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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복음 묵상: 마태 13,1-23, 가꾸어가야 할 하느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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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16 조회수3,090 추천수1

[정인준 신부의 복음 묵상] 마태 13,1-23, 가꾸어가야 할 하느님 나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마태오는 13장 1-9절에서 예수님의 비유 말씀을 소개합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와 비유 내용을 하나하나 짚으며 설명해 주십니다(10-23절).  그리고 가라지, 누룩, 보물, 그물의 비유를 이어서 하시고 끝맺으십니다(24-53절).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곳은 호숫가이고, 그곳 주위 환경에서 자연을 예로 들어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당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이야기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설명됩니다.

 

어떤 씨는 길바닥에 떨어졌는데 새가 와서 쪼아 먹고, 또 어떤 씨는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뿌리를 내리지 못 하고 곧 말라 죽어버렸습니다.

 

또 어떤 씨는 가시덤불에 걸려 제대로 자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 씨는 사람마다 다르게 뿌려져 결실을 맺지 못하거나 또는 많은 결실을 맺게 하는 것입니다.

 

13장 10-17절에서는 제자들이 주님께 이 비유에 대한 이유를 질문하는 형식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길바닥에 떨어진 씨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말씀을 깨닫지 못해 세상 가치에 휩쓸리는 사람으로 설명하시고(13,19), 돌밭에 떨어진 씨는 뿌리가 깊지 않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걸려 넘어지는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설명하십니다(13,20-21). 또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걸려 주저앉는 사람으로 표현하십니다(13,22).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하느님 말씀을 잘 깨달을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으로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내는 사람을 말한다 하셨습니다(13,23).

 

 

세상의 가치

 

우리는 흔히 임종을 앞두면 사람이 변한다든지, 모두 착한 사람으로 바뀐다는 말을 듣곤 합니다. 한번은 외국에서 사는 교포 한 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신자 한 분이 오랫동안 냉담을 하였는데, 그 가족에게 듣기로는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만 한국에 올 여유가 없으니 대신 그곳에 가서 냉담을 풀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알려준 병실로 방문을 했습니다. 복수가 차 이불 위로 불쑥 솟은 배는 대단했습니다. 외국의 한 교포에게서 연락을 받고 왔다고 하니까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이래저래 상황을 보다가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과 함께 이제는 임종을 준비하며 고해성사를 보고 냉담을 풀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소리 하려면 나가세요. 제가 죽긴 왜 죽어요? 어떻게 모은 돈인데, 돈은 얼마든지 드릴 테니 병만 고쳐주세요. 죽는다는 말을 하시려면 나가주세요!” 몇 차례 말을 건네 보았지만 “나가라.”라는 말만 반복할 뿐 전혀 받아들이지 않아 허전한 마음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그 자매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그 병원을 찾던 답답하고 허전한 심정이 떠오릅니다. 하기야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닫힌 사람에게서 모욕을 당하시는데 한 사제야 말하면 무엇 하겠어요?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13,23).

 

 

갈등과 하느님 사랑

 

장애를 가진 마리아는 우리 본당 신자입니다.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라는 병으로 몸도 제대로 가누기가 힘듭니다. 몇 차례 수술도 받았지만 걷는 것은 아직도 불편합니다. 장애가 있는 마리아이지만 밝고 순수한 마음을 간직한 데는 부모님의 사랑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날 마리아는 자기 딴에는 본당신부가 믿을 만했는지 “신부님, 제가 피정 중에 하느님께 편지를 썼는데 한번 보실래요?”라며 겹겹이 접은 종이를 내미는 것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장애로 살아오면서도 늘 밝은 표정이지만 ‘그동안 겪었을 많은 일들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 편지를 읽으며 ‘하느님께서 마리아에게 심어주신 당신 사랑, 곧 하느님 나라의 씨가 이런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글을 쓰는데 혹시 마리아 편지를 인용해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마리아는 “저와 같은 장애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고요, 또 제게 심어주신 ‘복음의 씨’가 소개된다면 기뻐요.”라고 말했습니다.

 

마리아의 해맑은 모습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장애인으로 갈등이 담긴 그 편지의 일부를 적어봅니다.

 

“저 하느님한테 궁금한 것도 많고 따질 것도 많아요. 무슨 응답이라도 좀 해주세요. 제가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태어났는지, 저를 어디에 어떻게 쓰시려고 창조하셨는지, 너무 궁금해요. (중략)

 

하느님도 아시다시피 특수학교에서는 내가 장애인인거 인식 못하고 살았는데 밖에 나오니까 중증 장애인이 돼버렸어요. 그걸 알면서도 인정을 못하는 거 같아요. 내가 장애인이라는 걸 인정하면 더 홀가분하게 살 것만 같은데 그게 아니라서 말할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다시 태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안 들어요. (중략)

 

하느님이 저한테 미안해서 제 주위에 좋은 사람들만 있게 해주신 것도 알아요. 그건 감사해요. 하지만 앞으로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고 원망이 더 많을 거 같아요. 저를 아직 데려가고 싶지 않으시면 자신감 있게 살아가게 해주세요. 나를 인정하라고 하느님이 그랬잖아요. 영혼은 멀쩡하다고, 그러면 잠깐이라도 그 잠깐만 살다가 갈 테니까, 그때는 이쁘게 받아주세요. 하느님, 정말정말 사랑해요.”

 

마리아의 글을 읽으며 한 알의 씨앗이 어두운 흙에 묻혀서 힘들게 하느님 나라의 싹을 돋게 하는 과정을 생각해 봅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과 함께 마리아가 용기를 갖고 이 세상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하게 합니다.

 

 

씨앗과 가라지

 

본당에 와서 거의 폐허가 되어버린 한 공소를 몇 차례 방문하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언덕에 있는 공소는 멀리서 보면 그림처럼 아담한 모습이었지만, 나무와 풀들을 헤치고 어렵게 올라가 보니 유리창문은 낡고 지붕은 내려앉기 직전이었습니다.

 

성당 안의 십자가와 십사처 그림들은 낡기는 했어도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아보니 몇 십여 년 전에 구호물자가 나오던 시절 외국 신부님이 이곳에 와서 신자들과 함께 흙벽돌을 찍어, 일일이 손수 날라 지은 성당이라고 합니다.

 

그곳으로 시집을 와 50여 년을 사신 베로니카 할머니는 그 당시를 회상하게 해주셨습니다. 당시 백여 명의 신자가 있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표현이 이상하지만 ‘밀가루 신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 많던 신자들은 흩어지고 그 동네에 남아있는 신자들이 다 절에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당 자리가 묘자리로는 ‘명당’이라는 말에 교구청에 몇 차례 연락해서 팔라는 의향도 넣었다는 것입니다. 공소로 가는 통로가 사방이 막혀있는 맹지라 유일한 통로가 되는 그 집을 찾아가 성당보수를 위해 마당을 지나가도 되겠느냐는 요청을 조심스럽게 해보았지만 꺼리는 눈치를 보이다가 종래는 거절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도 과거에 성당을 다녔지만 이제는 절에 다닌다는 말을 하면서 웬만하면 선산으로 쓰려고 하니 싸게 팔라는 의중만 몇 차례 건넸습니다. 이런 ‘밀가루 신자’가 있는가 하면, 그 먼 곳에서 본당까지 미사를 나오며 신앙생활을 하는 몇몇 ‘찰신자’도 있습니다.

 

 

새김

 

‘씨’는 미래로 향하여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보면 가장 작고 실망스러울 정도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믿음에 대해서 가르치시다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는 말씀으로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그냥 씨도 작은데 그 가운데 가장 작은 겨자씨를 비유로 말씀해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삶을 보면 때로는 길바닥, 돌밭, 가시덤불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노력과 주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그 밭을 정리해서 좋은 땅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이스라엘에서 공부할 때에 한 동창신부가 예루살렘과 갈릴래아에서 몇 개월을 지내다 떠난 적이 있습니다. 그 친구는 텔아비브 공항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차창으로 펼쳐지는 사막을 바라보며 저에게 물었습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사막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약속하셨을까?”

 

몇 개월이 지나 다시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향하면서 그 친구는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두 달 동안 이스라엘 이곳저곳을 다니며 묵상과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이 이 사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왜 부르셨는지를 많이 생각했어.

 

그런데 깨달은 거 있지? 그것은 이미 있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초대가 아니라, 사막을 미래의 비옥한 땅으로 만들라는 것 아니시겠어? 사막같이 척박한 조건을 주님의 영성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풍부한 삶으로 만드는 것이 답이 아닐까?” 그 친구의 진지한 표정이 세월이 지난 지금 새삼스레 생각납니다.

 

우리는 살면서 현재의 ‘완전제품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 가꾸어야 할, 그래서 길바닥,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을 개간해서 ‘좋은 땅’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소중한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척박한 조건과 가라지가 유혹하고 우리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해도 이미 우리에게 심어진 말씀의 씨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며 끝까지 고통과 시련을 이기는 것이 바로 ‘신앙의 힘’이며 ‘하느님 사랑’이 아니겠어요?

 

* 정인준 파트리치오 - 교황청 성서대학에서 성서학을 공부하고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과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원주교구 총대리를 역임하고 지금은 제천 서부동성당 주임신부로 있다.

 

[경향잡지, 2010년 7월호, 정인준 파트리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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