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23: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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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8-02 | 조회수4,979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23)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나 꿈꾸던 신앙 왕국을 이루다
-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왕정제도 자체가 종교적 의무를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림은 파도바 시립박물관에 전시된 지암바티스타 젤로티(1526~1578)의 작품. 다윗이 사울 왕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제 다 이뤘다.” 다윗 왕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하다. 평생소원을 이룬 모습이다.
오늘은 그동안의 숱한 우여곡절을 딛고 ‘계약 궤’를 드디어 예루살렘의 성막으로 옮겨 안치한 날이다. 다윗은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런 다윗의 모습을 사무엘 하권은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2사무 6,14), 역대기 상권은 “껑충껑충 뛰며 춤추었다”(1역대 15,29)고 표현하고 있다. 다윗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모든 군중에게 빵 과자 하나와 대추야자 과자 하나, 그리고 건포도 과자 한 뭉치씩을 나누어 주었다”(2사무 6,19).
무엇이 다윗을 이토록 들뜨게 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선 우선 ‘계약 궤’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아직도 많은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계약 궤가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여기서 궤(櫃)는 ‘물건을 넣도록 나무로 네모나게 만든 그릇’을 의미한다. 그냥 ‘상자’라고 해도 될 텐데 굳이 ‘궤’라고 부르는 것은 하느님과 관련된 것인 만큼 좀 더 품위 있게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사실 ‘계약 상자’혹은 ‘계약 그릇’보다는 ‘계약 궤’라고 쓰는 것이 왠지 품위가 있어 보인다. 어쨌든 이번 기회에 ‘계약 궤’에 대해 확실히 알고 넘어가자.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에서 집단 탈출에 성공한 것이 기원전 1250년경이다. 하느님은 이후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유대민족에게 십계명을 새긴 돌판을 내린다. 모세는 그 십계명 돌판을 넣은 궤를 ‘주님의 궤’혹은 ‘계약 궤’라고 불렀다. 이후 유대민족은 자신들이 이동할 때마다 이 계약 궤 및 계약 궤를 보관한 성막(성스러운 천막)을 함께 모시고 다녔다. 계약 궤는 이처럼 유대 민족과 늘 함께했다. 계약 궤는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의 존재 그 자체며, 민족의 결속을 가능케 하는 끈이었다. 동시에 계약 궤는 유대민족 정통 신앙을 상징한다.
인간이기에 나약했던 다윗은 남의 아내와 재물을 탐내는 등 많은 실수도 저질렀지만(2사무 11,1-27 12,1-12 참조), 동시에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탁월한 왕이기도 했다. 그는 유대민족이 하느님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참으로 종교적 인물이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전략적 종교적 정치적 요충지인 예루살렘을 손에 넣자마자,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계약 궤의 예루살렘 안치는 예루살렘이 명실상부한 유대민족의 정치 종교적 수도가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다윗의 업적 중에는 군사적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로선 가장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필리스티아를 제압, 가나안 남서부의 길고 좁은 해안지역에 가두어 버렸다. 여담이지만, 이스라엘은 고대 필리스티아인들을 몰아넣었던 그 땅에 오늘날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가두어 두고 있다. 다윗은 이 밖에 암몬, 모압, 시리아족, 에돔족, 아람 등과 싸워 승승장구 했다(2사무 8,1-14). 참으로 “주님께서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도와주셨다”(2사무 8,1410). 소국이었던 이스라엘은 다윗 때문에 대국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다윗에게서 단지 ‘힘’을 읽는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전성기의 왕이다. 단지 ‘힘’이 세다고 해서 전성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말씀을 가장 정확히 이해했다. 그는 왕정제도 자체가 종교적 의무를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에게 있어서 ‘왕’은 유대민족이 신앙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도록 하는 도구적인 인물에 불과했다.
계약 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온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다윗은 단순히 이스라엘 왕국의 창건자가 아니었다. 그가 꿈꾸는 것은 신앙 왕국이었다. 그에게 왕관이 필요했던 것은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로마는 우락부락한 인상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 전쟁을 통해 기틀이 다져졌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단순한 전사가 아니었다. 지금도 읽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다윗도 마찬가지다. 카이사르가 그랬던 것처럼 다윗은 전사였던 동시에 음악, 저술, 춤 등을 이용하여 종교적 행위에 참여한 감성적 스타일의 남자였다. 다윗이 음악가이자 시인이며 「시편」의 저자라는 전승은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부인되기 힘들다.
다윗은 왕국의 존속이 하느님 신앙을 수호하는데 있다고 믿었다. 다윗은 자신의 이러한 신념이 후계자 솔로몬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훗날 솔로몬에게 이런 유언을 남기고 하느님 품에 안긴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2열왕 2,2-3)
다윗의 유언은 다윗의 삶, 그 자체였다.
[가톨릭신문, 2009년 7월 26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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