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루카 4,1-1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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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16 | 조회수4,021 | 추천수0 | |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예수님(루가 4,1-13)
예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뒤, 성령의 힘으로 광야로 보내져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온다. 마르코 복음 저자는 그것을 짧게 두 절로 처리하지만, 마태오와 루가는 다른 자료를 이용하여 꽤 길게 다룬다. 유혹 이야기는 예수님의 소명을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대목으로서, 실제로 세 공관복음 공히 바로 다음에 그분 소명의 본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첫 설교를 소개한다(마태 4,17; 마르 1,15; 루가 4,18-19). 따라서 공관복음 저자들이 예수님의 소명 이야기를 따로 다루지 않고, 대신 세례와 유혹과 첫 설교를 하나의 소명 과정처럼 제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4. 1 예수께서는 요르단강에서 성령을 가득히 받고 돌아오신 뒤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가셔서 2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 동안 아무것도 잡수시지 않아서 사십 일이 지났을 때에는 몹시 허기지셨다. 3 그때에 악마가 예수께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보시오.” 하고 꾀었다 4 예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5 그러자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잠깐 사이에 세상의 모든 왕국을 보여주며 6 다시 말하였다.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것은 내가 받은 것이니 누구에게나 내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소. 7 만일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하면 모두가 당신의 것이 될 것이오.” 8 예수께서는 악마에게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 그분만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9 다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 10 성서에 ‘하느님이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너를 지켜 주시리라.’ 하였고 11 또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손으로 너를 받들게 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2 예수께서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는 말씀이 성서에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13 악마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유혹해 본 끝에 다음 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공동번역).
루가는 예수님과 교회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을 다른 복음서 저자들보다 더 강조한다. 예수님의 소명과 관련해서도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그분 위에 내려오시고(3,22), 유혹을 받으신 뒤에도 성령의 능력을 가득히 받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셨으며(4,14), 공생활 중에도 성령께서 그분에게 내리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4,18). 세례 때에 가득히 내린 성령의 인도로 예수께서는 광야로 가셨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내보내셨다.”(마르 1,12)로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이 ‘내보내셨다’로 옮긴 그리스말의 원 뜻은 ‘내던지셨다’이다. 아버지께서 성령을 시켜 예수님을 인간이 살 수 없는 불모의 땅으로 내던지신 이유는 인류 구원이라는 엄청난 소명 앞에서 아들 예수의 마음과 정신을 단단히 준비시키시기 위한 것이 아닐까? 실제로 그리스말 ‘유혹’은 ‘단련, 시험’이라는 뜻도 포함한다.
예수께서 당하신 유혹은 세 가지인데, 마태오 복음과 루가 복음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유혹의 순서가 다르다. 어느 순서가 본디 순서인지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두 복음서 저자의 의도는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마태오는 산에 특별한 의도를 두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주로 산 위에서 이루어지고(산상설교), 부활하신 예수께서 아버지 하느님에게서 받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 것도 산 위에서였다(마태 28,16-20). 반면에 루가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부각시킨다. 예수님의 길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에서 완성되고(루가복음), 교회의 길은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로마로 이어진다(사도행전). 그래서 마태오는 마지막 유혹 장소를 산으로, 루가는 성전으로 정한 것이다.
악마가 제시한 유혹의 내용은 무엇일까? 돌을 빵으로 만들어보라는 첫 번째 유혹은 식욕에 관한 유혹이다. 식욕을 넓게 해석하면 육체의 온갖 욕망이라 할 수 있겠다. 자기에게 절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는 악마의 두 번째 유혹은 권력욕과 관련된 유혹이다. 권력은 남을 지배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인즉, 권력욕을 지배욕이라 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 천사들을 보내어 다치지 않도록 존귀한 당신 아들을 보호해 줄 것이니 뛰어내려 보라는 세 번째 유혹은 자기 과시욕에 관한 유혹이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과 이름을 후대에 남기려는 명예욕과도 통한다.
이상의 고찰은 유혹의 내용 그 자체만을 고려한 단편적인 반성에 불과하다. 예수님의 응답에 인용된 신명기 말씀을 살펴보면 더 깊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끝낼 즈음에 그들에게 행한 모세의 고별 설교이다. 40년 광야 체험은 이스라엘이 주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기 전에 치러야 할 하나의 시험으로 볼 수 있는데,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당하신 것도 하느님의 아들로서 그분의 뜻을 세상에 펼쳐나가기 전에 치러야 할 시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험에 실패했지만, 예수께서는 시험을 훌륭히 통과하신 것이다.
첫 번째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신명 8,3에서 따온 말씀인데, 전체를 히브리말 본문에 가깝게 옮기면 이렇다. “그분께서는 너를 낮추시고 굶주리게 하신 다음, 너도 모르고 너의 조상들도 몰랐던 만나를 네가 먹게 해주셨다. 그것은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못하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네가 알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역하여 그분의 분노를 일으켰다(신명 9,7-24).
두 번째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예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신명 6,13에서 따온 말씀이다. 이 말씀은 본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와 종교 혼합주의를 단호히 배척하고 하느님과의 고유한 계약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과 연관되어 나온다(6,14). 그러나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 명령을 지키지 않고 이방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주 하느님을 저버리고 온갖 우상숭배에 빠져들었다(판관 3,5-7).
세 번째 유혹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시오.”라는 말로 시작된다. 이스라엘 백성도 하느님의 아들로 불렸다(탈출 4,22; 호세 11,1). 세 번째 유혹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마라.”는 신명 6,16에서 따온 말씀이다. 광야는 이스라엘에게 시험과 시련의 장소였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이스라엘은 에집트나 광야에서 살던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유혹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며 그분을 섬기느냐 아니면 그분의 계명을 저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져드느냐, 신명기에서는 이를 ‘삶의 길’과 ‘죽음의 길’로 표현한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 광야에서 끊임없이 후자를 택함으로써 시험에 실패하였다. 더 나아가 에집트 고기 냄비를 그리워하며 과거의 안락함으로 돌아가거나 더 안전한 미래를 보장받으려고 하느님을 끊임없이 시험하였다(민수 11,1-3; 14,1-3; 사도 7,39-41). 그러나 광야에서 시험을 받아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 자신들이지(신명 8,2) 결코 하느님이 아니시다. 그들은 하느님을 신뢰하면서 그분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는 고사하고, 자신들의 편익을 위하여 그분을 조종하고 이용하려 들었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시험에서 실패한 것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악마의 유혹을 이겨내시되, 매번 그분은 성서 말씀으로 대처하셨다. 이는 단순한 성서 지식 안에 악마를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뜻인가? 물론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서에 관한 지식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서의 말씀으로 두 번씩이나 참패한 악마도 세 번째 유혹에서 예수님처럼 성서를 이용하였으니, 그 역시 성서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려면 성서를 아는 것만으로 족하지 않고, 성서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신 세 차례 응답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사랑받는 아들,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시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히셨다.
세례 때에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의 신분을 분명히 증언해 주시더니, 유혹 장면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심으로써 이 증언에 응답하셨다. 예수님의 순종 의지는 아버지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더불어 그분의 공생활 내내 지속되었으며, 특히 그분의 수난과 죽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루가 22,42; 23,46).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순종과 믿음으로 악마의 유혹을 물리치신 예수께서는 이제부터 공생활 전체에 걸쳐 악마 또는 온갖 죄악의 세력에서 사람들을 자유롭게 풀어주실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나자렛 예수님의 소명이다.
[경향잡지, 1998년 4월호, 정태현 갈리스토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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