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48: 메시아? - 별의 아들을 메시아로 믿었건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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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2-23 | 조회수5,428 | 추천수3 | |
[유대인 이야기] (48) 메시아? ‘별의 아들’을 메시아로 믿었건만 …
- 유대 민족에게 메시아가 나타났다. 132년 당시 유대인 최고 학자가 메시아라고 인정한 인물이 유대인 봉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봉기는 실패로 끝났고, 그 결과는 유대인과 로마의 첫 번째 전쟁보다 더 참혹했다. 사진은 당시 바르 코크바가 독자적으로 발행했던 동전(위)과 부관들에게 보낸 편지(아래).
예루살렘성에 고립된 유대 저항군은 로마군의 공격뿐 아니라 성안에 있던 유대인들의 집단 탈출을 막기 위해서도 안간힘을 썼다. 굶주림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수많은 이들이 필사적으로 성을 탈출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동족들이 등 뒤에서 던진 창과 화살에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 철통같은 감시망을 뚫고(관 속에 몸을 숨겨) 탈출한 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있었다. ‘벤 자카이’였다. 성을 빠져나온 그는 바로 로마군 진영으로 달려가 담판을 짓는다. 그는 야브네(오늘날 텔아비브 남쪽)에 율법학교를 개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벤 자카이는 예루살렘성이 무너져도 율법과 율법을 가르칠 학교만 있다면 유대 민족을 보호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사실로 드러났다. 예루살렘 함락 이후 자칫 유대민족의 명맥은 꺼질 수도 있었지만, 한 바리사이파 학자의 용감한 행동으로 율법은 보호될 수 있었고, 그 율법을 통해 유대인들의 명맥도 이어질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유대인들의 머리가 똑똑한 이유는 이 율법 학습에 기인하지 않나 생각된다. 모든 공부의 시작은 ‘암기’에 있다. 영어도, 수학도, 국어도 본질적으로 암기로부터 출발한다. 암기를 통해 창의력과 응용력의 발휘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유대인들은 3세가 되면 히브리어를 배운다. 율법을 암기하고 배우기 위해서다. 특히 13세 때 성인식을 치르기 위해선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중 한 편을 반드시 모두 암기해야 한다. 한국에서 13살 된 아이에게 창세기나 탈출기를 완벽하게 암기하라고 하면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유대인 청소년들은 이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 낸다. 이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당연히 어릴 때부터 두뇌가 발달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든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 더 이상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 유대인들은 율법에만 파묻혀 살았다.
그렇게 6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이 시점에서 유대인들의 몸이 또다시 근질거리기 시작한다. 유대인은 60여 년 전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물론 ‘할례 금지’ 등 로마 황제가 유대인들을 자극한 면도 없지 않다. 로마인에 대해 복수의 기회를 엿보던 유대인들이 또다시 봉기한다. 그런데 이번 봉기는 이전의 봉기와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에는 메시아에 의한 봉기였다.
지도자는 시몬 바르 코크바 혹은 코시바로 불리던 남자였다. 이 사람은 유대 역사상 가장 신비로운 인물 중 한 명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자 메시아라고 했다가 유대인들에게 살해당했다. 그런데 당시 최고의 유대인 학자였던 아키바 벤 요셉(약 50~135)은 바르 코크바를 메시아로 인정한다. 또 다른 많은 바리사이파들이 바르 코크바(별의 아들)라는 이름이 민수기 24장 17절에 나오는 메시아 예언을 지칭한다고 해석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왔으니, 당연히 하느님의 왕국이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코크바를 중심으로 일치했다. 이러한 광적인 열광은 한 때 예루살렘 점령이라는 성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유대인들은 4년 동안 로마에 대항했다. 로마 입장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날의 영국과 다뉴브 강에 주둔하고 있던 군단을 제외한 12개 군단 전체가 반란 진압에 동원됐다. 결국 봉기를 이끌었던 코크바는 전사했으며 당시 지식인을 비롯한 추종자들은 모두 처형됐다.
135년에 막을 내린 이번 봉기의 결과는 유대인과 로마의 첫 번째 전쟁보다 더 참혹했다. 반란군들이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던 50개의 요새가 파괴됐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985개의 마을과 촌락 그리고 정착지들이 파괴되었으며, 58만 명의 유대인들이 굶주림과 방화, 칼에 쓰러졌다. 예루살렘은 로마 도시인 엘리아 카파톨리아라는 이름으로 재건됐다. 유대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황제는 ‘유대’라는 민족의 이름도 ‘시리아-팔레스타인’으로 바꾸었다. 수많은 유대인 전쟁포로들이 로마제국의 노예시장으로 쏟아져 나왔다. 4세기 말의 성 히에로니무스(예로니모)가 베들레헴에서 남긴 기록에 따르면 바르 코크바 봉기 이후 유대인 노예들이 급증해 유대인 노예 한 명의 값이 말 한 마리보다 비싸지 않았다고 한다.
“너희 뒤에 일어날 다음 세대의 자손들과 먼 땅에서 올 외국인이, 이 땅의 재난과 주님께서 이 땅을 병들게 하신 질병들을 보고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온 땅이 유황과 소금으로 불타 버려 씨를 뿌리지도 못하고 뿌린 씨가 나오지도 못하는구나. 이곳은 어떤 풀도 돋아나지 않아, 마치 주님께서 당신의 분노와 진노로 멸망시키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츠보임의 처지와 같구나”(신명 29,21-22)라는 예언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국가가 성립하기 위한 3대 기본 요소는 영토, 국민, 주권이다. 우선 영토가 없으면 국가가 아니다. 주권을 가진 국민이 있다고 해도 공중부양한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마찬가지로 동일성을 지닌 국민이 한 영토에 살고 있어도 주권이 없다면 국가가 아니다. 손발 묶인 상태에서 국가를 논할 수는 없다. 또한 주권을 행사할 국민 없이 땅만 덩그러니 있어도 그것은 국가라 할 수 없다.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유대인들에게는 그나마 영토가 있었다. 그러나 서기 135년 바르 코크바에 의한 봉기가 실패로 끝나면서 유대인들은 주권과 영토, 국민 모두를 잃게 된다. 국가를 구성하는 세 요소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유대인들의 나라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정도 상황이면 어떤 민족도 버텨내기 힘들다. 세계사에는 그렇게 사라져간 민족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런 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았고, 지금까지 자신들만의 문화를 지켜오고 있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이유가 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정신’을 지켜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기서 우리는 미쉬나와 탈무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2월 14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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