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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26: 왕국의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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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8-22 조회수9,25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26) 왕국의 분열


남북으로 갈라진 유대인의 꿈

 

 

북쪽 10개 지파가 르하브암에게서 등을 돌려 독자적인 왕조를 출범시킨다. 이후 북쪽 왕국은 ‘이스라엘’로, 다윗 왕조를 계승하는 르하브암의 남쪽 왕국은 ‘유다’로 불린다.

 

 

삼국지를 읽다보면 적어도 세 번은 책을 던졌다가 다시 집어 든다고 한다. 첫 번째는 관우가 죽을 때요, 두 번째는 유비가 죽을 때고, 마지막은 제갈공명이 죽을 때라고 한다. 성경도 읽다보면 던질 정도는 아니지만 마음이 아련해져서 큰 한숨을 내쉬게 하는 부분이 몇 곳 있다.

 

그 중 한 장면이 바로 솔로몬의 죽음이다. 솔로몬 자체에 대한 애상 때문이 아니다. 솔로몬 사후, 통일 왕국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앞으로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 분열은 훗날 강대국들에 의해 유대민족이 나라를 잃고 뿔뿔이 흩어져 유랑하는 단초가 된다. 하느님만 따르며 하느님 왕국을 꿈꾸었던 유대인들이 더 이상 하느님을 모실 터전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남북으로 갈라져 반목하고 있는 우리들의 현실도 기원전 924년 유대민족의 남북 분열을 한층 안타깝게 보게 하는 이유다.

 

우리가 늘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분열은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반목이 쌓이고 쌓이면 그 결과가 분열로 이어진다. 왕국의 분열도 솔로몬이 생존해 있을 당시부터 그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솔로몬의 신하 중에 예로보암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예로보암은 왕궁을 건설하는 등 대형 토목공사를 담당하던 감독자였다. 그런 그가 솔로몬의 학정으로 힘들어하던 백성들을 대변하며 솔로몬 왕권에 도전한다. 하지만 이 도전은 실패했고 예로보암은 이집트로 피신했다(1열왕 11,26-40 참조).

 

반란이 시도되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지혜의 왕 솔로몬의 명성과 권위는 타격 받았다. 하이에나는 사자가 지칠 때를 기다렸다가 집단으로 공격한다. 아무리 힘센 사자라도 하이에나들의 집단 공격에는 당해낼 수 없다. 그동안 솔로몬 왕국의 위세에 눌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주변 소수 부족들도 솔로몬 왕국이 지친 기색을 보이자 자주 도발을 감행한다(1열왕 11,14-25 참조). 민족의 결속이 견고하다면 이런 소수 부족들의 공격도 쉽게 막아낼 수 있다. 하지만 사정은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백성들은 강제 노역에 동원됐고, 세금은 갈수록 무거워졌다.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 12지파 지도자들의 마음도 서서히 솔로몬을 떠나기 시작했다. 솔로몬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행정구역을 인위적으로 12개로 나눔으로써,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이스라엘 12지파의 독자적 권위를 부정한바 있다(1열왕 4,7-19 참조).

 

하지만 아직도 솔로몬이 눈 시퍼렇게 뜨고 호령하는 시점이었다. 솔로몬이 누구인가. 왕국을 동방의 선진 교역국으로, 명실상부한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패권국으로 올려놓은 장본인이 아닌가. 솔로몬의 권위가 워낙 컸던 탓에 솔로몬 생존 시에는 결정적 위기가 찾아오지 않았다. 문제는 솔로몬의 사후였다.

 

솔로몬이 죽자 백성들은 그동안 참고 있었던 욕구들을 한꺼번에 분출해내기 시작한다. 솔로몬의 왕위를 이은 솔로몬의 아들 르하브암에게 세금 및 부역 경감을 요청한 것이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멍에를 힘겹게 하셨습니다. 이제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지우신 힘겨운 일과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1열왕 12,4)

 

하지만 솔로몬의 아들은 아버지가 넘겨준 나라를 통치하기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원로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젊은 신하들이 제시한 강경노선을 선택한다.

 

“내 아버지께서 그대들의 멍에를 무겁게 하셨는데, 나는 그대들의 멍에를 더 무겁게 하겠소. 내 아버지께서는 그대들을 가죽 채찍으로 징벌하셨지만, 나는 갈고리 채찍으로 할 것이오.”(1열왕 12,14)

 

이런 어처구니없는 오판 하나가 통일 왕국을 파괴하고 말았다. 강경노선을 선택하려면 그만큼 군사력이 강했어야 했다. 무력은 잠시나마 불만을 잠재울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르하브암에게는 그런 힘조차 없었다.

 

가만히 있을 백성들이 아니다. 북쪽 10개 지파가 르하브암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리고 독자적인 왕조를 출범시킨다. 우리는 이 왕국을 ‘북 이스라엘’로, 다윗 왕조를 계승하는 르하브암의 남쪽 왕국을 ‘남 유다’라고 부른다. 남 유다에는 유다와 벤야민 2개 지파만이 남게 된 것이다. 북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솔로몬 왕이 살아있던 당시 반란을 꾀하다 이집트로 피난했던 예로보암이었다.

 

남 유다의 르하브암은 처음에는 북 이스라엘의 독립을 용납하지 않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르하브암은 온 유다 집안과 벤야민 지파에 동원령을 내려 정병 십팔만을 모았다. 이스라엘 집안과 싸워 왕권을 되찾으려는 것이었다.”(1열왕 12,21)

 

하지만 당시 가나안 북쪽은 남쪽 보다 경제력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었다. 당연히 인구도 더 많았다. 남 유다의 군사력으로는 북 이스라엘을 물리적으로 제압하기 힘들었다. 북 이스라엘도 정통성을 지닌 다윗 왕조를 힘으로 멸망시킬 의도가 없었다. 자연히 분단은 고착화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 아쉬운 점은 왕국이 분열된 시점이다. 당시는 아시리아와 이집트 등 강대국들이 부흥을 꿈꾸며 가나안으로 눈을 막 돌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유대 민족은 힘을 모아야 할 시기에 둘로 갈라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되돌릴 수 없었다.

 

남서쪽의 호랑이(이집트 22왕조 파라오 시삭)와 북동쪽의 사자(아시리아 왕 아슈르 단 2세)가 거의 동시에 먹이 냄새를 맡았다.

 

[가톨릭신문, 2009년 8월 23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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