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경] 유대인 이야기58: 목놓아 쏟는 통곡의 전주곡 - 2차 대전 발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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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5-02 | 조회수3,818 | 추천수2 | |
[유대인 이야기] (58) ‘목놓아 쏟는 통곡’의 전주곡 2차 대전 발발 … ‘쇼아(대재앙)’ 점차 현실로
-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 1933년 1월 30일,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단 한 번도 운적이 없다는 히틀러가 독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됐다.
사람들은 흔히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알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을 일컫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그리스도교 유럽 사회가 선택한 표현이다.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히브리어인 ‘쇼아’(ha-Shoah,?????)라는 말을 쓴다. 홀로코스트는‘신에게 바쳐진 제물’‘불에 타버린 번제물’이라는 어원에서 나왔고, 쇼아는 ‘대재앙’을 의미한다.
1933년부터 1945년 1월 27일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대인 포로수용소가 해방될 때까지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되었는데, 이는 인간의 폭력과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적인 사건으로 꼽힌다.
유럽사회는 이러한 치욕을 그대로 드러내는 ‘쇼아’라는 말보다는 ‘번제물’이라는 고상한 의미를 지닌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유대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쇼아’라는 말이 더 적절하다. 말 그대로 대재앙이었다.
그 뿌리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로 거슬러 올라간다. 패전국 독일은 1919년 6월 28일 파리 베르사유 궁전에서 연합국과 조약을 맺는다. ‘베르사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이 그것이다. 이 조약으로 인한 독일의 피해는 막대했다. 일본이 훗날 전후 보상 과정에서 입었던 미미한 피해와는 대조적이다. 독일은 식민지를 잃었고, 알자스 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으며, 자국 영토도 잃었다. 국토 면적은 13%, 인구는 10%가 줄었다. 일본은 패전 후 자국 영토도, 국민도 잃지 않았다. 또 독일은 전쟁 도발의 책임으로 연합국에 막대한 배상을 해야 했고, 이로써 경제가 급속히 악화됐다. 게다가 1929년 미국발 경제 공황은 독일 경제를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절망의 나락으로 내몰았다. 독일인들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쥐도 구석에 몰리면 무는 법이다. 연합국은 마지막 숨통은 조이지 말았어야 했다. 궁지에 몰린 독일 국민들은 이제 ‘될대로 되라’식이 된다.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응어리진 마음을 확 풀어줄 정치를 요구했다. 전쟁 이전만 해도 독일은 유럽에서 가장 법이 잘 지켜지던 국가였다. 하지만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렸다. 이제 독일은 폭력이 만연한 국가가 된다.
이런 와중에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 일어난다.
미국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가 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세계 최초로 아이스크림 콘이 발명되고, 한국의 고은 시인과 일본의 125대 아키히토 천황이 태어나던 그 해였다.
1933년 1월 30일, 스스로 “어머니를 땅에 묻은 이후 단 한 번도 운적이 없다”고 말한 그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독일 제국의 총리로 임명된다. 유대인에 대한 강한 개인적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는 국민들의 울분을 해소할 대상으로 유대인을 이용했다. 유대인을 제거해야 한다는 연설은 전후 비참한 독일의 속죄양을 찾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순진했다. 쾰른에서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던 한 유대인 상인은 악화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태평스럽게 이런 말을 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독일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도 독일인입니다. 우리는 우리에 대한 독일인의 신의를 믿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의 생각은 달랐다. 일부 유대인들이 운영하던 매매춘 사업과 당시로선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았던 매독(syphilis)을 연결시켜 유대인들이 게르만 민족의 혈통을 타락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이 성적 접촉을 통해 독일 민족을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선동이 독일 국민들에게 통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는다.
이런 가운데 1935년에 유명한 뉘른베르크 법이 제정된다. 유대인 학살의 최초 법적 근거가 된 이 법은 독일인과 유대인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법이었다. 이 법의 전문은 독일 혈통의 순수성을 독일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법 내용을 보면 기가 막힌다. 1조 1항에서는 독일인과 유대인의 결혼을 금지했다. 독일내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의 결혼도 무효화했다. 독일인과 성관계를 가진 유대인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다. 성관계를 맺은 독일인도 3개월 동안 정신 교육을 받아야 했다. 4조 1항은 점입가경이다. 이 조항은 유대인이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을 금지했다. 법을 어긴 자는 강제노동형에 처해졌다. 유대인은 더 이상 독일 국민이 아니었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간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도 독일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모든 유대인 남자는 공식 문서의 이름과 성 사이에 ‘이스라엘’을, 여자는‘사라’를 써 넣어야 했다. 유대인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10월에는 모든 독일 유대인의 신분증이 회수됐다.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수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인접한 폴란드로 피난길에 올랐다. 하지만 폴란드는 국경을 열어주지 않았다. 1만 5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국경에서 노숙을 하며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엄청난 사고가 터진다. 17세의 한 청년 유대인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참사관을 살해한 것이다. 독일의 유대인 학대에 대한 한 젊은 청년의 항거였다. 하지만 이 사건은 독일에게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할 핑계거리로 작용했다. 1938년 11월 9일과 10일 이틀 사이에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었던 수백여 곳의 회당이 불에 타고, 8000여 곳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했으며, 2만 5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갔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게 된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공격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포성이 폴란드를 뒤흔들었다.
그 포성은 목놓아 쏟는 통곡(cry unrestrainedly)의 전주곡이었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2일, 우광호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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