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31: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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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10-07 | 조회수6,576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31) 잿더미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 절망 속에서 더욱 깊어진 유일신 신앙
-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치드키야 왕. 스페인 성서에 그려져 있는 세밀화. 1400~1425년경, 마드리드, 에스코리알.
가을이다. 푸를 ‘청’(靑)보다는 짙푸르다는 의미가 강한 ‘창’(蒼)으로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하늘이 높고 맑다. 하지만 기원전 586년 가나안의 가을 하늘은 아마도 흑빛이었을 것이다. 비록 하늘이 높고 맑았다고 해도 그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는 하늘이 암흑으로 보였을 것이다.
대재앙이었다. 바빌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폐허가 됐다. 약탈과 방화 속에서 여자들은 땅을 치며 울부짖었고, 영문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런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함께 울었다. 예루살렘의 모든 보물은 약탈당했으며, 반항하는 모든 사람은 모두 학살됐다. 주님의 집과 왕궁을 비롯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큰 집들이 불타 없어졌다. 예루살렘 성벽도 허물어졌다. 예루살렘은 죽음의 도시가 됐다(2열왕 25,8-10 참조). 그리고 살아남은 이들 중 대부분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2열왕 25,21). 역사상 이렇게 철저히 한 민족의 수도가 유린당하고 민족 전체가 이산(離散)되는 일은 고대 말기와 중세 초기 유럽 혼란기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힘들다.
바빌론을 욕할 일이 아니다. 바빌론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유대민족은 유난했다. 다르게 대접할 필요가 있었다. 보통 한 민족이 정복당하면 대개 정복 문화의 높은 문명에 안주하고 흡수된다. 다른 민족들은 생명과 안보만 책임져 준다면 언제든지 바빌론에 협력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달랐다. 수없이 회유하고 달래보았지만 유대인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정신 차렸겠지’라고 생각할 때마다 유대인들은 다시 일어나 저항했다. 이는 바빌론 유배가 한번이 아닌 수차례에 걸쳐 진행된 이유이기도 하다. 바빌론으로선 어쩔 수 없이 유대인들을 흩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민족을 한곳에 살게 놔뒀다간 언제 또다시 골머리를 앓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비탄에 잠겼다(시편 137,1-4 하까 2,3 즈카 1,12). 바빌론의 신(神) 마르두크 신전은 웅장했다. 예루살렘에서 보았던 하느님의 집은 마르두크 신전에 비하면 초가집에 불과했다. 유대인들은 고민하기 시작한다. 예루살렘의 하느님은 바빌론의 신보다 힘이 약한 것일까. 왜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신 것일까. 당신의 신전이 무너지는 것을 왜 지켜만 본 것일까. 하느님은 과연 신들 중의 최고의 신인가. 왜 우리를 버린 것일까. 바빌론 민족이 선택받은 것인가 우리 민족이 선택받은 것인가. 우리의 하느님은 여전히 건재하신가. 잃어버린 하느님은 어디에서 다시 찾아야 하는가.
이러한 고민 속에서 놀라운 영적 비약이 이뤄진다. 바빌론 유배 이전까지 유대인들이 생각해온 하느님은 유일하신 하느님이기보다는 모든 신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신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세계에는 수많은 신이 있는데 그 신들 중 하느님이 으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즈음하여 하느님 이 외의 모든 다른 신들이 부정된다.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예언도 이 시기에 집중된다. “나는 처음이며 나는 마지막이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없다.”(이사 44,6)
유대인들에게 하느님은 모든 만물의 근원이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인식이 비로소 자리하게 된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했으며, 역사를 완성한다. 이스라엘은 그의 계획의 일부이며 그 계획은 바빌론 유배라는 고통 속에서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아시리아와 바빌론이 침공한 것도 모두 하느님의 뜻이다. 바빌론으로 끌려온 것도, 바빌론 땅에서 우리가 울부짖는 것도 모두 하느님 섭리의 과정이다.
- 유대 민족이 지금껏 광야에서 터득한 투박한 하느님 신앙은 바빌론 유배라는 사건을 통해 세련된 세계적 지평을 지닌 고등 신앙으로 도약하게 된다. 그림은 포로로 끌려가는 남 유다 왕국 사람들을 묘사한 에두아르트 벤데만의 작품. 1865년, 뒤셀도르프, 예술박물관.
유대인들은 이마를 ‘탁’치며 “이제 알았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광야에서 터득한 투박한 하느님 신앙이, 세련된 세계적 지평을 지닌 고등 신앙으로 도약하는 순간이다. 유대인의 성찰을 통해 비로소 유일신 하느님 신앙이 전 인류가 공유할 수 있는 신앙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찰은 ‘회당’(시나고그)을 중심으로 탄탄하게 뿌리내린다. 포로로 끌려온 이들은 소공동체 단위로 정기적으로 특정한 장소(회당)에 모여 율법을 듣고 배웠다. 이 회당은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의 종교 문화적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강화시키는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회당을 허용했다는 것, 유대인들의 소공동체 모임을 허락했다는 것 자체에서 우리는 바빌론의 관용을 읽을 수 있다. 바빌론은 아시리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잔인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 유배 중에서도 자유롭게 모임을 갖고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빌론 왕은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 여호야킨도 후대했다(2열왕 25,27-30 참조).
더 나아가 바빌론은 예루살렘 성도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식민정책을 실시하지 않았다. 아시리아는 북 이스라엘 왕국을 멸망시킨 후 그 수도인 사마리아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켰지만, 바빌론은 예루살렘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키지 않았다. 따라서 예루살렘에는 이방인들의 신전이 난립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마음 속에 희망이 하나 둘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좌절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그런 민족이 아니었다. 재앙은 그 재앙을 맞아들이는 사람에 의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재앙 앞에서 좌절하고 주저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들에게 재앙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바빌론 유배는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우는 시간이었다.
흰 수염이 인상적이다. 머리에 두른 푸른색 천 사이로 삐져나온 머리카락 색깔도 하얗다. 연한 붉은색의 옷에선 강한 열정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 열정을 감추려는 듯 어깨에는 은근한 회색빛 천을 둘렀다(미켈란젤로 천지창조에 묘사된 모습). 육중한 모습의 제사장 에제키엘이 지금 팔짱 끼고 바빌론의 이방인 신전을 올려 보고 있다. 그가 중얼거린다. 목소리가 들릴 듯 말듯하다. “하느님의 집을 다시 지어야 하는데….”
[가톨릭신문, 2009년 10월 4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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