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마르코 복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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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5 | 조회수6,280 | 추천수1 | |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1)
새해를 여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설레임과 기대로 가득차게 하나 보다. 거창하게 시작한 일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여 다시는 결심같은 것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달력의 첫 장을 열게 되는 새해가 되면 뭔가 심기일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게 된다.
올해의 시작을 가톨릭신문 독자들과 함께 ‘성경 말씀 나누기’ 코너를 통해 영적 여정을 걷기로 덜컥 약속을 하고는, 노심초사 두려운 마음이 앞선다. 장거리 여행을 질긋이 따라가지 못하고 도중하차하면 어쩌나, 지루하고 재미 없는 여행이 되면 어쩌나 하는 등등. 동방에서 별을 따라 물어물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을 동방박사들의 믿음과 용기가 부럽다.
외람되이 하느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귀중한 지면을 얻고도 부족한 나 자신을 돌아보면서 뜸을 들이게 된다. 어떻게 시작할까? 무슨 이야기를 할까? 성경에 대한 좋은 해설서는 얼마든지 많은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괜히 쓸데없는 말들로 해를 가리는 구름 노릇만 하는 것은 아닐까? 경전의 묘미는 모름지기 경전 자체를 두고두고 씹으며 좀 어렵더라도 읽고 또 읽어야 제 맛이 나는 것을…. 누구보다 나 자신이 그 사실을 잘 아는 처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하나라도 도움이 되는 분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이 위험한 작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나처럼 용두사미, 혼자서는 끈기 있게 초심을 지켜나가기 어려워 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차피 각자 필요한 은혜는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을테니. 성경을 읽는 즐거움은 무엇보다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오늘의 나에게 들려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이리라. 성경 속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들이며 죄인들이란 공통점을 갖는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을 믿었기에,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는 하느님의 이야기가 되었다.
성경 말씀을 읽기 전에 우선 나의 마음가짐과 주변을 살펴보면 좋겠다. 나는 나의 삶의 이야기를 신앙의 빛으로 비추어 하느님의 이야기로 읽어낼 준비가 되어있는가? 흔히들 성경를 읽는 단계를 나누어, 첫째 말씀을 듣는 단계, 둘째 말씀을 음미하는 단계, 셋째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단계, 넷째 말씀에 접해서 변화를 일으키는 단계로 말한다. 성경 말씀을 머리로 이해하는 단계에서 시작하여 가슴으로 느끼고 삶의 단계로 실천하기까지 저마다 서 있는 다르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과 신앙이 하나로 통합되어가는 것이어야지 별도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성경을 읽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전체적인 흐름과 핵심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경 전체를 통독하는 것이 필요하다. 성서는 여러 개의 단편이 ‘성서’라는 총서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동안 구약성경 전체를 성실히 읽어오신 분들께는 좋은 준비가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제 신약성경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을 좀더 깊숙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할 수 있게 초대해 줄 것이다. 신약성경의 내용들은 주일미사나 강론을 통해서 친숙하게 들어왔으니 말이다. 기도를 돕기 위한 성경 독서로 매일미사의 독서나 주일복음을 이용할 수도 있겠지만, 우선 네 복음서부터 한 권 한 권 차례로 읽어내려 가려고 한다. 성서 낱권의 흐름을 끊지 않으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자는 뜻에서이다.
우선 마르코 복음서부터 시작하겠다. 마르코 복음서는 복음서 중에서 가장 일찍 씌어졌고 역사적인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따라가기에 적합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마르코 복음을 좋아하는데 투박하면서도 군더더기가 없어 나자렛 예수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따라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다음으로는 루카 복음서와 마태오 복음서를 읽어갈 터인데, 이 두 복음서를 다룰 때는 마르코 복음서에서 다룬 부분은 생략하고 루카와 마태오의 특징적인 부분에 집중하여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 다음으로는 요한 복음서를 다룰 터인데 앞의 공관복음서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를 묵상하게 할 것이다.
필자가 해야 할 일은 누군가 좋은 지향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성경을 읽고자 하는 분들께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될 것이다. 매주 숨을 고르고 성경을 좀더 깊이 읽을 수 있도록 짧은 설명을 붙이며 한 주를 기도로써 새로이 시작할 수 있도록 채근하는 몫이 될 것이다. 기도 여정의 동반자라고 할까? 기도 친구야말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좋은 몫이 될 터이니 나 자신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시작해 보고 싶다. 바쁜 일상으로 하느님께서 거저 주시는 무한의 은총을 낭비하지 않도록 말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1월 1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2)
새해부터 한국 천주교회 전체가 새 번역 「성경」을 공인본으로 사용하고 있다. 삼십 여 년 간 사용하던 ‘공동번역 성서’가 전부라고 생각했던 분들은 성서가 바뀐 것에 대해 자못 염려가 많으시다. 그럼 지금까지 사용했던 성서는 어떻게 한담?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이 참에 몇 가지 번역본들을 비교하면서 읽다 보면 성서 본문의 의미가 더욱 생생하게 전해질 것이다.
새 번역 ‘성경’은 주교회의 성서위원회가 주관하여 고 임승필 신부님을 주축으로 히브리어로 씌어진 구약성서와 그리스어로 씌어진 신약성서를 거의 15년에 걸쳐 새로 번역한 것으로, 원문의 뜻을 좀더 살리고, 교회 전례에 사용할 수 있도록 수려한 현대 우리말로 다듬은 것으로, 한국 천주교회의 권위로 선포한 공인본 번역 성서인 셈이다.
사실 성서는 원래 원본이라는 것이 없이 여러 개의 성서 사본(寫本)들이 낱권으로 전해져 오던 것을 교회가 신앙과 실천의 규범으로 인정될 만한 책들이라고 의견을 모아 교회의 권위로 정경(正經, canon)으로 공표한 책이다. 서방교회에서 신약성서 정경으로 27권의 문헌이 확정된 것은 서기 4세기 말에 이르러서였다.
정경으로 인정하는 기준은 첫째가 사도성으로, 사도들로부터 유래된 것이어야만 교리의 확실한 출처와 순수성이 보증된다고 보았다. 둘째 원칙은 보편성인데, 중대한 문제에 대해 교회 전체가 오류에 빠질 수 없다고 믿었던 것이다. 셋째는 영감성의 문제인데, 교회가 신약성서의 영감성을 주장하는 근거는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의 힘으로 전승된 문헌들의 영감 여부를 직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가 ‘하느님의 계시’로 받아들인 책들이다.
성서 저자와 텍스트, 오늘날의 독자가 함께 공명하는 성서 해석
복음서를 읽다보면, 이 책이 지금으로부터 1900년도 더 전에 씌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 적절한 비유들, 짜임새 있는 구성에 놀랄 때가 많다. 그런가 하면 지리적 배경이나 풍습, 역사·사회적 상황 등이 하도 생소하여 도무지 현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도 있다.
현대의 독자들이 우리 앞에 놓인 성서라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성서 저자들의 세계, 곧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비롯해서 성서의 내용을 기록하게 된 배경과 그 의도를 살펴야 한다. 성서는 오랜 구전 전승과 기록 전승의 과정을 거쳤고, 그 안에 다양한 문화적,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부터 200여 년 간 서양 성서학을 이끌어 왔던 역사 비평적 방법론은 바로 이러한 ‘성서 뒤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된 것인데 우리 나라에 소개된 대부분의 성서해설서들은 이러한 방법론의 성과물이다.
그런가 하면 성서 텍스트를 깊이 이해하려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문학 텍스트로서의 성서 자체, 곧 ‘성서 속의 세계’에 푹 빠져 들어가야만 한다. 성서 저자들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그 이야기를 듣는 독자들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일정한 문학 양식과 언어 법칙을 취했기 때문이다. 또한 원저자의 본래 의도가 무엇이든, 일단 문학 작품이 완성되어 출판되면 그 글은 원저자와 별도로 독자성을 갖게 되므로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오로지 그 작품 속에서 발견해야 된다. 1960년대 이후 프랑스 성서학계에서는 이러한 신비평 이론을 수용하여 여러 가지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하였다.
한편,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으로 지금 나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성서 작가와는 전혀 다른 문화적.사회적.역사적 상황에 놓여 있는 ‘나’ 또는 ‘우리’, 곧 독자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1980년대 이후 성서학계에서는 탈근대주의(post-modernism)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성서 본문의 의미를 찾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서 앞의 세계’, 곧 성서를 지금 읽고 해석하는 독자라고 말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대체로 제3 세계의 신학자들이다.
이렇게 현대에는 다양한 성서 연구 방법론들이 전개되고 있지만,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성서를 읽을 때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여 입체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성서 저자와 성서 텍스트, 성서를 읽는 독자가 서로 공감하고 서로의 이해 지평을 맞춰갈 때라야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넘어서 정확한 해석 작업을 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성서연구방법론은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초보자를 위한 성서 연구 방법의 실제를 제시한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2001, 생활성서사)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가톨릭신문, 2006년 1월 8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3)
우리는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과, 복음으로 선포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복음서가 우리에게 전달된 순서는 거꾸로이다. 먼저 예수 사건이 있었고, 그 다음이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다음으로 복음서가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서를 읽을 때는 신앙으로 해석된 예수 이야기, 시기적으로는 예수 시대와 초대교회를 동시에 만나게 된다.
복음서는 현대의 창작물처럼 한 사람의 작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써 내려간 책이 아니다. 복음사가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전해져 온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공동체를 대표하여 기록하였을 뿐이다. 그러니 복음사가는 예수님에 대한 전기작가나 창작자가 아니라 여러 가지 전승을 일관성 있게 편집한 편집자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서에는 복음사가가 몸담고 있던 공동체의 체험과 관심사가 담겨 있다.
네 복음서는 적어도 40~70년 가까운 전승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데, 가장 먼저 쓰인 마르코 복음서가 서기 70년 경에,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가 80~90년 경, 요한 복음서가 100년 경에 편집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복음서가 형성된 단계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역사적 존재로서 이스라엘이라는 구체적 공간과 특정한 시간 안에서 현존하신 시기이다. 예수께서는 서기 27~30년경 갈릴래아 주변에서 주로 활동하시다가 30년 4월 7일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셨다. 예수 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셨고, 제자들을 불러 가르치셨고 그들과 함께 생활하셨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가르치셨을 뿐 어떤 기록도 남기지 않으셨다.
두 번째 단계는 예수님을 직접 목격하고 함께 생활한 제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전달하는 단계이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먼저 유다인들에게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설교하였고, 새 영세자들을 가르쳤으며, 전례, 특히 성체성사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찬미하였다. 아직 이 단계는 기억이 생생하고 글로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던 구전 시기였다.
그 다음 단계에 이르러서야 복음서를 쓰기 시작하는데, 이 단계는 직제자가 활동하던 시기보다는 그 후의 단계로 전승의 발전과정 중 맨 마지막에 해당된다. 예수 사건의 직접 목격자들이 사라져 갈 무렵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할 필요가 생겨났고, 개종자들이 몰려오게 되자 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책이 필요하게 된 다. 또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한 것과 달리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복음 메시지를 기록할 필요성이 커져 갔던 것이다.
숲을 보며 상상력 키우는 독서
이제 더 지체하지 말고 마르코 복음서 읽기에 들어가야 할 것 같다.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 전체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복음서 전체를 통독하는 것이 가장 우선되는 작업일 것이다. 전체가 16장밖에 안되는 짧은 책이기 때문에 복음서 전체를 읽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소설책처럼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 종류의 책은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여 천천히 숙독하여야만 이해할 수 있는, 같은 분량의 다른 책에 비하면 훨씬 밀도가 높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상세한 독서에 앞서 숲 전체를 바라본다는 느낌으로 마르코 복음서 전체의 그림을 그려보는 것이 좋겠다. 성경을 읽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있는 그대로 선입견 없이 나의 맑은 눈으로 읽지 않고, 어디선가 들었던 지식이나 이미 갖고 있던 인상을 복음서에 투사하려는 태도이다. 성경은 죽은 책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그 누구도 의미를 장악할 수 없다. 자, 그럼 이제부터 성경이라는 책을 처음 접한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살며시 펼쳐보자. 그리고는 마치 주님께서 나에게 속삭이는 사랑의 음성처럼 들어보자. 한 주일 동안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읽어보면서 나름 대로의 소감을 정리해 본다면 그 무엇보다 보람이 클 것이다.
옆에 묵상 노트를 마련하여 생각나는 대로 솔직하게 적으면서 예수님과의 대화를 나눠보자.
1. 마르코 복음서 전체에서 받은 인상은? 2. 내게 가장 인상 깊었거나 흥미로운 대목은 무엇이었고, 이해가 안되는 대목은 무엇이었는가? 3. 마르코 복음서가 전해 주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하였는가? 4.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걷는 여정의 행보를 따라가 보며, 내가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였는가? [가톨릭신문, 2006년 1월 15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4)
한 주간 동안 마르코 복음서 전체를 통독했다면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꼭 나눔의 시간을 갖기를 권한다. 본당의 반모임이나 가까운 친지들의 모임에서 정기적으로 말씀을 나눌 수 있다면 혼자 배우고 느낀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방법은 소공동체 복음나누기 칠 단계나 렉시오 디비나 방식을 따라가도 좋겠고, 모임의 성격에 따라서는 아름다운 음악을 듣거나 명화 감상을 곁들이는 좀더 창의적인 방법을 계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의 약점 중의 하나가 신앙 모임에서조차도 하느님 이야기는 뒷전으로 하고 일상적인 대화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의 삶과 신앙을 통합하고 또 모임의 깊이를 더해 가려면 신앙 나눔을 일상화하고 우리의 삶을 예수님의 방식으로 바꾸어갈 수 있도록 서로를 격려하는 신앙훈련이 필요한 것 같다.
필자가 살고 있는 공동체에서도 주일 저녁이면 한 주간의 생활을 말씀에 비추어 영찰(映察, reflection)하는 나눔 기도의 시간을 갖는데, 식탁의 대화도 중요하지만 이 시간은 각자가 가꾸어가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 관계를 깊이 나누고 이해하는 데 더할 수 없이 귀중한 시간이 된다.
모름지기 그리스도교 신앙공동체의 구심점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장 큰 이웃 사랑은 각자가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느 봉쇄수녀원 원장 수녀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회원간의 친교와 이해를 높이기 위해 좋다는 심리학 강의나 프로그램들을 많이 해 보았지만, 렉시오 디비나 기도 방법을 실습하고 난 후만큼 깊은 대화와 서로에 대한 이해를 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사실 수녀원이라고 해서 천사들이 모인 것도 아닌데, 평생 함께 살아가면서 인간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이 왜 없겠는가? 그건 부모와 자녀, 부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적인 기대로 혼자 섭섭해 하고 끊임없는 걱정거리로 마음이 산란해지기보다는 우리의 허물과 약점들, 인간적인 한계 상황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시작
서두가 길어졌는데, 각자가 그린 마르코 복음서 전체의 그림을 펼쳐 보이기로 하자. 아마도 우선 마르코 복음서의 범위가 세례자 요한의 활약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공생활, 수난의 길과 십자가 죽음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는 아직 예수님의 유년기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고, 또 부활에 대한 기록(16, 9~20)도 후대에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지리적인 배경이 눈에 띄는데,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이 대립적 위치에 있음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여정에 따라 복음서의 구성을 전개한다면,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1, 1~13), 갈릴래아에서 전도를 하시고(1, 14~9, 50),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셔서(10장), 예루살렘에서 돌아가신다(11, 1~16, 8). 부활 후 천사가 예수님의 일행이 갈릴래아에서 다시 합쳐질 것이라고 예고한다(16, 7). 갈릴래아는 여러 민족들, 이방인들의 땅이다.
마르코는 ‘그리고’, ‘그리고 즉시(곧)’, ‘그러고 나서’라는 접속사를 자주 사용하는데, 이 말은 때와 장소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선 내가 하고자 하는 중요한 말은 다음에 있다는 듯이 서두르는 인상을 준다.
이 복음서의 최고 정점인 예수님의 수난사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처음 1~13장이 수난사를 향한 관문이라고 한다면, 14장에서 16장 8절까지는 수난사 자체이고, 나머지 16장 9~18절은 후대의 보충문으로 부활 이후의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 1)이라는 단정적인 서두가 말해주듯, 마르코 복음서의 주된 관심사는 “하느님 아들로서의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물음은 복음서의 끝부분에 가서야 명약관화(明若觀火)하게 밝혀진다.
이방인인 로마의 백인대장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15, 39)라고 고백하는 장면이야말로 마르코 복음서의 최고 정점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이해하려면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까지 항구하게 따라가야만 한다는 말이다. 자, 그럼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의 은혜를 청하면서, 다음 한 주간은 마르 1, 1~13의 여정을 떠나기로 하겠다. [가톨릭신문, 2006년 1월 22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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