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38: 새로운 왕조의 시작 - 빛을 밝히기 시작하는 예루살렘 | |||
---|---|---|---|---|
이전글 | [성경] 유대인 이야기37: 영웅의 탄생 - 항쟁의 깃발을 높이 올리다 |1| | |||
다음글 | [상징] 숫자 일(1)의 상징: 그리스도는 한분, 성령 믿음도 하나 |3|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11-28 | 조회수4,391 | 추천수2 | |
[유대인이야기] (38) 새로운 왕조의 시작 빛을 밝히기 시작하는 예루살렘
- 마카베오는 예루살렘을 정화하고, 제단을 쌓고 봉헌했다. 또한 제단 위에서 향을 피우고 등잔대의 등에 불을 붙였다. 예루살렘에 빛이 밝혀졌다. 그 빛을 밝히던 촛대가 바로 봉헌을 의미하는 ‘하누카 촛대’다.
군사 전술 용어 중에 ‘강습’(强襲, assault)이라는 말이 있다. 적에게 예고 없이 공격하는 불의의 습격을 일컫는 말이다.
마카베오군과 엠마오에서 대치한 진압군이 바로 이 강습 작전을 쓴다. 부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진지를 지키고 한 부대는 야간에 마카베오 진영을 급습하는 작전을 쓴 것이다. 실수였다.
절대적으로 우세한 병력(보병 5000명, 기병 1000명)을 보유한 진압군은 병력을 둘로 나눌 필요가 없었다. 정면대결을 펼칠 경우, 병력과 장비 면에서 절대 열세인 마카베오군(보병 3000명)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마케베오군은 오늘날의 탱크에 해당하는 기병조차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진압군은 소규모 정예 부대를 별도로 편성, 강습작전을 폈고 결국 그 결과는 패배로 이어진다.
야간에 마카베오 진영을 급습한 진압군 특공대는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마카베오 진영이 텅 비어 있었던 것이다. 급습 작전을 미리 간파한 마카베오군은 이미 진압군 진영으로 밀고 들어간 상태였다. 마카베오군은 주력 정예 병력이 빠진 진압군을 쉽게 섬멸할 수 있었다. 마카베오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시 창을 진압군 특공대에게로 돌렸다. 이미 승세는 기울었다.
“사태를 파악한 적들은 몹시 겁을 내었다. 게다가 유다(마카베오)의 군대가 들판에서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모두 필리스티아인들의 땅(오늘날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으로 달아났다.”(1마카 4,21-22)
기원전 165년의 일이다.
철저한 패배를 맛본 왕은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듬해 다시 섬멸작전에 나섰다. 이번에는 맘 단단히 먹고 진압에 나선 듯 보인다. 정예 보병 6만명과 기병 5000명을 동원했다. 1년 전보다 10배가 넘는 병력이었다. 이에 마카베오는 벳추르에서 보병 1만명으로 맞섰다. 진압군은 이번에는 정면 대결로 나섰다.
하지만 용병 중심으로 편성된 진압군은 목숨 바칠 각오로 싸우는 유대인들을 당해내지 못했다. 식당 음식 맛의 절반이 주인장의 품성에 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투에 있어서 승리 요건의 50%는 군사들의 사기에 달려있다. 첫 전투에서 진압군 5000명이 몰살당했다. 반면 마카베오군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 용병들은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 앞을 다퉈 도망치기 시작했다. 완벽한 승리였다.
“유다(마카베오)의 부대는 사기가 올라, 죽든 살든 용감히 싸울 준비가 된 것을 보고, (적군은) 안티오키아로 퇴각하였다.”(1마카 4,35)
더 이상 마카베오를 가로막는 적은 없었다. 그는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당당히 입성한다. 그런데 눈앞에 펼쳐진 예루살렘은 비참한 모습이었다.
“성소는 황폐해졌고 제단은 더럽혀졌으며, 대문들은 타 버렸고 뜰은 숲이나 산처럼 잡초가 우거져 있었다.”(1마카 4,38)
마카베오는 사제들을 뽑아 성소를 정화하고 제단을 새로 쌓고, 성소와 성전 내부를 복구하고 뜰을 축성하였다. 성전 앞면을 금관과 방패로 장식했으며, 거룩한 기물들을 새로 만들었고, 등잔대와 분향 제단과 상을 성전 안에 들여 놓았다. 또한 제단 위에서 향을 피우고 등잔대의 등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희생제물을 바치고 8일 동안 제단 봉헌을 경축했다.
마카베오는 이 축제를 지속적으로 지내도록 했다(1마카 4,592마카 10,8). 이 축제는 ‘봉헌절 축제’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하누카’라고 부른다.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가면 면세점이나 기념품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스라엘 고유의 촛대가 바로 ‘하누카 촛대’다.
이후 마카베오는 지금까지의 방어전 중심에서 전환, 공세로 나선다. 마카베오는 예루살렘 인근 도시들을 공격,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구출해 냈다. 연전연승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기원전 161년 그리스 지배세력은 다시 보병 2만명과 기병 2000명을 파병, 마카베오를 압박했다. 이번에는 빠른 기동작전이 통했다. 마카베오의 군대는 갈릴래아 지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상태였다. 진압군은 곧바로 마카베오 진영으로 쳐들어왔다. 마카베오는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있었지만 적군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많은 병사가 탈영, 그의 휘하에는 800명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전투가 시작됐다. 적은 기병대를 두 부대로 나눠 오른쪽과 왼쪽에서 협공했다. 마카베오의 800명은 오른쪽의 기병을 집중 공격했다. 목숨도 포기하고 달려드는 유대인들에게 기병은 쉽게 무너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병력의 절대적 열세는 어쩔 수 없었다. 왼쪽에 편성됐던 진압군 기병이 뒤에서 공격해 왔고, 이어지는 혼전에서 유다 마카베오는 결국 죽음을 맞는다.
“(형제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온 이스라엘도 크게 통곡하고 여러 날을 슬퍼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을 구한 분이, 그 용맹한 분이 어쩌다 쓰러졌는가?’”(1마카 9,19-21)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맏형 ‘요나한’도 요르단강 동부 지역에서 강도들에게 살해되었다.
결국 유다 마카베오의 지휘권은 막내 동생 ‘요나탄’에게 넘어갔다. 유다 마카베오가 독립을 위한 군사적 발판을 마련했다면, 요나탄은 정치적 독립의 발판을 놓은 인물이다. 요나탄은 그리스 지배 세력과 평화 조약을 맺고, 스파르타를 비롯해 로마와도 친분관계를 쌓는 등 가나안 통치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하지만 그도 그리스 지배 세력의 간계에 빠져 암살되었고, 결국 지휘권은 마카베오 형제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둘째 아들 시몬에게 돌아갔다. 유대인들은 이 시몬과 그 후손들에 의해 비로소 정치적 독립을 완수하고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된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들에 의한 새로운 왕조가 다시 열리게 되는데, ‘하스모네아 왕조’가 그것이다.
참고로, 우리가 성경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헤로데 대왕은 하스모네아 왕조의 시조인 시몬(마카베오의 형)의 4대손, 알렉산드로스의 딸 마리암메와 결혼한다.
[가톨릭신문, 2009년 11월 29일, 우광호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