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50: 반목 - 십자가에 대한 노이로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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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3-31 | 조회수4,031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50) 반목 십자가에 대한 노이로제?
-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를 상징하는 십자형 문양에 대해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들이 받은 상처 때문이다. 사과를 깎다가 칼에 살짝 스쳐 피 나는 그런 상처가 아니다. 가슴을 찌르는, 폐부를 도려내는 그런 상처다. 사진은 교차로 대신 설치한 예루살렘 다마스커스 게이트 앞의 로터리(위)와 다윗의 별이 그려진 이스라엘의 구급차(아래).
성지순례를 가서 유심히 살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스라엘의 도로에는 십자형(+) 교차로가 없다. 교차로가 필요할 경우 중앙에 화단 등을 설치, 차가 회전하며 진행하도록 로터리를 만든다. 물론 관광객이나 이방인이 많이 찾는 예루살렘이나 텔아비브 등 교통이 혼잡한 곳에서는 십자형 교차로가 간혹 눈에 띄긴 하지만 유대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는 어김없이 로터리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연상시키는 십자형 문양에 대해 이처럼 심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심지어는 학교에서 수학을 배울 때도 세계 공통으로 사용하는 더하기 기호(+)를 쓰지 않고 ‘⊥’기호를 사용한다. 또 환자를 수송하는 앰뷸런스에도 적십자 기호가 아닌, 다윗별이 그려져 있다. 만약 커다란 십자 문양이 그려진 가방을 메고 이스라엘을 순례한다면(특히 예루살렘 통곡의 벽을 방문한다면) 유대인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을 각오, 단단히 해야 한다.
유대인들이 십자 문양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는 것은 왜일까. 상처 때문이다. 사과를 깎다가 피부가 칼에 살짝 스치는 그런 상처가 아니다. 가슴을 찌르는, 폐부를 도려내는 그런 상처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다. 스테파노의 순교(사도 7,54-60)가 대표적 사례다. 당시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바치던 기도문에는 “진노를 일으키시고 분노를 쏟아 부으시어 적을 쳐부수시고 원수를 없애소서”(집회 36,8-9)라는 부분이 있었다. 이 기도는 당초 사두가이파를 향한 것이었지만, 서기 90년경에 이르면 그리스도인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개작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추방됐으며, 일부 지역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에 의해 집단 학살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힘의 우위가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밀라노 칙령 이후, 그리스도교(이하 교회)가 점차 로마 국교로 자리 잡으면서 뒤집어지게 된다. 교회가 유대교보다 우위에 서게 된 것이다.
당시 초기 교회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이 강했다. 예수가 일부 유대인 지도층을 ‘악마의 자녀’(요한 8,44)라고 지칭한 것을 두고 당시 신앙인들은 보편적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유대인들이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질 것이오”(마태 27,25)라고 말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점차 고립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에 유대인들은 위축됐으며, 강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교회가 처음부터 유대교에 대한 탄압을 조직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교회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인 민족이기에 벌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저 “유대인들이 예수의 기적과 삶을 직접 체험했으면서도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는 차원의 인식이 대부분이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유대인들의 존재 자체는 하느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까지 말했다.
하지만 법보다는 주먹이 가깝다. 4세기 초부터 로마 제국 전 지역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이유없는 반감이 생겨났다. 많은 그리스도교 설교가들이 유대인들은 박해를 받아 마땅하다고 말했고, 민중들은 거기에 동조했다. 까다로운 율법에 대한 맹목적 준수와 할례, 생소한 요리법 등은 유대인들을 ‘독특하고 유별난 민족’으로 보게 했다. 유대인들 몸에는 꼬리가 있다든가, 독특한 냄새가 난다거나, 여자들은 늘 하혈로 고통받는다는 등 헛소문도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심지어 유대인들이 악마와 소통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문제는 많은 신앙인들이 이를 사실로 믿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멸시를 받았으며, 공직에도 나가지 못했다. 유대인 마을은 공공연히 습격과 방화의 대상이 됐다.
로마의 황제들도 유대인 박해에 앞장섰다. 7세기에 “로마는 할례를 받은 이들에 의해 파멸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로마 황제는 유대인들에게 강제적으로 세례를 주었으며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했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혹사당했고, 박해를 받았으며 재산이 몰수되거나 턱없이 많은 세금을 내야 했다. 심지어는 무역에 종사하는 것조차 금지 당했다.
유대인들은 이제 그리스도교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게 된다. 이 시점에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싹튼다. 바로 이슬람 세력의 성장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아랍인들은 구세주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랍인들의 유럽 침공에 적극 협력한다. 실제로 711년 이슬람이 스페인을 침공, 점령하는데 유대인들의 협력은 결정적이었다. 이러한 공로로 유대인들은 이슬람 제국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유대인의 역사」를 쓴 폴 존슨에 따르면 서기 900년경 이슬람 국가가 된 스페인에는 44개 이상의 도시에 부유하고도 안정적인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다.
7~8세기에 걸쳐 순식간에 서양 세계의 절반을 정복했던 이슬람 전사들은 안정적 자금원인 유대인들이 없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게다가 유대인들은 모하메드를 십자가에 매달지 않았다. 유대교는 또 그리스도교처럼 공격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그리스도교는 복음을 아랍인들에게 전하려 했지만, 유대인들은 전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식사와 정결에 대한 규정들도 유대교와 이슬람이 비슷했다. 이슬람과 유대교는 이질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동안 유대인들은 이슬람 궁전에서 의사와 관료로 일하는 등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유대인들을 바라보는 아랍인들의 눈빛이 변하기 시작한다. 아랍인들은 그리스도교 로마 제국에 향했던 칼을 이제는 유대인들을 향해 휘두르기 시작한다.
사자 굴에서 간신히 도망쳐 나와 쉬려고 찾아 들어간 곳이 알고 보니 호랑이 굴이다.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7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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