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제2 이사야: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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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21 | 조회수4,204 | 추천수1 | |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 그는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네 개로 구성된 ‘야훼의 종’의 노래(이사 42,1-9; 49,1-7; 50,4-11; 52,13-53,12)는 제2이사야서(40-55장)의 주된 내용이자, 이사야서 전체의 백미이다. 그런데 이 노래에 나오는 ‘야훼의 종’이 누구인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그를 특정 개인으로 보는 이들은 모세와 같은 예언자나 고레스 대왕 같은 임금, 또는 제2이사야 자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와 반면 그를 집단으로 보는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나 주님의 계명과 유다교 전통에 충실한 소수의 남은 자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후대에 와서 이 ‘야훼의 종’을 다니엘서(11,33-12,10)에서는 안티오키아의 박해 때에 유다 종교와 전통을 충실하게 지키려 한 유다인들로 이해하고, 신약성서 저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였다.
어떻게 이런 해석들이 가능한가? 우리는 제2이사야서의 관련 대목들에서 저자가 ‘야훼의 종’이 맡은 역할을 어떻게 소개하는지 살펴봄으로써 그 대답을 찾아보자. 먼저 둘째 노래에서 그가 받은 소명을 규명하고, 나머지 세 노래에서 그 소명의 구체적 내용을 밝히기로 한다.
(구약성서 새번역) 1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 5 이제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그분께서는 야곱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고 이스라엘이 당신께 모여들게 하시려고 나를 모태에서부터 당신 종으로 빚어 만드신 분이시니 내가 주님의 눈에 소중하게 여겨졌고 나의 하느님께서 나의 힘이 되어주셨기 때문이다. 6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다시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생존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미치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
제2이사야서가 쓰여진 것은 바빌론 유배 동안(기원전 586-539년)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약속인 가나안 땅도, 나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왕정 제도도, 주님의 처소인 예루살렘과 성전도 다 빼앗기고 망연자실하였다. 민족 전체를 구성하고 보호해 줄 제도적 기반인, 땅과 임금과 성전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빼앗긴 나라의 주권을 회복하고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를 일으켜줄 왕족, 귀족, 사제, 학자(서기관), 심지어 장인(匠人)들마저 적국의 수도 바빌론으로 끌려간 상태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야훼의 종’은 소명을 받는다. 바빌론에서 유배살이하는 유다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명은 유배자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뭇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느님의 구원을 땅 끝까지 미치게 하는(49,6) 일까지도 포함한다.
하느님은 이 임무를 맡은 ‘야훼의 종’을 모태에서부터 손수 빚어 만드시고 소중하게 여기셨으며, 그의 힘이 되어주셨다(49,5). 그래서 그는 섬들과 먼 나라 민족들에게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49,1) 하고 외친다. 소명을 받은 이에 대한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는 모세의 소명 대목(출애 3-4장)과 이 소명 대목을 본떠 만든 예레미야의 소명 대목(예레 1,4-10)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예레미야를 ‘모세와 같은 예언자’로 불렀듯이 ‘야훼의 종’도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야훼의 종’이 받은 소명과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는 첫째 노래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그는 온화한 성격을 지녔지만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맡은 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그는 지지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42,2-4). 공정을 세우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뭇 민족들의 빛이 되어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주는” 것이다(42,7). 이처럼 공정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야훼의 종’은 하느님께 특별한 보호와 선택과 사랑을 받는다.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42,1).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은 셋째 노래에서 더욱 극적으로 그려진다. “나는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50,6-7).
이처럼 공정을 세우는 일에 충실하고 주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야훼의 종’이건만 그에게 엄청난 시련과 고통이 닥친다. 그러나 온화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이 모든 시련과 고통을 묵묵히 견뎌낸다. 넷째 노래는 이렇게 그 모습을 전한다. “그는 주님 앞에서 새순처럼, 메마른 땅의 뿌리처럼 자라났다. 그에게는 우리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었으며 우리가 바랄 만한 모습도 없었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 남들이 그를 보고 얼굴을 가릴 만큼 그는 멸시만 받았으며 우리도 그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53,2-3).
그가 이처럼 고통을 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넷째 노래의 저자는 구약성서의 어떤 대목에도 알려지지 않은 ‘대속적 고통’의 주제를 끌어들인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그런데 우리는 그를 벌받은 자, 하느님께 매맞은 자, 천대받은 자로 여겼다.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위한 징벌이 그에게 내려졌고 그의 상처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다. 우리는 모두 양떼처럼 길을 잃고 저마다 제 길을 따라갔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이 그에게 떨어지게 하셨다”(53,4-6). 여기서 말하는 죄악은 바빌론 유배의 원인이 되었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우상숭배와 온갖 불의를 말한다. 그런데 히브리말에서 ‘죄’는 죄지은 행위뿐 아니라, 그 불행한 결과까지도 포함한다. 따라서 ‘야훼의 종’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죄악뿐 아니라, 그 결과로 그들이 당하는 온갖 불행과 재난도 함께 지고 가는 것이다.
그러면 그가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대신 지고 감으로써 이스라엘은 어떤 혜택을 입게 되는가? 유배자들은 조상이 지은 죄의 결과를 당연히 짊어져야 했다. 그러나 ‘야훼의 종’이 죄의 결과인 고난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묵묵히 받아들임으로써(53,7) 백성에게 제2의 출애굽을 열어주었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의 고레스 대왕이 바빌론에 끌려온 유다의 유배자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선포한 해방령이 바로 제2의 출애굽이었다. 여기서 주님께 사랑받는 ‘야훼의 종’이 왜 그다지도 참혹한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밝혀진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더 나아가 죄악의 불행한 결과에 짓눌린 자들을 구원하려고 당신의 사랑하는 종을 으스러뜨리고 병고에 시달리게 하신 것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야훼의 종’의 운명은 역전된다. “보라, 나의 종은 성공을 거두리라. 그는 높이 올라 숭고해지고 더없이 존귀해지리라”(52,13).
‘야훼의 종’의 노래는 신약성서에 그다지 자주 인용되지는 않지만(요한 12,38; 사도 8,32-33; 로마 10,16: 1베드 2,21-25)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밝히는 데 깊은 영향을 미쳤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의 바탕으로 삼은 신약성서 저자들이, 우리 죄 때문에 수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셨다가 우리를 위하여 부활하신 그분의 운명을 ‘야훼의 종’과 비교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위에 인용한 구절들만으로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쉽게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야훼의 종’이 이사야서의 문맥에서 누구를 가리키든, 이 유명한 노래의 저자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몇 세기 뒤에 나타날 위대한 인물을 두고 정확한 예언을 한 셈이다.
[경향잡지, 1999년 2월호, 정태현 갈리스도 신부(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총무 / 사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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