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40: 대왕 헤로데1 - 변방의 헤로데, 왕위를 차지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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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1-06 | 조회수4,554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40) 대왕 헤로데 I 변방의 헤로데, 왕위를 차지하다
- 헤로데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는 지혜롭고, 넓은 안목을 지닌 정치인으로, 온화하고 적극적이었으며 매우 유능하기까지 했다. 동시에 그는 단순하고 미신적이었으며 기이할 정도로 자신에게 관대했고, 광기의 가장자리를 맴돌거나 때론 그것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림은 주제페 아킴볼도(Giuseppe Arcimboldo)의 「헤로데 왕(Herod)」.
‘헤로데’는 폭군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다. 물론 성경을 보면 헤로데는 영아 살해를 명령하는 등 폭군의 전형으로 묘사된다.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헤로데를 서술할 때 ‘대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정도로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헤로데를 위대한 영웅으로 보는 시각 또한 문제다. 사실 그는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폴 존슨은 「유대인의 역사」에서 헤로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지혜롭고, 넓은 안목을 지닌 정치인으로, 온화하고 적극적이었으며 매우 유능하기까지 했다. 동시에 그는 단순하고 미신적이었으며 기이할 정도로 자신에게 관대했고, 광기의 가장자리를 맴돌거나 때론 그것을 넘어서기도 했다. 그는 사울 왕과 솔로몬을 한데 결합시킨 것 같은 인물이었다.”
이제 그가 어떻게 난세를 이겨내고 유대인의 왕이 되었는지, 그 과정을 알아보자.
헤로데의 아버지는 처세에 능한 사람이었다.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이두메아인) 유대 전 지역의 행정 장관에 임명됐다는 것 자체가 로마의 신임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버지는 맏아들 파사엘을 예루살렘의 군사령관에, 둘째 아들 헤로데를 갈릴래아 지역 군사령관(총독)으로 임명했다. 말하자면 형이 수도권을 책임졌다면, 헤로데는 변방을 맡은 것이다. 민심을 다독이는 것을 중시했던 학자형 스타일의 파사엘과 달리 헤로데는 혈기왕성한 사람이었다. 헤로데는 갈릴래아 지역 통치자로 발령받자마자 인근지역 강도떼들을 섬멸하는 등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나타냈다. 당시 국제사회와 백성들이 이 젊은 장수에 대해 호감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 시점에서 로마에서 중대한 사건이 일어난다. 절대 권력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하면 야망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당시 유대 지역 북부에 위치해 있던 파르티아가 하스모네아 왕조의 안티고누스를 앞세워 예루살렘을 침공했다. 이 과정에서 헤로데의 형 파사엘이 죽고(자살), 헤로데는 방랑자 신세가 됐다. 아버지도 이미 죽고 없었다. 헤로데의 또 다른 형제인 요셉은 마지막 남은 지지자 200여 명과 함께 마사다에서 항전하고 있는 상태였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여기서 주저앉았을 것이다. 하지만 헤로데는 다시 일어선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한 그는 이곳에서 클레오파트라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뛰어난 젊은 장수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싶어 했다. 하지만 헤로데는 죽음 앞에서 항전하고 있는 자신의 친족과 지지자들을 버려둘 수 없었다. 클레오파트라의 권고도 뒤로하고, 겨울에 로마행 배에 오른다. 어려운 항해였다. 풍랑을 만나 뱃짐의 대부분을 물속으로 던져야 한 일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로마에 도착한 헤로데는 나중에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이 되는 당시의 실세, 안토니우스를 찾아갔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자신과 가족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다. 안토니우스는 한눈에 이 젊은 장수에게 반한다. 게다가 로마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파르티아와 안티고누스를 그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원로원을 설득했고, 결국 원로원 만장일치로 헤로데를 유대인 왕으로 임명됐다.
헤로데는 이후 로마의 지원으로 군사들을 모아 갈릴래아 지방을 통과해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로마가 그를 왕으로 임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군소 세력들이 속속 합류했다.
이때 유대 헤로데의 형제인 요셉은 20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마사다 요새에서 안티고누스의 군대에 항거하고 있었다. 헤로데의 최우선 목표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신의 동료들을 구해내는 일이었다. 안티고누스는 매복 작전을 통해 헤로데를 저지하려 했지만 헤로데의 예봉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헤로데는 마사다의 친족들을 구출해 냈고 창칼을 적의 심장, 예루살렘으로 돌렸다.
이때 헤로데에게는 신의 은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서로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한번은 그를 지지하기 위해 찾아온 지방 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집이 와르르 소리를 내면서 무너졌다. 많은 이들은 이 사건이 헤로데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징조로 여겼다. 헤로데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는 더 많은 세력들이 헤로데에게 동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헤로데 군대는 예루살렘 성 밖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때 그는 돌발 행동을 한다. 예루살렘 포위를 부하들에게 맡기고 사마리아로 가서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부인은 마리암메였다. 마카베오 가문에 의해 시작된 하스모네아 왕조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이었다. 헤로데는 유대인 왕족과의 결혼을 통해 이방인이라는 굴레를 벗어던지려했고, 그 의도는 성공한다. 헤로데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성 함락은 눈앞으로 다가왔다. 헤로데가 중요한 전쟁을 앞두고 태연히 결혼식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승세가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안티고누스 군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5개월 동안이나 포위 공격을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성 안으로 헤로데의 군대가 물밀듯 들어갔고, 살육이 이어졌다. 헤로데가 어린이와 여성, 노약자들에 대해서는 관대한 처분을 하라고 명령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인들은 포위 공격 5개월 동안 겪었던 고초를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어린아이이건 노인이건 여자건 가리지 않고 살해했다. 안티고누스는 살려달라고 애걸하다가, 결국 로마의 안토니우스에게로 끌려가 도끼로 처형됐다.
기원전 37년의 일이다. 대왕 헤로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9년 12월 13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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