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문화] 출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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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15 | 조회수2,970 | 추천수0 | |
성서의 세계 : 출생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당신께서는 저의 하느님”(시편 22,11)
시편 128편은 다음과 같은 말로 주님을 경외하는 이의 행복을 노래한다. “네 집 안방에는 아내가 / 풍성한 포도나무 같고 / 네 밥상 둘레에는 아들들이 / 올리브나무 햇순들 같도다”(3절). 물론 현대인에게는 이것이 축하의 말로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인구가 많지 않던 그 옛날, 목축이나 농경생활을 하던 때에는, 식구가 많음이 생존과 직결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생활과 생존이 일하는 사람들의 손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렸던 때에는, 자연히 남자가 선호되었다. 남아를 선호함은 단순히 가부장적인 사회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성서의 사람들이 살던 환경 및 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특히 아들은 “주님의 선물”로, 젊을 때 얻은 아들들은 “전사(戰士)의 손에 들린 화살들 같다”고 여겼다(시편 127,3-4). 전사에게 화살이 없으면 싸울 수가 없듯이, 아들들이 없으면, 그 집안의 생활력뿐만 아니라 그 씨족의 생존까지 위협을 받게 된다. 그래서 여자의 불임은 치욕과 천벌로 생각되었고, 아기의 출생은 남아든 여아든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하였다. 특히 남자 아기의 출생은 경사로운 일로서 이웃들도 축하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룻 4,14; 예레 20,15; 루가 1,14. 57-58).
이스라엘인들은 수태와 임신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지식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임산부의 뱃속에 든 몸이 어떻게 되는지를 알 수 없다’면서(전도 11,5), 태아의 형성과 성장과정에 신비를 느꼈다. 태아는 결국 하느님께서 직접 만드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녕 당신께서는 … 제 어머니 뱃속에서 저를 엮으셨나이다”(시편 139,13; 욥 10,8).
그러면 구약성서 시대에 출생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출애굽기 1장 16절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너희는 히브리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 밑을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버리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날로 수가 불어나면서 이집트 나라와 국민을 위협하는 이스라엘인들의 번성을 억제하려고 파라오가 내린 조치이다. 여기에서 “밑”은 직역하면 ‘두 돌[石]’인데, 이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다. 아기의 생식기라고도 하고, 해산할 때에 산모가 앉는 의자라고도 한다. 그중 가능성이 큰 설명은, 나란히 놓인 두 돌로서 산모가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아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에는 옆에서 도와주고, 또 산고가 심하면 산모를 위로해 주는 이가 있었다(창세 35,17). 창세기 38장 28절과 출애굽기 1장 15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에도 일찍부터 직업적인 조산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야곱의 부인 라헬은 아기를 낳지 못하자, 자기의 몸종이 남편에게서 ‘아들을 낳아 자기 무릎에 안겨주기를(직역 : 자기 무릎 위에 아기를 낳아주기를)’ 바란다(창세 30,3). 그리고 창세기 50장 23절에는 요셉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태어나 요셉 무릎에 안겼다(직역 : 아들들도 요셉의 무릎 위에 태어났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를 말 그대로 해석하고 시편 22편 11절의 말을 바탕으로(“저는 모태에서부터 당신께 맡겨졌고[직역 : 던져졌고]”), 아기 아버지가 아기를 받아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 시편은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의탁의 고백을, 라헬과 요셉의 경우는 양자로 받아들이는 의식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태어나면서 입양될 경우에 아기가 입양하는 이의 무릎에 안기는 것이다. 예레미야서 20장 15절에 따라, 아기 아버지는 밖에서 기다린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와 관련된 성서의 특징적인 표현은, 어머니만이 아니라 아버지와 관련해서도 ‘낳다’는 표현을 쓴다는 것이다(주세붕의 오륜가 “아버님 날 낳으시고 / 어머님 날 기르시니”도 참조). 창세기 5장을 비롯하여 창세기와 역대기 상권에 자주 나타나는 족보가 다 이 표현을 쓴다. 마태오 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인들도 산고를 여자가 겪어야 하는 가장 큰 고통으로 생각하였다(창세 3,16). 아니, 인간이 당하는 아픔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특히 예언자들은,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을 때의 고통을 산고에 비유한다(이사 13,8; 예레 6,24; 13,21; 49,24 등). 오랫동안 참고 침묵하셨다가 홀연히 나서시는 하느님의 행동을 묘사할 때에도 산고의 외침이 쓰인다(이사 42,14).
아기가 나오면 탯줄을 자르고 물로 깨끗이 씻고 나서 소금으로 문질러준 다음 포대기로 쌌다(에제 16,4). 소금이 아기를 강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보통으로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을 먹이지만(창세 21,7; 1사무 1,21-24; 1열왕 3,21), 특히 부유한 집안이나 왕실에서는 유모가 젖을 먹이고 키우기도 하였으며, 여아일 경우에는 시집갈 때에 따라 가기도 하였다(창세 24,59; 35,8; 출애 2,7; 민수 11,12; 2사무 4,4; 2열왕 11,2). 아기는 보통 만 세 살까지 젖을 먹은 것으로 여겨진다(2마카 7,27). 이사악이 젖을 떼는 날에 아브라함이 큰 잔치를 베푸는데(창세 21,8), 이것이 관습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산에 이어서 아기의 이름을 지어준다. 아버지가 작명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창세 16,15; 출애 2,22). 일반적으로는 어머니가 하였다(창세 29,31; 30,24; 35,18; 1사무 1,20). 산모는 아기를 낳고 나셔 엄격한 정결례(淨潔禮)를 치러야 한다. 일정 기간 집 안에서만 지낸 다음, 성전에 제물을 바쳐서 사제들이 일정한 의식을 거행해야 부정(不淨)을 벗게 된다. 그렇다고 해산함으로써 무슨 죄를 짓는다는 말은 아니다. 아기를 낳을 때에는 피를 많이 흘리게 된다. 그런데 성서의 옛 사람들은 피를 생명의 자리로 여겼기 때문에, 피에 대해서 항상 어떤 신비감과 함께 불안감을 느꼈다. 그래서 피를 흘린다거나 그것에 몸이 닿은 사람은 부정하게 되어서, 거룩한 종교의식에 참석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인들이 생일을 특별히 지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성서에는 외국인 파라오와(창세 40,20) 이방인 헤로데의 생일잔치만 언급된다(마태 14,6). 아울러서 생일을 저주하는 것이 두 번 나온다(욥 3,3; 예레 20,14). 그러면서도 예레미야서와 욥기의 저자를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인은, 하느님께서 친히 자기들을 ‘모태에서 오묘하게 지으셨음’을(시편 139,14; 욥 10,8), 자기들이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그분께 온전히 맡겨진 존재임을 잘 알고, 그러한 하느님을 찬양하며 살았다(시편 22,10-11; 71,6; 139,14).
[경향잡지, 1997년 10월호, 임승필 요셉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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