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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묵상: 마태 5,43-48, 예수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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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06 조회수3,478 추천수2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5,43-48, 예수님 마음

 

 

아버지와 아들

 

언젠가 교구 사제 연례피정 때였습니다. 강의를 해주셨던 한 은퇴 주교님께서 한국 사람들의 아버지에 대한 분위기를 말씀하시며 당신 부친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주교님의 아버님께서는 주교님이 한국에 선교사로 오실 때부터 당신이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를 읽는 것이 하루의 일과이고 기쁨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 표현력이 풍부하셔서 그런지 아버지에 대한 따뜻한 감정이 우리에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라고 표현하는 것이 사랑으로 자연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수십 년을 지내신 주교님께서는 한국 사람의 ‘아버지’ 에 대한 인상을 솔직하게 표현하셨는데 ‘아버지’라는 말에서 오는 친밀감보다는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거리감으로 느껴진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요즈음의 젊은 부부들은 과거 우리와는 달리 아이들에게 지극히 정성을 쏟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아버지는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을 위해서 어떻게 하면 그 어려움을 도와줄까 생각하다가 함께 낚시를 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시간에 아버지는 처음으로 아들의 고민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 뒤에도 아버지에게 다가오는 아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작 함께해 주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고 했습니다.

 

또 한 아버지는 아들이 너무 숫기가 없고 약해 보여 백두대간을 함께 산행할 계획을 세웠답니다. 아버지는 직장 때문에, 아들도 학교와 공부 때문에 충분한 시간을 내지는 못했지만 가능한 주말에 시간을 함께 보내려 노력하였습니다. 산행을 하며 밤을 지새우거나 험한 구간을 지날 때에는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고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이제는 과거와 달리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는데 이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엄격한 전통적 사고와는 달리 부자지간의 사랑과 친밀한 관계를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당시 유다인들에게 ‘아버지’라는 이 표현이 어색하고 자신들이 믿어온 신앙에 위배된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과 관련시켜 예수님을 신성모독죄로 고발하기도 했습니다(요한 5,18).

 

예수님의 아버지에 대한 친밀감은 성경 여기저기에서 나타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라는 기도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철부지 두둔

 

예수님께서는 어느 날 문득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를 드리듯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와 철부지를 대비시켜 설명하시는데 일반적으로 ‘슬기로운 자’와 ‘지혜로운 자’는 긍정적인 의미의 현명한 이를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부정적 의미로 표현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이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말씀하신 ‘철부지’ 또는 ‘어린아이’는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 특히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주님의 제자들을 깔보거나 비하합니다. 그들은 제자들을 율법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무식한 부류로 취급하려고 합니다(요한 7,49 참조).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철부지인 이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표현하십니다. 수석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고, 또 성전에서 “다윗의 자손께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기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시며 그들을 옹호하십니다(마태 21,16). 어린이처럼 순수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유다인들의 멸시와 박해에도 예수님과 아버지이신 하느님과의 관계는 각별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순박한 어린 아이들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감사하시는 것입니다.

 

 

초대

 

제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에 개신교에 다니는 홀어머니와 어린 두 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6·25 전쟁 중에 가장을 잃고 그 어머니는 시내에 나가 사과 장사를 하였지만 그 집에서 가난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어머니는 날이 저물어서야 시장에서 돌아왔는데 저녁식사를 마치고는 날마다 두 아들과 함께 호롱불 밑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큰아들이 성장해서 군에 입대를 했다가 월남에 가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앰뷸런스를 탄 군인들이 그 아들의 유골을 어머니께 전달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다같이 마음 아파했고 그 어머니를 걱정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몇 날을 조용히 우시기만 하더니 늘 하던 대로 저녁마다 작은아들을 데리고 성경을 읽고 찬송가를 부르며 기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 가정을 바라보면서 슬픔도 컸지만 예수님께 대한 신앙의 힘에 큰 존경의 마음도 가졌습니다. 때로 그 집에 놀러갔다가 성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부족한 성경 실력을 느끼며 부끄러운 심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심정 때문에 사제가 된 뒤에도 성경 공부를 좀 더 열의를 갖고 하게 되었나 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표현하시고 당신의 멍에는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부과하는 ‘토라’의 613가지 복잡한 율법의 굴레를 한 마디로 요약한 ‘황금률’로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한편으로는 짐이라는 의미는 인생살이의 고달픔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삶의 아픔과 슬픔을 평화와 안식으로 바꾸어주시는 것입니다. ‘멍에’는 가축이나 동물이 짐을 끌게 하려고 등에 얹는 틀을 말합니다. 왜 주님께서는 당신의 ‘멍에’로 표현하셨을까요? 그것은 율법에 매여 허덕이는 백성들에게서 주님께서 그 짐을 벗어나게 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다양한 음식에 대한 엄격한 규제에서도 자유롭게 해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깔려있는 뜻이 있습니다. ‘멍에를 메고’라는 표현은 전통적인 유다인들의 표현으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누구누구의 제자가 된다’는 뜻을 지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며 삶의 참다운 기쁨과 가치를 배울 수 있다는 뜻도 되겠습니다.

 

 

온유와 겸손

 

예수님께서, 당신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주님의 멍에를 메고 당신에게서 배우라고 하십니다. 이 ‘온유’와 ‘겸손’에 대한 말씀은 이미 ‘참행복’의 가르침에서 제자들에게 주문하셨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신 길은 폭력이 아닌 겸손과 온유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달리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배타와 오만이 배어있는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자신들은 지키지 않으면서 남에게 짐을 지우고 힘들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꼭 유다교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본당신부를 하다보면 자주 듣는 질문이 있는데, 금육재에 관한 질문입니다. “신부님, 부활시기에도 꼭 금육재를 지켜야 하나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그럴 때마다 “금육재 대신 다른 선행이나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해도 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계속 대두되는 문제는 ‘할례’입니다. 유다교에서 개종한 신자들과 이방 세계의 사람들 사이에 갈등을 일으킨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실 할례는 유다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고대 근동지방에서 위생학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이었습니다.

 

나중에 유다인들이 이 할례에 종교적인 의무를 지우면서 고착화되었던 것인데 이것이 마치 유다인들의 신원을 나타내는 것처럼 발전해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습관화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노인이 되면 괴팍해진다는 얘기가 있는데 자기반성이 없으면 습관화된 것이 자기 것인 양 착각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강요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상황이 바로 오늘의 나의 상황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고치는 것은 자기반성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끊임없이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고 나서 보니 사도회원들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도회원들을 일일이 설득해서 일 년을 더 연장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지내면서 몇몇 믿을 만한 사람에게 신임 총회장과 임원으로 생각한 이 사람 저 사람을 추대하면서 공통적인 의견을 알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총회장은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기는 하되 너무 완고하거나 강한 사람은 모두가 꺼려하는 눈치였습니다.

 

참다운 신앙인은 우선 남을 편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온유와 겸손을 갖춘 신앙인이 참다운 일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새김

 

유월은 예수 성심 성월입니다. 예수님 마음에 대한 신앙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주님을 기리며 찬미하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똑똑하고 현명하다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으시고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찬미하십니다. 예수님의 겸손과 모두를 포용하시는 온유함을 묵상하는 달이기도 합니다.

 

한 러시아인이 쓴 “이름 없는 순례자”라는 저서에서 드러나듯 단순한 기도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순례자는 여기저기 다니며 기도하는 법을 배우려고 하지만 번번이 실망만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내심 영적 기도 “주 예수 그리스도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반복하며 바치는 기도 방법을 배우며 마음의 참다운 평화를 얻게 됩니다.

 

때로는 성당에서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레지오도 하고 묵묵히 본당의 궂은일도 도맡아 해주십니다. 어린이처럼 순수한 그분들을 바라보노라면 단순함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떠올리게 됩니다.

 

복사 시절에 배웠던 가장 좋은 화살기도는 “예수님, 사랑합니다!”였습니다. 세월이 이렇게 흐른 지금도 일을 하거나 길을 가다가 그 짧은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어른으로 배운 복잡한 어느 기도보다도 좋을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미 말씀해 주셨지만 참다운 신앙은 복잡하고 다양한 율법보다는 철부지의 단순함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을 아직도 배우고 있습니다.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6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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