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바오로 서간 해설4: 예수 박해자에서 둘도 없는 추종자로 | |||
---|---|---|---|---|
이전글 | 이전 글이 없습니다. | |||
다음글 | [성경]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경 주석과 신학-제12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4차 전체 ... |3|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4 | 조회수2,832 | 추천수1 | |
[유충희 신부의 '바오로 서간' 해설] (4) 예수 박해자에서 둘도 없는 추종자로
교회박해
바오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인물이다(갈라1, 13. 23; 1코린 15, 9; 필리 3, 5~6). 그는 유다인 가정에서 태어나 율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에 몰두한 사람인지라 당연히 율법을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방편으로 여겼다.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에 이르는 다른 길, 곧 예수를 믿으면 율법 없이도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의 이와 같은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에 그리스도교를 몹시 박해했다. 바오로에게 있어서 율법을 비판한 예수는 “저주받은 몸”(갈라3, 13)이지 결코 메시아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오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또 다른 이유는 십자가에 처형되신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 때문이었다.
유다인의 신앙에 따르면 부활은 하느님께서 마지막 날에 세상을 심판하실 때 일어날 미래의 사건이지 역사 한 가운데서 일어난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주장을 바오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오로는 스테파노를 돌로 때려죽이는 자리에서 다른 이들의 옷을 맡아주었다고 하며(7, 58~8, 1), 시리아 지방의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달려가기도 했다(9, 1~19; 22, 3~21; 28, 9~18).
다마스쿠스 사건
바오로의 생애는 크게 다마스쿠스 사건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구분된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으나 그 사건 이후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교회를 박해하러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 극적인 체험을 통해 사도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쓴 편지에서는 이 사건을 단지 몇 차례에 걸쳐 간결하게 언급했을 뿐이다(갈라1, 15~16; 1코린 9, 1; 15, 8; 필리 3, 12).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계시에 따른 것이고 자신이 한때 그리스도교를 박해했으나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을 자신에게 계시하신 후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에게 나타나신 것은 이방인 선교를 위한 하느님의 뜻이었다는 것이다. 한편 사도행전은 세 번에 걸쳐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사건을 매우 극적으로 상세하게 소개한다(9, 1~19; 22, 3~21; 26, 9~18).
이 보도에 따르면 바오로는 예루살렘 최고의회의 공문을 갖고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사건을 계기로 유다교인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바뀐 사실을 두고 바오로가 개종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나 이는 적절한 표현이 아니다. 개종(改宗)이라 하면 다른 종교를 수용하여 믿음의 대상을 바꾸었다는 말인데 사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하여 믿음의 대상을 바꾼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바오로가 다마스쿠스 사건 이전에 섬기던 하느님과 그 사건 이후에 섬기게 된 하느님은 같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것은 바오로가 그 동일한 하느님을 믿는 방식이었다.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 이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믿는 길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실천했으나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하여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길임을 깨닫고 그리스도인들의 선교활동에 가담했던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교는 다마스쿠스 사건이 일어날 당시 유다교의 한 종파였지 유다교에서 독립된 새로운 또 하나의 종교가 아니었다. 또한 교회에서는 바오로의 다마스쿠스 사건을 두고 바오로가 회개했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친다는 말인데 사실 바오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어떤 타락한 생활을 하다가 그것을 뉘우치고 개과천선한 사람이 아니었다. 율법으로 보자면 바오로는 흠이 없을 만큼 매우 열성적으로 완벽하게 살았던 사람이었다. 다만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사건을 통하여 율법에 따라 사는 삶이 무익하고 헛된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바오로는 필리피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3장 9절에서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한다.
[가톨릭신문, 2008년 3월 9일,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