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56: 드레퓌스 대위 - 군중심리에 묻힌 불편한 진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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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4-19 | 조회수3,832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56) 드레퓌스 대위 군중심리에 묻힌 ‘불편한 진실’
- 드레퓌스 대위 사건은 유대인에 대한 유럽사회의 인식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유대 사회의 시오니즘 운동에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사진은 당시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가 L’Aurore 지에 실었던 ‘나는 고발한다’(J’Accuse)의 원문.
1894년 12월, 프랑스 파리의 군사관학교 군사법정. 초췌한 모습의 유대인, 드레퓌스가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재판장이 판결문을 읽어 내려갔다.
▲ 이름 :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 직책 : 프랑스 포병 대위 ▲ 근무처 : 군 최고 사령부 참모본부 ▲ 나이 35세(1859년 10월 9일생) ▲ 죄목 : 문서 위조 및 국가 기밀 유출…. 잠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재판장의 차가운 선고가 드레퓌스의 머리 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떨어졌다.
“유죄!”
종신형이었다. 계급장과 제복의 단추가 떨어져 나갔다. 차고 있던 칼도 그 자리에서 회수됐다. 드레퓌스는 곧 법정 밖으로 끌려 나왔다. 재판 결과를 지켜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 외쳤다. “드레퓌스에게 죽음을! 유대인에게 죽음을!”
끌려 나가던 드레퓌스 대위가 외쳤다.
“전 죄가 없습니다. 결백합니다. 프랑스 만세! 프랑스군 만세!”
그러자 군중은 오히려 드레퓌스를 향해 야유를 퍼부었다. 이 재판 모습은 당시 110만부 발행부수를 자랑하던 「르 쁘띠 쥬르날」지(紙) 등 각 언론매체에 생생히 보도됐다. 프랑스 국민들은 분노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동족인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었다. 그의 전력 때문이다.
실제로 유대인 드레퓌스는 한 번도 자신이 프랑스인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상대대로 프랑스에서 살아온 탓도 있었지만, 그는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11살 때 비스마르크의 독일(프로이센)과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가 벌인 전쟁을 지켜보면서 애국심을 불태운 그는 자진해서 군에 입대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유대인 최초로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10년 만에 참모본부 대위로 진급할 정도로 모든 열정을 바쳐 군복무에 임했다.
그러던 그가 독일에 기밀 정보를 팔았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고, 악명높은 ‘악마섬’으로 유배된 것이다. 파리의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정보 서류의 필적이 드레퓌스의 필적과 비슷하다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가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혐의를 거두려 하지 않았다.
드레퓌스는 이중적으로 이방인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났다.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마지막 수업」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알자스 지방은 프랑스와 독일 국경에 위치한 탓에 국적이 불분명한 곳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지금도 “나는 프랑스인도, 독일인도 아니다. 나는 알자스인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언어도 프랑스어를 쓰지 않는다. 여담이지만 이 알자스의 중심지인 스트라스부르에 현재 유럽 통합의 상징인 유럽의회장이 자리 잡고 있다.
어쨌든 드레퓌스는 프랑스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 게다가 그는 유대인이었다. 프랑스는 한 유대인 이방인을 제물로 삼아, 종신형이라는 굴레를 씌운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4년 뒤, 진범이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군 당국은 진범을 의도적으로 무죄 석방했다. 게다가 드레퓌스가 억울하다고 주장하며, 물증까지 내놓았던 중령까지 투옥시켰다. ‘유대인인데 뭐 어때’였다. 대중 심리도 드레퓌스의 무죄 판결을 못마땅해 했다. ‘이 기회에 유대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가 대세였다.
당대의 최고 인기 작가 에밀 졸라(Emile Edouard Charles Antoine Zola, 1840~1902)가 이에 격분한다. 유명한 ‘나는 고발한다(J’Accuse)’(1898)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에밀 졸라의 글은 반유대주의의 불씨를 지피는 역할을 했다. 낭트와 낭시, 보르도 등 프랑스 전역에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당국은 주모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체포하지 않았다. 이런 대중 심리를 반영한 듯 프랑스 의회는 서둘러 졸라를 기소했고, 그해 7월 베르사유 중죄재판소는 졸라에게 군법회의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징역 1년에 벌금 3000프랑을 선고했다. 졸라는 영국으로 망명해야만 했다.
하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프랑스 사회가 양분됐다. 사회당과 급진당 등 드레퓌스 지지파는 인권동맹을 결성했고, 국수주의자, 군부, 민족주의자 등 반(反)드레퓌스파는 프랑스 조국동맹을 조직해 응수했다. 가톨릭교회도 반드레퓌스파를 지지하는 입장에 섰다. 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진실은 승리하는 법. 팽팽하던 저울추가 드레퓌스파 쪽으로 기울었고, 드레퓌스는 1906년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판결을 받고 복권됐다. 드레퓌스파의 승리였다. 드레퓌스가 감옥에 갇힌지 12년만의 일이다.
모든 갈등은 씻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드레퓌스의 무죄 판결이 엉뚱하게도 반유대주의의 확산으로 이어진 것이다. 당시 상당수 프랑스인들은 드레퓌스가 진범이었다면, 그나마 유대인에 대한 동정심을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12년에 걸친 논쟁에서 드레퓌스가 승리하자 대다수 프랑스 군중은 오히려 유대인들을 더 밉상으로 보기 시작했다. 이처럼 유대인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회 분위기는 당시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좁은문」의 작가 앙드레 지드(Andre Paul Guillaume Gide, 1869~1951)의 「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오늘날 프랑스에는 프랑스 문학이라 할 수 없는, 유대인 문학만이 존재하고 있다.”
이 드레퓌스 대위 사건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충격은 엄청난 것이었다. 드레퓌스가 유죄냐 무죄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사건 이후 그들은 나라와 국가에 등을 돌린다.
“우리 유대인들은 프랑스와 독일 등 각자 살고 있는 곳에서, 수백년에 걸쳐 충성을 바쳤지만 결국 돌아온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나라에 충성해도 나라는 우리에게 간첩이라고 말한다.”
유대인들 내부에서부터 새로운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약속을 새삼 기억해 낸다.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만의 나라를 건국하자는 시오니즘운동이 그것이다. 유대인들의 눈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향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신문, 2010년 4월 18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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