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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경] 유대인 이야기62: 중동전쟁 - 아랍 연합군과 4차례 전쟁 모두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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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5-31 조회수3,801 추천수2

[유대인 이야기] (62) 중동전쟁


아랍 연합군과 4차례 전쟁 모두 승리

 

 

국제사회는 냉혹하다. 이스라엘은 냉혹한 국제사회살이를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의지로 극복해 나갔다. 사진은 군사훈련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의 여성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이다. 살기(殺氣)를 가득 담은 거대한 물결이었다. 1948년 5월 15일. 북쪽에서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동쪽에서는 요르단과 이라크가, 남쪽에서는 이집트가 공격해왔다.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역사적으로 이제 갓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작은 국가가 5개 연합국의 작정한 군사 공격을 막아낸 사례는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아랍 연합군은 개전 초기 예루살렘 구(舊) 도심을 점령했을 뿐 이후에는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아랍 연합군은 의외의 상황에 당황했다. 병력과 화력에서 단연 우세였다. 그래서 전쟁 개시 2~3일이면 이스라엘이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릴 줄 알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강했다. 군대가 강했던 것이 아니었다. 시민들이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총을 들고 나와 결사 항전했다. 20일 넘게 진행된 전쟁에서 유대인들은 결국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최대 도시인 텔아비브를 지켜냈다.

 

상황이 반전되자 겁을 먹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아랍 연합군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스웨덴의 중재로 6월 11일에 한 달간의 휴전이 타결됐다. 이 한 달이 이스라엘에게 숨통을 열어주었다. 유대인들은 미국의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고, 체코와 프랑스를 통해 수많은 중화기를 손에 넣었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예전의 오합지졸이 아니었다. 민간인들의 저항에도 고전했던 아랍 연합군이 어떻게 중화기로 무장한 정규군을 이겨낼 수 있겠는가.

 

이제는 거꾸로 이스라엘이 공세로 나섰다. 이집트 카이로, 요르단 암만, 시리아 다마스커스를 폭격해 승리를 거뒀고, 아랍 연합군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렇게 1949년 2월에 평화 조약이 체결됐다. 역사는 이 전쟁을 ‘제1차 중동 전쟁’ 혹은 ‘이스라엘 독립 전쟁’으로 부른다.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의 힘으로 명실상부한 독립을 이뤄냈다. 게다가 팔레스타인 영토의 70%를 점령했고, 팔레스타인인 100여만 명을 추방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 하지만 전쟁은 끝이 아니었다. 1차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규모 정규전은 4차례 더 일어난다. 이중 3차 전쟁인 ‘6일 전쟁’이 가장 유명하다. 여기서 6일의 의미가 크다. 그 6일이 중동의 지도를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기 2년 전(1967년), 중동지역엔 다시 위기감이 고조됐다. 아랍인들은 전쟁에 졌다고 해서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이젠 게릴라전이었다.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활동으로 1차 전쟁 후 7년간 1300여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다. 이에 유대인들은 보복으로 대처한다. 1967년 4월 게릴라의 본거지였던 시리아에 대해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아랍권이 다시 한 번 결속했다. 이집트가 전쟁에 개입했으며, 시리아와 요르단도 속속 참전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봉쇄작전에 돌입했다. 이스라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축구경기에서 해설자가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967년 6월 5일은 이스라엘 공군 입장에서 볼 때, 역사상 최고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이스라엘 공군은 보유한 전투기 대부분을 출동시켰다. 목표는 이집트 공군기지. 이 기습작전을 통해 이집트 전투기 309대를 파괴했다. 이집트 공군력이 괴멸됐다. 이스라엘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루 뒤에는 시리아와 요르단, 이라크의 공군기지를 급습, 400여 대의 전투기를 파괴했다. 이제 하늘은 이스라엘 독무대가 됐다. 이후 이스라엘은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불과 3일 만에 이집트군을 격파하고 시나이반도와 가자지구를 점령했다. 골란고원을 빼앗고 다마스커스 인근까지 진격해 요르단 통치하에 있던 예루살렘 구(舊)도시까지 탈환했다. 이에 유엔이 6월 6일 즉시 정전을 결의했고, 쌍방의 수락에 의해 6월 9일 정전 협정이 이뤄졌다.

 

유대인들은 환호했다. 이스라엘의 땅은 예전보다 더 넓어졌다. 아랍의 각 나라들은 괜히 이스라엘에 시비를 걸었다가 자신들의 땅마저 빼앗긴 꼴이 됐다. 아랍 각 국은 땅을 쳤지만 전쟁에 졌으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후 아랍 연합은 이를 갈며 보복을 다짐한다. 싸울 때마다 졌으니, 자존심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다. 그해 10월 5일 이집트가 기습적으로 선제 공격한다. 이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아랍 연합국에 사용하던 방법이었다. 당시 이집트군의 병력과 무장을 보면 이집트가 얼마나 와신상담했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이집트군의 병력은 75만에 달했으며 탱크만 3만 2000대였다. 게다가 소련제 미사일(SA-6)과 최신예 미그기까지 갖췄다.

 

반면 이스라엘의 병력은 이집트군의 3분의 1도 안됐다. 탱크와 화포도 이집트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다. 결국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군 17개 여단이 전멸했다. 18일간 벌어진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약 2500명의 전사자와 7500명의 부상자를 냈다. 당시 인구 300만 남짓하던 이스라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손실이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다시 유랑의 길로 떠돌아야 하는 운명으로 보였다. 이때 이스라엘을 살려준 것이 미국이다. 닉슨 대통령의 미국은 이스라엘에 군수물자를 제공하기 위해 무려 5600회에 이르는 비행 수송 작전을 전개했다. 결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을 통해 반격에 나섰고, 골란고원 전투에서 시리아군 탱크 867대, 차량 3000대 이상을 파괴하는 등 전세를 뒤집어 결국 전쟁에서 승리했다.

 

국제사회는 냉혹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는 공자와 맹자의 유가(儒家)가 의미를 지닐 수 있지만,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는 한비자의 법가(法家)가 더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이스라엘은 냉혹한 국제 사회살이를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의지로 극복해 나갔다. 1972년 뮌헨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테러단이 이스라엘 선수단을 습격해 10여 명의 선수를 살상하자, 특수 부대를 만들어 무려 10여 년 동안 범인들을 추적해 모두 사살하는 집요하고 무서운 면을 지닌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을 미워하는 사람은 많아도 이스라엘을 우습게 보는 이는 거의 없다.

 

하지만 휘어지지 않는 큰 나무는 늘 바람을 정면으로 맞는다. 이스라엘은 이후 팔레스타인의 무장봉기, ‘안티파다’(벗어남, 유대인 지배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와의 지루하고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게 된다.

 

[가톨릭신문, 2010년 5월 30일, 우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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