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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35: 대왕 헤로데2 -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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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1-06 조회수3,782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35) 대왕 헤로데 II


성전은 웅장하고 화려했지만 …

 

 

헤로데가 재건한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했다. 그 성전의 외곽을 감싸던 서쪽 벽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통곡의 벽’이 그것이다. 이 벽을 쌓는데 쓰인 돌 중에는 길이가 12m에 달하는 것도 있는데, 무게가 100t이 넘는 것도 있다.

 

 

예루살렘을 점령한 헤로데는 여세를 몰아 아라비아 정벌에 나선다. 이 전쟁에서 그는 처음에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지만 결국 적군 1만2000여 명을 사살하고, 4000여 명을 사로잡는 대승을 거둔다.

 

헤로데의 앞을 가로막을 적은 이제 없었다. 하지만 새롭게 로마의 실권자로 떠오른 옥타비아누스(훗날 로마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절대적 지지가 필요했다. 헤로데는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의 연인)가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자 직접 승리자를 찾아가 주인을 바꾸는 발빠른 모습을 보인다. 왕관도 쓰지 않은 평민의 옷차림이었다. “저는 구원의 희망으로 폐하께 나왔습니다.” 그러자 옥타비아누스가 말했다. “좋소, 지금보다 더 확고하게 왕위를 보존하시오.”

 

옥타비아누스는 헤로데에게 왕관을 씌워주었다. 그리고 다마스쿠스 남쪽 지역과 요르단강 동편, 갈릴레아 지방 전역을 헤로데의 통치권으로 선언했다. 청년 장수 헤로데는 이제 과거 다윗왕이 다스리던 지역보다 훨씬 넓은 땅을 소유한 왕이 됐다.

 

당시 국제정세가 헤로데에게 유리하게 돌아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이처럼 헤로데에 대해 호감을 드러낸 것은 그의 인간적 매력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당시 역사가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초창기 헤로데의 면모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헤로데는 정신과 몸이 조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그는 말 타는 솜씨가 일품이었고 뛰어난 사냥실력을 가졌다. 헤로데는 누구도 맞설 수 없는 전사였다. 그는 전쟁에서 패한 일이 거의 없었다.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과실이 아니라 부하들 몇몇의 부주의함 때문이었다.”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로데는 이제 칼을 내려놓고 피 묻은 손을 씻는다. 편안히 옥좌에 앉아 느긋한 마음으로 정책을 구상한다. 그렇게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정책은 신도시 개발이었다. 헤로데는 판단과 실행의 간극이 짧은 사람이다. 즉시 대대적인 토목, 건축 사업을 일으킨다. 사마리아의 한 지역을 길이 4km에 달하는 성벽으로 둘러싸고 도시(세바스테)를 만들어 6000여 명의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또 방파제와 접안시설을 갖춘 대형 항구 도시, 카리사리아(로마 황제를 의미하는 명칭 ‘카이사르’에서 빌려온 이름)도 건설했다. 또한 예리코 등 각 도시에 원형경기장, 극장, 시장 등을 건설했다. 심지어는 자신의 통치권 밖에 있는 도시들에도 성벽, 회랑, 신전, 시장, 극장, 수도시설, 목욕탕을 지어 헌정했다. 하지만 헤로데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도시건설을 일단락한 헤로데는 본격적인 예루살렘 성 및 성전 재건 사업에 나선다. 그런데 그 규모가 놀랍다. 훗날 헤로데 성으로 이름 붙여지는 예루살렘 성의 대지만 4만2840평에 달한다. 수 백 개의 코린트식 기둥이 세워졌다. 각 기둥은 세 명의 남자가 팔을 잡고 둘러싸야할 정도로 웅장함을 자랑했다.

 

성전도 재건됐다. 새로 재건된 성전은 솔로몬의 성전을 능가했다. 고대의 신전 가운데 가장 거대한 규모였다고 하는데, 심지어 로마 광장의 2배에 달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그 성전의 외곽을 감싸던 서쪽 벽 일부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는데, ‘통곡의 벽’이 그것이다. 이 벽을 쌓는데 쓰인 돌 중에는 길이가 12m에 달하는 것도 있는데, 무게가 100t이 넘는 것도 있다. 성전 외부와 성전 문 등은 금과 은으로 장식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맑은 날이면 수 km 밖에서도 그 반짝거림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볼 경우, 그 빛의 강렬함 때문에 한동안 눈이 안보일 정도였다고 하니 그 화려함이 짐작이 간다. 이 성전을 보기 위해 로마와 아라비아, 시리아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예수님도 성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성전 앞에서 예수님께선 눈물을 흘리신다.

 

“그때가 너에게 닥쳐올 것이다. 그러면 너의 원수들이 네 둘레에 공격 축대를 쌓은 다음, 너를 에워싸고 사방에서 조여들 것이다. 그리하여 너와 네 안에 있는 자녀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네 안에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게 만들어 버릴 것이다.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3-44)

 

어쨌든, 헤로데가 통치하던 마지막 20년 동안 그의 백성들은 비교적 평화로움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헤로데는 늙으면서 점차 변해갔다.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는 일이 잦았으며, 그 결과 아내와 아들들까지 무참히 살해했다. 특히 말년에는 정치적으로도 폭정을 거듭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영아살해 사건은 유명하다. 또 성전을 장식하기 위해 만든 독수리상을 훼손한 젊은 유대 학생들을 괘씸죄로 체포해 산채로 불태웠다. 이 밖에도 자신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이들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인과응보일 것이다. 말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많은 질병을 앓았다. 「유대 전쟁사」에는 헤로데가 말년에 앓았던 질병의 증상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다.

 

“열은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나, 피부 전체에 참을 수 없는 가려움증이 나타났고 내장의 심한 통증이 계속되었으며, 발에는 수종이, 하체에는 염증이 심했다. 심지어는 성기 부분이 종양으로 썩어 벌레가 나오기도 했다. 그는 똑바로 앉아서만 겨우 숨을 쉴 정도였고, 급기야 몸의 모든 부위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기원전 4년 따뜻한 봄날, 헤로데는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찾아간 온천에서 사망했다. 강렬한 카리스마로 유대인들을 통치하던 헤로데가 죽었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의 안정적 유대인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다툼과 반목, 갈등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혼돈의 시대에 한 유대인 아이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

 

[가톨릭신문, 2009년 12월 20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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