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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53: 저희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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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4-02 조회수4,142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53) 저희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세 치 혀가 사람 잡는다더니…”

 

 

사람은 더럽고 불결하다고 느끼는 사람과는 한 울타리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 법이다. 1500년대 많은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더럽고, 불결해서 함께 상종해선 안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덴자우’.

 

 

1144년 영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섬뜩한 일이 발생했다.

 

부유한 농민의 아들, 윌리엄이 실종됐다가 이틀 후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시신은 처참했다. 머리카락이 모두 잘려진 상태였으며, 피범벅된 몸에는 수많은 자상이 발견됐다. 범인을 잡기 위해 수사가 진행됐다. 소년을 마지막으로 본 목격자가 나타났다. 목격자는 윌리엄이 한 유대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목격자도 나타났다. 윌리엄이 들어갔다는 그 유대인 집의 하녀였다.

 

“유대인은 윌리엄을 결박하고, 입에 재갈을 물렸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웠고, 손과 발에 못을 박았습니다.”

 

목격자의 증언이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하녀의 말을 믿었고, 곧 흥분했다.

 

주민들은 당시 떠도는 소문을 떠올렸다. 그 이야기는 이렇다. 유대인들은 만성적인 치질을 비롯해 다양한 질병을 앓았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매년 한명의 그리스도인을 죽여 그 피를 상처 부위에 바른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전 유럽에 퍼져 있었다. 흥분한 마을 주민들이 그 유대인을 잡아 당장 죽이려 했다. 하지만 당시 지방관의 제지로 유대인은 일단 무사할 수 있었다.

 

비슷한 일이 1171년 프랑스와 1235년 독일에서도 발생했다. 독일 한 마을의 방앗간 주인의 집에 불이나 전소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불로 주인의 다섯 아들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간혹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유대인들이 그리스도교인의 피가 필요해 아이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퍼졌다. 32명의 유대인 지역 주민들이 모두 체포됐고, 즉시 살해됐다. 뒤에 황제가 이 사건을 조사했는데, 결과는 무죄였다.

 

또한 당시 유럽에는 유대인들이 성체를 의도적으로 모욕한다는 소문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에 다시 고통을 주기 위해 성체를 훔쳐내 뾰족한 못이나 칼로 찌른다는 것이었다.

 

모함 때문인지, 혹은 사실에 입각한 재판이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1209년 파리에선 성체를 모욕했다고 고발당한 유대인이 사형에 처해졌다. 1243년에는 독일 베를린 인근에서도 유대인이 성체를 훔쳐 이를 악한 목적으로 사용했다는 혐의로 고발됐고, 역시 사형에 처해졌다.

 

물론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를 자극하려는 일부 극소수 유대인들의 행동 탓도 있었다. 제4차 라테란공의회(1215년)는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과 구별되는 옷을 입도록 하고 특히 성주간에는 외출을 못하도록 했는데, 이는 일부 유대인들이 성주간에 의도적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거리로 나와 그리스도의 수난을 비웃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지금까지의 피해는 견딜만 했다. 하지만 이제 유럽 전역의 유대민족이 피눈물을 흘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1348년부터 1350년까지 페스트가 전 유럽을 휩쓸었다. 대참사였다.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이곤 하지만 당시 전체 유럽 인구의 1/4 혹은 1/5이 사망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페스트균은 숙주 동물인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사람에게 전파된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전염병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 원인조차 몰랐다. 그래서 책임을 엉뚱하게도 유대인들에게 전가시킨다.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어 전염병을 유발시킨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몇몇 유대인들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자백했다. 하지만 이는 고문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됐다. 프랑스와 스위스, 오스트리아, 스페인, 독일 등 전 유럽에서 유대인 학살이 자행됐다. 페스트 피해를 입지 않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교회가 이를 막기 위해 나섰다. 교황 클레멘스 6세(Clemens VI, 재위 1342~1352)는 “유대인들도 우리들과 함께 페스트의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고난의 책임은 악마입니다”라는 내용의 교서를 발표했다. 하지만 분노한 민중들의 귀에는 교황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300개 이상의 유대인 거주지가 철저히 파괴됐다. 기록에 따르면 독일 마인츠에서 6000명,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2000명이 희생됐다.

 

유대인들은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개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 조차도 박해했다. 위장 개종이 간혹 섞여 있었던 것이 문제였다. 이 같은 상황은 스페인에서 더욱 심각했다. 개종자라고 하더라도 최소 1년 동안 노란색 십자가 모양이 있는 삼베옷을 입어야 했다. 또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을 밀고해야 했다. 또한 이들은 직업도 가질 수 없었고, 수염을 기를 수도, 말이나 마차를 탈 수도 없었다. 당연히 감옥은 유대인들로 넘쳐났다. 수만 명이 가택 연금 상태에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제 스페인은 유대인 처리에 고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추방(1492년 완결) 이었다. 이어 유럽 각국에서 유대인 추방 도미노 현상이 일어났다. 이탈리아, 포르투갈, 독일도 유대인 추방에 나섰다. 특히 독일에서의 처지가 고약했다. 독일인들은 유대인들을 ‘유덴자우’(Judensau) 라고 불렀다. ‘암퇘지 유대인’이라는 경멸적인 뜻을 담고 있는 말이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독일의 쾰른 대성당에 가면 합창단석 측면에 유대인 두 사람이 죽은 돼지와 함께 있는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은 더럽고 불결하다고 느끼는 사람과는 한 울타리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 법이다. 1500년대 많은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더럽고 불결해서 함께 상종해선 안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단 거주지역을 만들어 그곳에 유대인들을 가둔다. 이것을 우리는 게토(Ghetto)라고 부른다. 최초의 게토는 1516년 베네치아에서 생겨났다.

 

[가톨릭신문, 2010년 3월 28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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