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바오로 서간 해설31: 사랑 없으면 성령 은사도 소용없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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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4 | 조회수3,651 | 추천수2 | |
[유충희 신부의 '바오로 서간' 해설] (31) 사랑 없으면 성령 은사도 소용없어
2) 성령과 은사에 대한 바오로의 이해
바오로는 12장 1~11절에서 다양한 은사와 그 은사를 베푸시는 한 분이신 성령에 대해 언급했다. 은사는 은총의 선물로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표현이며 교우들에게 주어진 다양한 재능이다. 이러한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그 은사를 각 사람에게 주시는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다(4절).
또한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우리가 다양한 직분을 가지고 섬기는 주님은 같은 주님이시다(5절). 그리고 다양한 은사를 가지고 직분을 활용하여 하느님께서 이룩해 주실 일을 하는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시다(6절).
바오로 사도의 이와 같은 말씀을 보면 우리가 받은 은사, 곧 카리스마가 서로 다른 것은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총의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은사들 사이에는 다양성만 있을 뿐이지 결코 우열은 없다. 그것은 이 다양한 은사들의 원천이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우들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 다른 은사를 받은 이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바오로는 교우들이 받은 은사가 성령에 의한 것인지를 식별하는 두 가지 기준, 곧 그리스도론적 기준과 교회론적 기준을 제시했다. 그리스도론적 기준이란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하는 경우는 성령의 작용이고,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고 말하는 경우는 악령의 작용이라는 것이다(12, 3).
교회론적 기준이란 은사를 받은 이가 공동체에 유익을 끼치면 이는 올바로 행사된 은사이고, 반대로 공동체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이는 잘못 행사된 은사라는 것이다(14, 5. 12. 19. 26). 따라서 은사를 받은 이는 누구나 자기 자신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하며, 자신의 이익보다 공동체의 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3) 은사보다 사랑을 (사랑의 찬가)
코린토 교회는 소위 은혜를 많이 받은 교회였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이들과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이런 은사를 받은 교우들은 자신들이 받은 신령한 언어와 예언 은사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반면에 다른 교우들은 지혜, 지식, 병 고치는 일,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 최고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교우들은 그런 것들은 다 소용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다. 이로 인해서 교우들 사이에 싸움이 발생했던 것이다.
1코린 13장에 들어있는 사랑의 찬가는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다툼이 있는 공동체에 가장 필요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바오로는 13장 1~3절에서 사랑이 없으면 어떤 은사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세 번씩이나 강조한 후 4~7절에서는 교우들은 모름지기 사랑을 가진 사람답게 처신해야 한다고 노래했다.
사랑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인내, 친절, 겸손, 예의 , 무욕, 용서 등등 윤리적으로 뛰어난 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오로는 은사만능주의에 빠진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된 은사관을 바로 잡아주기 위해 사랑의 찬가를 전해주면서 은사와 사랑과의 관계를 언급했는데, 특히 8~13절에는 사랑의 찬가를 쓴 그와 같은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바오로는 13장 8절에서 사랑이 갖는 무한성과 예언. 신령한 언어. 지식의 은사가 갖는 유한성을 지적했다. 예언과 신령한 언어 그리고 지식은 하느님을 아는 데 나름대로 유익한 은사이지만 종말이 되면 사라지고 마는 반면에 사랑은 무한한 종말론적인 가치라는 것이다. 바오로는 은사들과 사랑 사이의 차이점을 세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했다.
9~10절에서 바오로는 지식. 예언은 나름대로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그것들은 하느님에 대해 부분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에 일시적이라고 했다. 따라서 온전한 것이 오면 그분에 대한 부분적인 것들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11절에서 바오로는 어린이와 어른을 대비하면서 어린이는 그 수준에 맞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데 만일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러한 행동 양태를 지닌다면 아무리 어른이 되었어도 어른으로 볼 수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눈앞에 보이는 일시적인 은사에 탐닉하는 것은 어린이의 모습이고 반면에 종말론적인 가치인 사랑은 어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8년 9월 28일, 유충희 신부(원주교구 백운본당 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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