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46: 전쟁의 서막 -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나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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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2-22 | 조회수4,058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46) 전쟁의 서막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나고 …
- 극도로 흥분한 유대인들은 마치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처럼 질주를 계속한다. 로마인 입장에서는 폭도였고, 유대인 입장에서는 민중 궐기였다. 사진은 유대인의 최후 저항지로 유명한 마사다 요새.
시위 진압 작전을 지휘하는 부대장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시위대를 순식간에 해산시키는 능력? 아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 더 필요한 것은 부하 대원들을 제대로 통제하는 것이다. 부대원 통제 능력이 부족하면, 부대원들은 시위대의 도발로 생긴 증오감 때문에 야수로 변한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따라서 시위 진압 부대장은 고삐 다루는 솜씨가 빼어나야 한다.
로마에 의해 파견된 유대지역 통치자들은 이러한 능력이 부족했다. 시위대와 부하 대원들의 감정을 동시에 폭발시킨 것이다. 그 결과 유대인 100여만 명이 사망하는 참극이 발생한다.
발단은 이랬다. 유대 장관(플로루스)은 유대인들이 세금을 체납하자, 대신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보물 창고에서 17탈렌트의 금화를 몰수해 버렸다. 17탈렌트라면 어마어마한 액수다. 당시 성경기록에 따르면 1탈렌트는 노예 90명을 살 수 있는 값이었다(2마카 8,11 참조). 또 신약의 요한묵시록은 “하늘에서는 무게가 1탈렌트나 되는 엄청난 우박들이 사람들에게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16,21 참조). 한 역사학자는 당시 1탈렌트가 서민 600명의 1년 수입을 합친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유대인들은 분노한다. 물론 돈의 액수도 많았지만 그보다 더 큰 충격은 성전의 거룩한 보물을 로마가 강탈했다는 사실이었다. 유대인들은 시위대를 조직해 강력히 항의했다. 상황이 이 정도로 확대되면, 지도자는 냉철함을 유지하면서 상황을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그런데 유대 장관은 최악의 선택을 한다. 유대인들의 항의를 강경진압으로 맞선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분노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단순한 시위가 폭동으로, 폭동은 다시 조직적인 항거로 이어진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당시 갈릴레아 지역을 담당하던 유대인의 분봉왕 아그리파 2세가 중재에 나섰다.
“너희가 전쟁을 시작하면 적들은(로마인들은) 모든 유대인들을 학살할 것이다. 소수의 무책임한 행동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피를 흘리게 된다. 스스로를 위해 성전을 보존하라. 로마인들이 관용을 베풀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마라. 너희가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면 너희는 평화롭게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분노의 감정에 휩싸여 버린다면 너희 모두는 심각한 위험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극도로 흥분한 유대인들은 마치 멈추지 않는 폭주기관차처럼 질주를 계속한다. 로마인 입장에서는 폭도였고, 유대인 입장에서는 민중 궐기였다. 유대인들은 마사다 요새로 쳐들어가서 그곳을 지키고 있던 로마 경비병들을 죽였다. 당시 대제사장 다음 서열이었던, 성전 수비대장도 로마와 황제를 위한 제사를 거부하는 등 조직적으로 저항했다.
당황한 것은 유대인 지배계층과 상인 등 기득권층이었다. 그들은 ‘이대로의 평화’를 원했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치닫자 당시 대제사장과 권력자들은 흥분한 급진파를 설득하고 나섰다. 하지만 급진파들은 듣지 않았다. 결국 유대인은 정치적 입장차 때문에 둘로 갈라진다. 상황은 점점 이상하게 꼬여갔다. 당초에는 ‘로마에 대한 유대인들의 항거’구도였는데, 이제는 로마를 사이에 두고 유대인들이 둘로 갈라져 싸우는 미묘한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다. 대제사장파와 급진파 사이에 돌과 창이 날아다녔고, 심지어 대낮 길거리에서 육박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아직까지는 대제사장파와 급진파, 모두 소수였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다수의 부동층이 쥐고 있었다. 대제사장파와 급진파 세력다툼의 관건은 다수의 부동층을 누가 끌어들이느냐에 달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급진파가 유리하다. 일반적으로 소수 급진파는 다수의 부동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과격한 행동을 한다. 자신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강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온건파들도 어쩔 수 없이 휩쓸려 끌려가는 경향이 있다. 다수 부동층은 결국 급진파의 손을 들어 주었다. 공문서 보관소를 비롯해 대부분 관공서들이 불태워졌다. 궁전도 불탔다. 유대인 지도자들과 대제사장들, 부유 상인 계층은 몸을 피신해야만 했다.
이때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당시 로마군 주력부대는 카이사리아에 있었다. 유대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예루살렘에는 의장대 수준의 소수 경비병력만 주둔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의 공격이 있자 왕궁으로 후퇴했지만, 결국 모두 체포돼 살해됐다. 로마군 수비대가 주둔하던 마사다 요새도 급진파 수중에 떨어졌다. 유대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도 붙잡혀 처형됐다. 이 밖에 다수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죽었다. 로마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였다. 기세가 오른 급진파 반란군의 환호성이 예루살렘 성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예루살렘 이 외 지역에선 유대인들에 대한 보복 학살이 자행됐다. 당시 카이사리아 그리스계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로마에 항거하는 폭동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증오를 카이사리아 유대인들에게 폭발시켰다. 카이사리아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 2만 명이 학살됐으며,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5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 다마스쿠스 시민들도 유대인 1만5000여 명을 공공경기장에 몰아 넣은 후 단 1시간 만에 몰살해 버렸다. 이 같은 상황은 시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참혹함을 요세푸스는 「유대 전쟁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시체들이 매장되지도 않은채 도시마다 넘쳐났다. 노인들과 아이들의 시체가 뒤엉켜 있었고 여자들의 시체는 벌거벗겨진 채로 나뒹굴었다. 이 땅 전체가 끔찍한 참상으로 가득차 있었다.”
드디어 로마군이 움직인다. 문제 해결을 위해 유대 지역을 관할하는 시리아의 총독이 직접 나섰다. 예루살렘 경비대가 당한 모욕을 씻겠다는 결의로 가득찬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천천히 남하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황제는 네로였다.
[가톨릭신문, 2010년 1월 31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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