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복음 묵상: 마태오 복음이 전해주는 매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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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3-02 | 조회수7,351 | 추천수5 | |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오 복음이 전해주는 매력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한테도 여전히 현장감 있는 이야기로, 우리를 위로해 주는가 하면 우리의 삶을 휘저어놓기도 합니다. 그런 복음서 이야기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예수님의 생애를 따라간다면 복음서는 훨씬 생동감 있게 들릴 것입니다. 복음서의 현장은 때로는 우리를 질타하기도 하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새해에 새로 연재하는 정인준 신부님이 이끌어주실 마태오 복음 묵상은 우리를 그 풍성한 삶의 현장으로 안내할 것입니다(편집자).
들어가는 말
마태오 복음은 구약성경을 배경으로 하는 유다인들을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다는 것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마태오는 스승이셨던 예수님이 참사람이시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부터 시작하는 탄생, 죽음, 부활에 이르기까지 죽 나열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인간적인 면만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처음부터 하느님의 깊은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려 하였습니다.
모두 28장으로 되어있는 마태오 복음은 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생과 가르침, 그리고 곳곳에 구약이 배경으로 있음을 알게 됩니다. 마태오의 전체 내용을 본다면, 1-4장을 서론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 탄생 전후의 이야기와 세례자 요한의 역할, 전도 여행 시작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론으로는 5,1-28,15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시고 선교여행을 하시며, 여기저기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시며 치유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삶이 되는, 수난, 죽음, 부활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집니다. 결론으로는 28,16-20에서 예수님의 승천과 제자들의 사명으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의 목적이 유다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삶에 현장감을 갖고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예수님 삶의 절정이 되는 수난, 죽음 그리고 부활의 현장을 지금의 표현으로 하자면 생중계하는 것 같아, 예루살렘의 역사적 사건의 과거와 현재가 나에게 다가오는 생생한 묵상자료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오만이 가지는 특징과 함께 참인간이며, 참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초대되어 주님과 일치를 이루며 구약에 이미 예언되었던 일이 성취되는 시간에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게 잡히신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원로들, 그리고 대사제의 권위 앞에서 비교도 될 수 없는 초라한 죄인이며 한 인간의 모습으로 계십니다. 그러나 마태오는 이미 예수님은 인간의 모습이면서 바로 종말에 구름을 타고 오는 메시아이심을 다니엘 7,13와 시편 110,1을 인용하며 증명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눈에는 예수님은 연약하고 비참한 한 인간으로 비치지만, 그분을 사랑하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분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통치자이시고 죄인들을 용서하시며 이끌어주시는 자비로운 목자, 구세주이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예수님의 세례(마태 3,1-17)
마태오는 예수님의 탄생 전후와 유년시절의 이야기를(1-2장) 마치면서,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서문으로 세례자 요한의 등장과 예수님의 세례와 유혹사건을 설명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사야 40,3을 인용하면서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예루살렘으로의 귀환(기원전 538년)과 더불어 메시아의 도착을 알리는 예언의 성취를 알려줍니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내용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루카 복음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대신 구원의 시기인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라는 메시지로 그 초점을 모읍니다.
마태오는 이사야 예언서에 나타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이사 40,3)를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소개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머물던 ‘유다 광야’는, 얼핏 보기에는 그저 장소에 불과한 것 같지만, 유다인들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정치는 인간에게 희망과 신의를 심어주기보다는 많은 경우 실망만을 안겨주는데, 성경의 역사에서도 이 사실이 입증됩니다. 과거 예루살렘의 멸망과 수모의 유배를 겪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의 책임을 갈라진 왕정(王政)으로 돌립니다.
이스라엘 선조들은 비록 사막에서 40여 년 고통을 겪으며 살았지만, 하느님과 백성은 친밀했고 지파와 지파 사이도 분열 없이 탄탄한 연대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백성의 관계가 좋았던 시절은 다름 아닌 광야에서의 생활이었습니다.
선조들의 이러한 사막에서의 체험은, 예언자들에게 사막을 고향이며 정화의 장소로 생각하게 하였습니다. 마태오 역시 비뚤어진 백성의 회개 장소로 광야를 특별한 의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사막이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이라면, 세례자 요한이 머물던 유다 사막은 하느님의 권위를 대행하며 백성을 잘못 이끄는 세력으로부터 이제 새로운 메시아와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곳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유다 사막으로 모여듭니다. 마태오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의 지방의 모든 사람”이라고 표현하면서, 민심이 이미 세례자 요한에게 기울어졌음을 암시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오는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듣기 거북한 표현까지 쓰면서 그들의 굳을 대로 굳은 마음을 나무랍니다. 세례자 요한에게 풍기는 독특한 점은 명성이나 인기에서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은근히 부추기는 메시아로서의 기대감을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줄 압니다.
그래서 그는 오실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도 없다고 자신을 낮추고, 오실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며 들어 높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선한 이들과 악한 이들을 구분하여 심판하실 분이며, 이미 손에 키를 들고 쭉정이와 알곡을 가리는 것을 시작한 메시아”임을 선언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와 세례는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마태오는 그 내용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루카는 소외된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는 율법을 세부적인 항목으로 나누어 종교 의무를 강요했기 때문에 나누고 베푸는 삶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이렇게 종교의 방향을 잘못 이끄는 그들에게 마태오는 회개하고 사랑과 사회정의의 삶으로 새롭게 나가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마태오보다는 루카가 좀 더 구체적으로 군중과 세리 그리고 군인들에게 해당하는 의무를 설명합니다. 가난한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는 것인데, 옷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배고픈 사람에게 주라고 가르칩니다. 세리에게도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말라고 하고,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자신들의 봉급에 만족하라고 합니다. 마태오도 25,31-46에서 주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위해 왕으로 오실 때 양과 염소를 가르는 것처럼, ‘소외된 이들과의 나눔’을 심판의 잣대로서 말합니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을 간략하게 설명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자기에게 오셨음을 황송하게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의로움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하십니다(3,14-15).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며 들려오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소개하면서,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일화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서로 존중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새김
우리에게는 세례자 요한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서 새겨야 할 신앙의 교훈이 있습니다. 형식이나 틀에 박힌 기득권의 종교적 권위가 결코 하느님의 뜻을 대변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과 세례자 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겸허한 모습도 우리가 배우며 새겨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어떤 이론과 교훈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실천적 행동’이 따라야 우리의 신앙이 완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배워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거리”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머리로는 깨닫고 잘 알고 있으나 마음으로 결심하고 실천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 그래서 머리에서 심장은 거리로는 가까운데, 머리에서 마음, 그리고 실천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실천은 작은 것이라도 내 가까운 이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독일 가톨릭 부인회 초정으로 에쎈에서 강연을 했는데, 주제가 인도 캘커타의 빈민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회장과 임원들이 수녀님께 인도 캘커타의 활동을 돕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정색을 하며 “먼저 여러분 주위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십시오. 낯설고 멀리 있는 소외된 이들보다 여러분 (곁에서) 도움을 기다리는 소외된 이들을 먼저 돕고 캘커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셨습니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였다.
[경향잡지, 2010년 1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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