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22: 예루살렘 점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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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8-01 | 조회수4,614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22) 예루살렘 점령 민족의 영웅, 유일신 신앙의 수호자
- 예루살렘은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유대 민족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인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점령하지 못한 땅이었다. 하지만 강력한 국가를 세우기 위해 다윗은 예루살렘을 점령해내고 만다. 사진은 현대 예루살렘 도심 전경.
학자들은 오늘날의 이스라엘, 즉 유대 민족이 수천 년 동안 강대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현실적 이유를 두고,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나의 판단으로는 단언하건데 가장 유력한 이유, 가장 깊은 뿌리는 바로 ‘다윗’에 있다.
유대 민족이 만약 국가를 만들지 않고 단순한 종교 연합 공동체 형태를 유지했다면 오래지 않아 그 공동체는 주변 강대국들에 의해 해체되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유일신 하느님도 다른 민족들의 수많은 그저 그런 신들 중 하나로 전락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일신 하느님은 유대 민족의 해체를 원하지 않으셨던 듯하다. 다윗을 보내셨기 때문이다. 우선은 뿌리가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했다. 아직 유일신 신앙은 뿌리가 약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 입장에서 다윗은 유대교의 영웅일 뿐 아니라 하느님 유일신 신앙의 수호자이기도 하다. 다윗이 있었기에 통일 왕국이 가능했고, 일체감과 소속감, 민족의식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실제로 다윗은 당시까지만 해도 근동지방에서 별로 주목 받지 못했던 하느님 백성, 유대 민족을 단숨에 ‘잘 나가는 민족’으로 바꿔 놓는다. 고대에는 드물게 유일신 신앙을 가진 민족이 신흥 강국으로 급부상한 것이다. 이제 그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자.
가나안 남부에서 세력을 쌓던 다윗은 가나안 북부의 사울 왕조가 무너진 후, 이스라엘 지파들의 원로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된다. 지파 별로 갈려 반목하고 경쟁하던 유대 민족이 다윗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임금님의 골육입니다. 전에 사울이 우리의 임금이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출전하신 이는 (다윗)임금님이셨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는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될 것이다’하고 (다윗)임금님께 말씀하셨습니다.”(2사무 5,1-2)
이때가 기원전 1000년경이다. 모든 이스라엘 지파들로부터 인정받은 왕, 다윗은 이제 뭔가 보여주어야 했다. 그 첫 번째 행동이 바로 예루살렘 점령이다(2사무 5,6-12 1역대 11,4-9 참조).
예루살렘 점령만큼 유대 민족에게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사건도 드물다. 그래서 이 부분은 좀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은 가나안 내륙의 남과 북을 이어주는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 한반도의 개성 혹은 서울과 비슷한 지역에 위치한 도시다. 이처럼 예루살렘은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발을 들인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점령하지 못한 땅이었다. 남북을 잇는 연결 고리가 끊어졌기에 남북의 유대 민족은 거리가 자연히 멀어졌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 주요 거점을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유대 민족이 남과 북의 별개의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두 그룹은 훗날 북쪽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의 유다 왕국으로 갈라지는 씨앗이 된다.
그만큼 예루살렘성은 난공불락의 성이었다. 전설의 장수 여호수아도, 쟁쟁한 판관들도 정복하지 못했던 땅이다. 그만큼 예루살렘 성에 거주하는 여부스족은 자부심이 컸다. 여부스족이 다윗에게 “너는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눈먼 이들과 다리 저는 이들도 너쯤은 물리칠 수 있다”(2사무 5,6)고 큰소리 친 것은 단순히 호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다윗은 예루살렘 없이는 통일 유대 왕국 또한 없다고 생각한 듯 보인다. 예루살렘 점령은 정치 종교적 수도의 확립을 의미한다. 이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였으며, 다윗은 이를 통해 분열된 남과 북의 두 그룹을 하나로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윗은 지파들의 도움 없이 자신이 개인적으로 지휘하던 군대만 동원, 예루살렘 정복에 나선다(2사무 5,6 참조). 다윗은 예루살렘 정복은 유대 민족 지파 연합군의 승리가 아닌 자신의 개인 공적으로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목소리에 힘이 더 실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도 예루살렘성은 영어로 ‘다윗성’으로 불린다.
예루살렘 공략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수로(水路)를 통한 다윗의 기습 공격에 무너졌다(1역대 11,4-9). 그 선봉에는 요압장군이 있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비로소 유대인들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다.
지난 6월 예루살렘에서는 기념비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이뤄졌다. 예루살렘성의 수로가 론 베리(Ron Beeri) 박사팀에 의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로써 예루살렘에 어떻게 물이 공급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됐다. 이번에 발굴된 수로는 6~7세기와 16세기 초에 지어진 것이지만,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의 수로에 바탕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었다. 성경 말씀대로 예루살렘에는 수로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예루살렘 정복 후 다윗은 명실상부한 유대민족의 왕으로 우뚝 선다. 그가 도읍으로 정한 예루살렘은 유대 민족이 도약을 이루는 땅이었다. 하느님의 궤도 예루살렘으로 옮겼다(2사무 6,1-23 참조).
하지만 출발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반발도 심했다. 한 베냐민 지파 출신의 말에서 다윗이 처한 당시 분위기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다윗에게서 얻을 몫도 없고, 이사이의 아들에게서 물려받을 유산도 없다. 그러니 이스라엘아, 저마다 제집으로 돌아가라.”(2사무 20,1)
다행히 반란은 진압됐지만 그 통치가 편안할 리 없었다. 후궁들로 인한 폐해도 컸다. 외적으로부터의 위협도 완전히 사라졌다고 볼 수 없었다.
다윗이 해야 할 일은 아직도 많았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12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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