관하는 궤이다. 성당의 감실과 비슷한 이 궤는 나중에 예루살렘을 향한 벽에 붙박이로 고정된다. 유다인들에게 가장 귀중한 토라를 모신 이 ‘거룩한 벽장’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휘장 같은 것들이 설치되어 그 중요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리고 회당 한가운데에는 대부분의 경우 나무로 만들어진 봉독대가 자리잡는다. ‘거룩한 궤’와 봉독대 외의 설비나 건물 자체는 시대와 장소, 그리고 건축가에 따라 다양해진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회당을 이루는 것은 본질적으로 건물이 아니라 회중이다. 열 명 이상의 어른만 있으면(신명기 1장 15절의 전통에 따르면, 열 사람이 백성의 가장 작은 집단을 뜻하였다.), 또 이들이 대표하는, 말씀을 선포하고 경청하는 회중만 있으면, 어떤 곳에서도 회당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회당의 봉직자로는 우선 회당장이 있다(루가 8,49). 회당을 전체적으로 책임지는 회당장은 전례를 지휘하고, 필요할 때에는 질서를 유지하며, 봉독자와 해설자를 지명한다(루가 13,14; 사도 13,15). 회당장 밑에는 ‘부회당장’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는 전례 때에 회당장을 보좌하면서 봉독자에게 성서 두루마리를 건네주고 또 되돌려 받으며(루가 4,20), 안식일 시작을 알리는 나팔을 분다. 그리고 마땅한 지원자가 없을 경우에는, 회중이 따라 할 수 있도록 큰소리로 기도를 외운다. 회당에서는 법정이 열리기도 하는데, 죄인이 채찍형을 받을 경우, 이 ‘부회당장’이 형벌을 집행한다(마태 10,17). 아마도 형을 집행할 때에 신명기의 한 구절을 읽어야 하기 때문에, 회당에서 이런 일까지 벌어진 것 같다. 그리고 ‘부회당장’의 책임 아래 보관되는 오경 두루마리는 민사소송에서 맹세 같은 것을 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티나와 바빌론의 회당들에서는 성서를 히브리말로 쓰인 대로 봉독하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몰랐다. 그래서 히브리말 성서 봉독에 이어 엄격한 규칙에 따라 아람말로 번역하였다. 큰 회당에는 이 즉석 번역의 전문가도 있었지만, 보통은 학교 선생이 그 일을 하였다.
회당의 안식일 전례는 신명기 6장 4-9절 ; 11장 13-21절 ; 민수기 15장 37-41절로 이루어진 신앙 고백과 열여덟 개의 찬미가로 이루어진 기도로 시작하여, 전례의 중심부분인 오경의 봉독으로 이어진다. 이 오경은 약 155개의 단락으로 나누어서, 안식일마다 하나씩 읽었다. 그래서 3년 주기로 오경의 봉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중에는 1년 주기로 바뀐다. 이 오경의 봉독은 단순한 독서가 아니다. 오경 말씀의 선포로 시나이 계약을 재현시킨다. 이 봉독을 통해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다시 현실화하면서 그것을 갱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에 우리의 ‘말씀 전례’와 비슷한 토라의 봉독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새 계약을 기념하는 ‘성찬 전례’와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고도 할 수 있다.
토라에 이어 예언서의 한 단락이 봉독된다. 예언서 봉독에 관한 규정은 따로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구절이나 마음대로 읽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다음, 회당장은 적당한 이를 골라 대부분의 경우 봉독된 예언서 구절을 설명해 달라고 부탁한다. 특히 합당한 위치에 있는 손님이 참석했을 경우에는, 그에게 청하는 것이 관습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관습에 따라 고향의 회당에서, 당신의 활동을 예고하는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설명하실 수가 있었다(사도 13,14 참조). 성서 해설에 이어서 축복으로 전례는 끝을 맺는다. 물론 이런 차례는 큰 줄기일 뿐이고, 시대와 장소에 따라 회당의 전례 역시 다양하게 거행되었다.
회당은 유다인들의 학교와 직간접으로 관련되고, 때로는 종교 외의 집회장소로도 활용하였다. 그리고 안식일이나 축일처럼 사람이 많이 모일 때에는 시민생활의 책임자들이 공지사항을 알리기도 하였다.
특히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뒤부터, 회당은 유다인들의 민족적, 정신적 기둥이 된다. 성전과 달리 평신도들이 활발히 전례를 거행하는 회당을 중심으로, 유다인들은 자기들의 정체성과 신앙을 굳건히 지켜나가고 있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7년 7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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