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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약]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활동(마르 3,7-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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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5 조회수5,179 추천수1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11-25)

 

 

III.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활동(3, 7~8, 26)

 

앞서(1, 16~3, 6) 예수님께서 말씀과 행위에 있어 권위와 힘을 가지신 분이라는 점이 간략하게 제시되었다면, 이제부터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호숫가에서의 활동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론 예수님께서 앞으로 고통을 받으시고 분열과 적대를 가져오리라는 점이 조금씩 드러날 것이다.

 

 

1.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3, 7~12 호숫가의 치유)

 

예수님의 소문이 퍼져 각지에서 군중이 모여든다. 갈릴래아를 거점으로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아는 남쪽에, 요르단 강 건너편은 동쪽에, 티로와 시돈은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활 활약이 집약문으로 소개되면서,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을 집결하시고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치유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7절의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는 구절은 앞의 “외딴 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셨다”(1, 35)는 장면을 상기시키지만, 이제부터는 모든 일에 있어 제자들과 동행하며 동고동락하실 것이다(3, 13; 4, 10. 34; 6, 1).

 

11절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라는 고백은 마르코 복음 서두의 그리스도론적 주제(1, 1)를 상기시키지만, 다시한번 함구령(12절)을 발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수난하실 때까지는 그 누구를 통해서도- 귀신들이나 치유된 이들,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당신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당부하신다.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19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2. 열두 제자를 뽑으심(마르 3, 13~19)

 

예수께서 주로 활동하신 갈릴래아 호숫가는 푸르고 널찍해서 언뜻 보면 호수라기보다는 우리나라의 동해처럼 확트인 바다 같다. 마르코와 마태오 복음에서는 갈릴래아 바다, 루카 복음에서는 겐네사렛 호수, 요한 복음에선 갈릴래아 바다 혹은 티베리아 바다라고 일컫는다.

 

갈릴래아 호수는 해발 2814m나 되는 헤르몬 산의 눈이 녹으면서 담수가 요르단 강을 따라 흘러들어와 호수가 된 것인데, 가히 ‘생명의 바다’라 일컬을 만큼 이스라엘 전 지역의 물줄기 역할을 해서, 요즘도 호수가 오염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의 물이 요르단 강을 따라 남으로 흘러가다보면 사해까지 이르게 되는데, 더 이상은 물이 흐르지 않고 한 곳에 머물러 생물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된다.

 

같은 수원지의 물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계속 한 자리에 머물면 생명력을 잃게 된다는 것이 인생의 교훈인 것 같다.

 

마르코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주로 호숫가에서 군중을 가르치는 데 비해(2, 13; 3, 7~8; 4, 1~2; 5, 21), 제자들에게 중요한 일을 하실 때에는 군중에게서 떨어져 산으로 오르신다(3, 13; 9, 2; 14, 26). 열두 제자를 산에서 부르시고(3, 13), 기도하시려 산으로 물러가시고(6, 46) 올리브 산에서 떠나실 것이다(14, 26). 산은 예로부터 하느님의 계시가 이뤄지는 거룩한 장소로 표상됐다.

 

이제 열두 제자들을 부르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전략에 따른 것인데, 부르심의 주도권은 전적으로 예수님 편에 있다. “열둘을 세우시고”(14. 16)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열둘을 만드시고”가 되는데, 이는‘천지창조’와 같이 중요한 사건의 의미를 지니며, 일정한 곳과 일정한 때에서 일어나는 일회적 사건을 가리킨다. 열두 제자를 선정하신 이유는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14b~15절)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를 이루며, 존재와 활동으로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갈 것이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열두 지파는 이스라엘이 꿈꾸고 있던 종말론적 희망의 핵심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종말 구원의 때에 열두 지파를 총망라한 완전한 민족 부흥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대망하고 있었다.

 

예수님 당시 12지파 체제는 이미 사라지고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그리고 레위 지파의 절반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열두 제자의 임명과 파견은 종말의 모임을 상징하는 예언자적 표징행위로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돌입하는 하느님 나라의 능력을 드러냄으로써 이미 세말 이스라엘의 실존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G. 로핑크,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분도출판사, 1985, 24-27쪽).

 

열두 제자단의 구성을 보면 각양각색이다. 시몬 베드로, ‘천둥의 아들들’로 불리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시몬의 아우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요한 1, 45~49의 나타나엘과 동일인물로 여겨짐), 세리였던 마태오, 토마스(요한 복음에 자주 등장하는 의심 많은 제자로 쌍둥이라고 불림),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 이 중에서 안드레아와 필립보만이 그리스어식 이름을 갖고 있는데, 아마도 이 두 제자들은 주로 이방인들의 지역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예수님의 제자단에 세리였던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함께 있었다는 것은 최대의 적대세력이 단일 단체에 결합되었음을 보여준다.

 

당시, 세리들은 로마인들과 협력하고 있었던 반면에, 열혈당원들은 로마 점령세력이 하느님의 주권과 부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그들과 극도의 대치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파쟁과 당쟁으로 분산된 이스라엘을 재집결하여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모으실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14절)는 표현에서 초대교회의 숨결을 읽을 수 있는데, 원래 ‘사도’는 부활 후 그리스도교에 도입된 존칭어로 ‘예수 부활을 선전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동안은 제자들로 일컬어졌겠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1고린 15, 5) 그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삼아 파견하신 후부터는 사도들로 탈바꿈한다. [가톨릭신문, 2006년 3월 26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3. 베엘제불 논쟁과 예수님의 참가족 (마르 3, 20~35)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베엘제불이 들렸다느니,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느니 하며 시비를 거는 논쟁사화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친척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야말로 참가족이라고 말씀하시는 이야기 사이에 끼어서 나온다.

 

이러한 문체는 마르코가 자주 애용하는 기법으로(2, 1~12. 23~28; 5, 21~43; 10, 13~16; 11, 12~21; 14, 1~11), 마치 샌드위치처럼 상황어 - 상황묘사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을 맺음 - 를 양분하고 그 사이에 삽입문을 집어넣는 방식을 취한다.

 

이렇게 원래는 상관이 없었을 두 가지 이야기를 한 데 묶어 같은 대목(pericope) 안에 배치함으로써, ‘예수는 누구인가’하는 그리스도론 주제와 ‘예수의 참제자는 누구인가’라는 제자론 주제를 전략적으로 통합시켜 ‘예수님의 참가족’의 의미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악의 권세에서 해방시키시고, 치유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시는 갈라짐 없는 하느님 집안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제자직의 본질은 혈연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실행하는가에 있는 것이고 이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참가족이 된다. 그러면, 편의상 이 대목을 다시 둘로 나누어 살펴 보기로 하겠다.

 

베엘제불 논쟁(3, 22~30)

 

이해하기 좀 까다로운 본문인데, 그 안에 들어있는 다섯 가지 전승을 순차적으로 살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1.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비난한다(22a절).

2. 또 예수님께서 귀신들을 축출한 사실을 두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쫓아냈다고 모함한다(22b절).

3. 예수님께서 “한 나라이든 한 집안이든 갈라서면 망하기 마련이다”라는 상징어(24~25절)를 사탄의 조직에 적용하여(23. 26절) 적수들을 반박하신다.

4. 예수님(=더 힘센 이)께서 부마자(=재물)를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탄이나 귀신(=힘센 자)을 묶어 놓아야 한다고 당신의 구마행위를 상징적으로 설명하신다(27절).

5.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은 결국은 그분에게 작용하시는 성령을 모독하는 독성죄를 짓게 되는데,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28~29절).

 

예수님의 적수들이 예수님을 비방하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이승에서 활약하실 때 그분을 불신한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이제 성령이 작용하는 초대교회의 선포를 불신한다면 용서받을 길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성령의 시대(=교회의 시대)가 예수 시대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주장하고 있다(정양모, <마르코 복음서>, 분도출판사, 1981, 53쪽, 각주㉩).

 

예수님의 참가족(3, 20~21. 31~35)

 

예수님께서 어느 집 - 아마도 베드로의 집(1, 29; 2, 1. 15 참조) - 으로 가셨는데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과 제자들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3, 20).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데,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소문이 났던 것이다(21절). 이야기는 31절로 건너뛰어,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부르는 장면이 나오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혈연 가족을 넘어서 하느님의 새로운 가족을 이루셨다. 이들은 하느님에 의하여 자기 삶이 바뀌기를 원하는 사람들, 종말론적 전망을 가지고 ‘하느님 백성’으로 모이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단 본격적인 제자단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식하고 하느님 나라로 몰려드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성모님을 격하시키려는 사람들이 종종 이 대목을 이용하여 “이거 봐라”하는 식으로 예수님의 가족 관계 자체를 부인하려고 하지만,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가족 관계도 혈연의 차원을 넘어서 신앙 가족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각자가 하느님과의 관계에 충실할 때 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사랑과 믿음의 새로운 관계’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4월 2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4. 예수님의 비유와 가르침(마르 4, 1~34)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기 시작하신다. 그런데, 군중이 너무 많이 몰려 예수님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다(4, 1).

 

언뜻 보면 낮은 곳에서 언덕을 향해 외치는 것이 과연 전달이 잘 될까 싶은데, 기상학적으로 볼 때는 예수님께서 기상 여건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한다.

 

아주 날씨가 맑은 날 오후에는 기온 상승으로 인해서 소리가 높은 쪽으로 전달이 더 잘 될 뿐만 아니라 호수에서 산 쪽으로 부는 바람(해풍)에 의해 소리가 넓은 지역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한다. 요즘처럼 대중연설은 으레 대형 마이크에 의존하는 걸로 아는 세대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겠지만, 수만 명 수용 가능한 로마 시대 원형경기장만 보아도 얼마나 설계가 잘 되었는지 앞에서 육성으로 말해도 어디서나 잘 들리는 걸 보면, 각 시대마다 남다른 삶의 지혜가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 가르치실 때 주로 비유 양식을 많이 사용하시는데, 일상생활에서 흔히 발견되는 소재를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마르코 복음서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 1~9), 저절로 자라나는 씨의 비유(4, 26~29), 겨자 씨의 비유(4, 30~32), 무화과 나무의 비유(13, 28~29), 주인을 기다리는 문지기 비유(13, 34~36) 등 모두 ‘하느님 나라’라는 주제와 연결된 비유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4, 3~8)

 

비유 양식이 누구에게나 쉽게 이해된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지리적 배경이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워낙 생소해서 예수님 시대 상황을 어느 정도 알아야 하는 수고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비유의 핵심 내용을 못 알아듣는다는 뜻은 아니고, 그 곳 환경을 조금만 알면 훨씬 더 공감이 갈 것이라는 말이다.

 

팔레스티나 지역에선 4~10월 비가 거의 오지 않기 때문에 여름철 휴경기가 지나 11월 초순 첫 비가 내릴 때쯤에 밀이나 보리를 심게 되는데, 먼저 씨를 뿌리고 비가 온 후에 땅을 갈아엎는 방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이 비유의 초점은 ‘씨 뿌리는 사람’에 있다. 그런데 이미 전승과정에서 비유의 핵심을 흐리게 하는 부차적인 설명들이 붙어 있다. 첨가된 부분을 제거하고 비유의 원래 골자만 추리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된다.

 

“보십시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습니다. 그리고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 위에 떨어지게 되어 새들이 와서 그것을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돌밭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해가 솟자 타 버렸습니다. 또 다른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가시덤불이 자라자 그것을 숨막히게 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씨앗의 허실에도 불구하고 풍작을 꿈꾸면서 씨 뿌리는 사람처럼,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 나라를 위한 복음 선포 활동을 계속하시겠다는 각오를 보이시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 말씀을 군중들에게 한창 인기가 높으셨던 공생활 초기 단계가 아니라, 점차 예수님에 대해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공생활 후반기에 발설하신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군중들은 자기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언제든지 돌아서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의 반응에 실망하시지 않고 ‘하느님 나라’가 반드시 큰 열매를 맺으시리라는 희망을 보이신 것이다. 목표의식이 뚜렷한 지도자는 주변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 달려 간다.

 

예수님을 따르는 오늘의 그리스도인 역시 예수님의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믿다가 조그마한 시련이 닥쳐도 흔들리는 사람은 내가 무엇을 위해 신앙을 가졌던가를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시련 속에서도 하느님께 희망을 버리지 않는 신앙인이야말로 참 신앙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4월 9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4, 10~12)

 

이번 학기 내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한 개신교 여학생은 인도 선교를 꿈꾸며 매 주말 가두 선교를 하고 있다. 짐작한 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척만척 냉담하게 지나가지만, 개중에는 관심을 보이며 이것저것 묻기도 하고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씨 뿌리는 사람’의 수고와 보람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이 젊은이의 열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그저 대견스럽기만 하다.

 

초대교회 전도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전하며 이같은 체험을 하였던 것 같다. 왜 사람들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일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 그렇게도 못 받아들이는 것일까?

 

복음 전도사들의 안타까운 체험이 제자교육 형식으로 나타나 있다.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에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 곧 열두 제자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따로 와서 비유들에 관해서 질문한다(10절).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는 하느님 나라를 알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지만, 믿지 않는 ‘저 바깥 사람들’(11절)에게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수수께끼와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는 바로 제자들이 아닌 일반 대중에게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여 그들이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미리부터 막자는 의도라는 것이다.

 

어째 좀 이상하지 않은가? 평소 누구나 알기 쉽게 이끄시는 예수님의 언행으로 보아 그분의 뜻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부분은 예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초대교회에서 유다인들의 그리스도 불신 현상을 예정론과 묵시문학적 사고를 빌어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신비(미스테리온)’라는 말은 원래 종말의 비밀을 나타내는 묵시문학적 낱말인데, 여기에서는 ‘하느님 나라에 관련된 지식’, 곧 하느님의 계시나 은총 없이는 전혀 얻을 수 없는 신비한 지식을 암시한다.

 

마르코는 이런 신비한 말씀의 뜻을 오직 13~20절의 우의적 해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해설 (4, 13~20)

 

앞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는 씨 뿌리는 농부의 자세에 초점이 맞춰진 데 비해, 비유에 대한 해설에서는 ‘말씀’을 듣는 이들의 자세로 그 초점이 옮겨진다.

 

복음서 기자들은 전도에 어려움을 겪는 전도자들을 격려하고 신앙생활이 미흡한 신도들을 훈계하려고 이런 해설을 시도했던 것 같은데,‘복음’을 뜻하는 ‘말씀’의 사용, 박해를 시사하는 말, 세속적인 걱정을 경고하는 말 등이 당시 교회의 상황을 암시한다.

 

비유 해설에서는 씨가 뿌려지는 네 가지 경우의 밭, 곧 ① 길 위, ② 돌밭, ③ 가시덤불, ④ 좋은 땅에다 사람의 경우를 대비하여 말씀이 ① 길에 뿌려지는 사람들, ② 돌밭에 뿌려지는 사람들, ③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사람들, ④ 좋은 땅에 뿌려지는 사람들로 구조화한다.

 

‘씨는 복음의 말씀, 밭의 토양은 사람의 마음(밭-사람, 토양-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중요한 뜻만을 파악하면 그만인 비유 양식을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내는 우화(알레고리)처럼 파악하여 우의적인 해설을 덧붙인 것이다.

 

여기서,‘씨 뿌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체적인 설명은 없지만 앞뒤 문맥으로 보아 ‘전도하는 사람’일테고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들’은 개종자가 될 것이다. 씨앗 허실의 묘사에서 길 위의 씨를 쪼아먹는 새들은 사탄으로(4→15절), 돌밭의 싹을 시들게 하는 해는 무서운 박해자로(6→17절), 숨을 막게 하는 가시 덤불은 세상 걱정이나 재물의 유혹 등 여러 가지 욕심으로(7→19절) 대치한다.

 

이처럼 비유에 대한 해설은 전도자와 개종자가 모두 들어야 할 위로이자 권면의 말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고 있는 우리는 어떤 땅에 뿌려지는 사람들일까? 이왕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그리스도인이라면 좋은 땅에 뿌려진 사람이어야 하지 않을까?

 

씨앗의 허실을 막을 수 있도록 장애물을 치우고, 신앙의 벗들과 더불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인 것 같다. [가톨릭신문, 2006년 4월 16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계시에 대한 말씀들(마르 4, 21~25)과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 두 가지(마르4, 26~34)

 

마르코 복음서에는 ‘메시아의 비밀’과 관련된 내용들이 자주 나온다.

 

“예수는 누구인가?”하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관한 물음인데, 예수님께서는 평소 당신의 신원이 드러나는 것을 꺼려 누군가- 주로 귀신들이나 기적으로 치유된 사람들, 혹은 제자들- 가 당신이 누구신가를 알아차리고 발설하려고 하면 곧바로 함구령을 내리신다. 그래도 제자들에게는 따로 교육을 시켜 당신의 메시아로서 사명을 제대로 알아듣도록 이끄시는데 그런 특별한 교육에도 불구하고 번번히 딴전을 피우기 일쑤이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해설에 이어, 마르코 복음 4장 21~25절에는 예수님의 네 가지 토막말씀이 집성되어 있다. 예수님의 신상과 관련된 발언들이다. 우선“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께서 이제까지 당신 신분을 감춰오셨지만, 세상의 등불로서 오셨기에 언젠가는 훤히 드러나게 되시리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초기 몰려드는 군중의 인기나 환호에 우쭐대지도 않으시지만, 앞으로 닥칠 곤경에 빠지거나 죽음의 위협에도 결코 동요하거나 도망치지 않으실 것이다.

 

사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22절). 예수님에 관한 진실은 결정적인 순간, 곧 생의 최후 십자가 위에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에 관한 계시를 올바로 이해하려면, 들을 귀가 있어야 한다(23절, 앞서 9절 참조). 마르코는 이를 또한번 강조하여 “너희는 새겨들어라.”(24a절)하고 당부하는데, 우리의 마음이 완고해진다면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다.

 

24절과 25절에 나오는 세 번째, 네 번째 토막말씀은 종말의 보상에 대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을 것이다.”(24절)라고 말씀하여 종말의 인과율에 대해 말씀하신 것 같은데, 마르코 복음사가는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c절)라고 하여 현재의 선행보다 종말에 더 많이 보상을 받으리라는 기대를 담았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라는 말 역시 현재 영적 부를 쌓는 사람은 종말에 더 받게 되리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역시 우리 궁극적인 완성의 때, 곧 종말을 기대하면서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의 현재는 종말론적 전망 안에 놓여 있어야 한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4, 26~29)

 

예수님께서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 이 비유는 식물이 자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눈여겨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땅에 뿌려진 씨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무럭무럭 자라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작은 시작과 큰 결말이 큰 대조를 이룬다. 식물의 성장 과정 역시 인간에게는 신비롭기만 하다. 언제 어떻게 자라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강조점은 씨를 뿌린 농부가 곡식이 익으면 곧 낫을 대어 수확을 거둔다는 데 있다. 어쩌면 ‘인내로운 농부의 비유’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한데, ‘때’를 아는 농부는 씨를 뿌리고 스스로 자라게 놓아둔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보내시어 하느님 나라를 선포케 하시고 짐짓 부재하시는 듯 당신의 권능을 별로 드러내지 않으시지만, 은밀히 당신의 나라를 성장시켜 마침내 종말의 성공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다. 따라서 종말에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위해 현재에 바르게 결단하는 사람은 미래의 시간을 얻을 것이다.

 

겨자씨의 비유 (4, 30~32)

 

또한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지만,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통치는 작게나마 이미 시작됐고 장차 강력히 영향을 떨칠 것이며 마침내 종말에 가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하느님 나라(=다스림)’의 신비에 대해 이보다 더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문제는 지금 여기에서 그 구원의 신비를 은혜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제자됨의 실천이야말로 구원의 신비에 다다르는 길이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4월 23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5. 예수님의 권능을 보이시는 기적들 (4, 35~6, 6a)

 

일찍이 괴테는 “기적은 신앙의 귀염둥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지만, 어떤 이들에겐 기적이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한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기적의 핵심은 기이한 자연현상이나 사건들을 말하려는 데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는 데 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가르침은 예수님의 기적 행위를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앞으로 펼쳐질 네 가지 기적 이야기가 한 날에 있었던 것처럼 묶인 것도(4, 35~5, 43), 하느님 나라의 힘이 예수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그분의 행동에서도 드러난다는 것을 알려 준다.

 

예수님의 신적 권위와 능력이 드러나는 기적 안에서 믿는 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신앙으로 보게 되고, 하느님의 통치가 이미 지금 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풍랑을 가라앉히심(4, 35~41)

 

자연이적사화로 분류되는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자연 현상까지도 지배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점과, 개인이나 공동체나 아무리 어려운 위기에 처하더라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믿음과 용기를 가지라는 교훈을 얻게 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뱃길 여행을 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서쪽 지중해에서 오는 바람과 동쪽의 시리아 사막에서 오는 바람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마주치게 되면, 예기치 못한 돌풍이나 회오리 바람이 분다고 하는데, 마침 이러한 돌풍을 만나 배가 가라앉을 지경에 이르렀다. 물은 이미 배에 가득차 오르고 혼비백산한 제자들은 주무시고 계신 예수님을 깨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마치 악령을 꾸짖으시듯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라고 명령하신다. 이내 호수가 잠잠해진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자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수군거리며 놀라워한다.

 

한편 제자들에게는“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40절)하고 꾸짖으시는데, 이는 제자들에게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마르코가 삽입한 말이라 하겠다.

 

게라사의 광인을 고치심(5, 1~20)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치신 이 축귀사화는 여느 사건과 달리 뭔가 드러나지 않게 풍자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사건은 이방인 지역에서 일어나는데, 더러운 영이나 무덤, 돼지 등은 불결과 통한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 처지에 놓여 있었는지는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 없었고 그가 밤낮으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했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7절)하고 외친다. 사탄이 예수님 발치에 엎드려 ‘하느님의 이름으로’말한다는 것은 어딘가 우스꽝스럽다. 더구나 그의 이름은 ‘군대(Legio)’이다. 레기오는 6000명 단위의 로마군 부대인데 왜 하필이면 로마 군대일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8절)는 예수님의 명령도 상관이 부하 군인에게 명령하는 말투이다.

 

예수님의 명령으로 미친 돼지 떼가 호수에 빠져 몰살을 당했다는데 예수님은 돼지들이 불쌍하지도 않으셨다는 말인가? 이야기는 왠지 사실적이기보다는 이집트 병사를 바다에 처넣으셨다는 출애급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2000마리나 되는 돼지 떼는 집결한 군인들을 연상시킨다.

 

다음 이야기도 이해하기 어렵다. 사건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사람들은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나서 예수님께 떠나 주시라고 청한다(14~17절). 이들은 무슨 연고에서 예수님께 떠나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일까? 재산상의 피해를 입을까 두려워서일까?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였으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가족에게 돌아가 이 사건을 알리라고 명령하셨고, 그래서 그는 물러가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한다(18~20절).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 이야기는 단순한 축귀사화가 아니라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던 백성들에게 예수님의 구원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리는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가톨릭신문, 2006년 4월 30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심(5, 21~43)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고와 죽음의 고통이 아닐까?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는 이야기는 병고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준다. 생명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 줄 것이다.

 

이 두 일화는 본래 서로 연관이 없었는데, 전승과정 혹은 마르코 복음서가 씌어질 때 하나로 묶인 것으로 보인다. 이야기의 전개는 야이로라 하는 회당장이 자기 딸이 죽게 되었으니 와서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에 예수님과 제자들, 그리고 큰 군중이 무리를 지어 야이로의 집을 향한다. 이 때 열두 해 동안 하혈로 고생하던 부인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이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26절)는 표현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하고많은 병중에서도 하혈은 남모르게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데 더 큰 어려움이 있다. 하혈하는 여인은 부정(不淨)하게 취급되어 타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었다.

 

이 여인이 열두 해 동안이나 부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면, 이 여인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회는 물론 가족으로부터도 고립되었을지 상상해 볼 수 있다.

 

병고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한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자 과연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아채신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5, 34)하고 치유가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시켜 주신다.

 

그러는 사이에 회당장의 딸의 병은 악화되고, 회당장의 집에서 딸이 죽었으니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전갈이 온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b절)고 당부하신다. 과연 회당장에게 하혈하는 부인과 같은 믿음이 있는 것일까?

 

초상이 나서 소란스러운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잠과 죽음의 경계가 예수님 손안에 있다.

 

“탈리타 쿰!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41절)

 

예수님은 부활의 빛으로 죽음에게 명령하신다. 죽음의 어둠은 가시고 소녀는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니게 된다.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신다. 죽음에서 소생한 소녀는 이제 어엿한 여성으로 성장하여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게 될 것이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 중요한 사건의 증인이 된다.

 

나자렛에서 배척을 당하심(6, 1~6a)

 

앞서 3, 20~35의 “베엘제불 논쟁과 참 가족에 대한 가르침”에 연결되는 이 이야기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6, 4)는 결론을 이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 방문을 가셨을 때의 일이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놀라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2절)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는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은 고작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형제이며 직업이 무엇이라는 정도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그들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그러한 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고 그들의 불신에 놀라셨다고 한다(5~6절).

 

오늘날 섣부른 나의 생각과 판단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그분에게서 내가 만들어놓은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나의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5월 7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6. 열두 제자의 파견 (6, 6b~13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대할 때마다 옛 일이 생각나서 피식 웃는다. 수련기 때 탄광촌으로 사도직 여름 실습을 갔었는데, 길을 떠날 때에 이것저것 챙기지 말라는 복음 말씀을 곧이곧대로 따라 하느라 옷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쌀쌀한 날씨에 감기로 한참을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예수님 말씀을 어설프게 알아듣고 문자 그대로 흉내를 내다가 곤혹을 치른 셈이다. 나 같은 돌팔이 초심자에겐 유비무환(有備無患)이란 속담이 더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을까?

 

열두 제자의 파견 이야기는 오늘날도 교회 공동체가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중요한 지침을 마련해 준다. 앞서 제자들을 부르시고(1, 16~20), 열두 제자를 선택(3, 13~19)하신 이야기에서 보듯이,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목적은 무엇보다도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도록 파견하시는 데에 있다(3, 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복음의 참된 증인으로 삼고자 당신 친히 파견하신다. 이들이 둘씩 짝을 지어서 전교활동을 한 것은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말해 주는 일종의 관례였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권한을 대행할 수 있도록 악령들을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6, 7). 오늘날도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하는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는 악의 힘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주신 여행채비에 관한 지침(6, 8~9)과 전교여행 중 지켜야 할 규정(6, 10~11)은 예수님과 동행했던 제자들은 물론, 전도여행에 전력을 다했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첫 번째 훈시는 사명 수행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도록 촉구한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지팡이와 신발만은 허용하는데, 이는 당시 팔레스티나 밖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의 여건상 맹수와 강도를 물리치고, 가시나 돌이 많은 땅을 돌아다니기 위해서 지팡이와 신발이 꼭 필요했던 점을 보여준다. 두 번째의 훈시는 유랑 전도사들이 전도여행을 갔을 때 머물게 되는 가정교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통상 전도사들에게 공동체에서 숙식을 제공하게 되는데, 이때 전도사들이 이집저집 돌아다니며 민폐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파견된 자로서의 사명을 잃지 말라고 촉구한다. 전도활동이 거절될 경우에는 발의 먼지를 털어 그들에게 증거가 되도록 하라고 하는데(11절), 이는 절교를 뜻하는 상징적인 행위이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개개인의 결단이 요청되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7. 삽화: 예수님의 신원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 (6, 14~29)

 

열두 제자의 파견(6, 6b~13)과 파견된 제자들의 귀환 보고(6, 30~32) 사이에 놓여 있는 이 단락은 헤로데 안티파스 왕을 매개로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사람들의 여론(14~16절)과 세례자 요한의 죽음(17~29절)을 전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에 대한 보고는 복음서의 전체 구성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요한의 등장과 함께 메시아의 선구자로 다시 오리라는 예언자 엘리야의 귀환이 실현되고, 또 그의 종말이 예수님의 죽음을 예시하는 역할을 한다(9, 11~13).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났다.” “엘리야다”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라고 답한다(14~15절). 그러나 헤로데 안티파스는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6, 16)라는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이는 군중의 여론을 듣고 신앙고백을 한 시몬 베드로(8, 29)와는 매우 대조적인 행동이다.

 

전설처럼 회자되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는 등장 인물들의 묘사가 돋보여 문학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한다.

 

세례자 요한은 율법에 충실한 예언자로서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데(마르코의 필립보는 오보임)의 아내 헤로디아의 불법적인 결혼을 고발하고 이를 대담하게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하게 된다.

 

반면, 불법적인 결혼을 감행한 헤로데의 공범자, 헤로디아는 기회를 틈타 요한을 죽음의 곤경에 이르게 하고, 사악하고 유약한 헤로데는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20절)으로 생각하면서도 자신의 체면 때문에 무고한 예언자를 죽인다.

 

이러한 헤로데의 모습은 예수님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십자가에 처형한 빌라도와 빼닮았다. 어느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악한 정치 권력자의 횡포를 고발하는 예언자의 죽음 앞에서 정의와 공평의 하느님께서 다스리실 하느님의 나라를 고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가톨릭신문, 2006년 5월 14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8. 첫 번째 먹이심 (6,30-56)

 

사람들이 좋아하는 기적 이야기 중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을 먹이시는 두 가지 빵의 기적 이야기가 있다. 하나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6,30~44)이고, 다른 하나는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8,1~9) 이야기이다.

 

영화 <마르첼리노의 기적>에서 보듯이 빵이 펑펑 쏟아지는 광경을 상상한다면 자연물을 이용한 자연이적사화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기적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는 제자들에 대한 교육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이야기의 구조가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에게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 주었다는 기적(1열왕 17,8~16)이나 엘리사가 보리떡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였다는 기적(2열왕 4,42~44) 이야기와 매우 흡사하다. 이로써 예수님이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예언자들보다 훨씬 탁월한 분이심이 드러난다.

 

또 하느님께서는 광야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만나를 먹이시는 기적(탈출 16장; 신명 8,3.16)을 일으키셨는데 예수님께서 외딴 곳에서 백성들을 기적적으로 먹이시는 것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잔치를 생각하게 한다(이사25,6). 또한 무엇보다 성체성사가 주는 풍요로움을 생각할 수 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오천 명을 먹이심 (6,30~44)

 

예수님께서 전도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과 함께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려고 따로 배를 타고 떠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육로로 예수님의 일행보다 먼저 호숫가에 다다른다(30~33절).

 

배에서 내리신 예수님은 큰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기 시작한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34절). 예수님께서 스승으로서 친히 가르치시고 먹이시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스승을 따라 예수님의 사명을 잘 이어가야 한다.

 

어느덧 날이 저물어 군중의 끼니를 걱정한 제자들은 그들을 돌려보내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36절)라고 예수님께 청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37a절)고 이르신다. 제자들에게 군중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라는 말씀이시다.

 

아니, 이들을 다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텐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제자들로선 아예 엄두조차 내지 못한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수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나?”(38절). 그리고 제자들에게 명령하셔서 군중들을 푸른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자리잡게 하신다.

 

시편 23편의 푸른 풀밭에서 양떼를 먹이시는 목자 하느님을 생각하게 한다.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질서정연하게 무리 지어 앉은 모습은 더 이상 앞서 ‘목자 없는 양들’ 같은 측은한 모습이 아니다. 이들의 모습은 광야를 행진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조직을 상기시키는(탈출 18,21.25; 민수 31,14; 신명 1,15) 하느님 백성의 이상적인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져온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41절) 영락없이 최후의 만찬과 성찬례를 연상하게 하는 모습이다.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의 도움으로 군중들을 배불리 먹일 수 있었다. 예수님의 행위는 기적을 설명하기보다는 제자들이 마음에 새겨 교회에서 실행하도록 가르치는 것 같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 한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니, 하느님 백성 모두, 곧 교회 전체 모든 사람에게 충분했다는 말이다.

 

또 빵을 먹은 사람이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니 모인 군중이 그 두세 배도 더 되었을 법하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의 권능에 의지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나누어 주라는 부르심을 받는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라.” 그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진 이 때에 여전히 기아와 빈곤, 전쟁과 폭력, 생태계 파괴와 살상무기로 지구촌이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교회는 세상의 영적, 물질적 필요에 귀 기울이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눔에 앞장서야 할 것 같다. [가톨릭신문, 2006년 5월 21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물 위를 걸으심 (6, 45~52)

 

오천 명을 먹이신 빵의 이적사화에 이어 예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신 기적 이야기가 보도된다. 구약 성경에서 하느님이 나타나신 이야기 양식(시현(示現) 혹은 신현(神顯) 사화라 함)을 본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이 계시되고 예수님의 신성이 드러났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역풍을 만나 고생하는 제자들이 구제되고, 예수님의 신비가 드러날수록 예수님을 향한 군중들의 신뢰심도 높아져간다(6, 53~56).

 

예수님께서 빵의 기적을 통해 군중과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신지 알리셨다면, 이제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을 통해서는 제자들에게 더욱 확실히 자기 자신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도 빵의 기적에서처럼 예수님께서 실제로 물 위를 걸으셨느냐, 이런 기적이 과연 가능한가 하는 따위의 물음은 중요하지 않다. 이미 시간이 늦어(35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호수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떠가게 하시고 군중을 돌려보내신 후, 당신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신다.

 

앞서 전도여행에서 돌아와 휴식을 취하지 못한 제자들에게 우선적으로 쉼이 필요했던 것 같다(31절). 예수님의 쉼은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것일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는 말에서 그분의 삶이 언제나 갈라짐 없이 하느님을 향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이 타고 있는 배가 호수 한가운데에서 역풍을 만나 제자들은 바람과 맞서느라 애를 쓰고 있다(47~48절). 어느 시대에나 세상의 흐름에 맞서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과 같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이렇게 힘드는 것일까?

 

밤 사경쯤(오전 3~6시)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그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신다. ‘지나가다’는 동사는 하느님의 영광이 모세와 엘리야 앞을 지나갔다는 구약의 사건을 상기시킨다(탈출 3, 14; 신명 32, 39; 이사 41, 4 등). 물은 생명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파괴력을 갖고 있기에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에서 구출하셨고 요르단 강을 건너게 하신 분이다.

 

제자들은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른다(49절). 신적(神的) 체험은 두려움과 놀라움을 동반한다. 루카복음에서는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고 한다(루카 24, 37~39).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50b절)고 격려의 말씀을 하신다. “나다”라는 표현은 본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말씀이다(탈출 3, 14). 이제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신비로운 존재가 드러나는 것이다. 광야에서 당신 백성을 배불리 먹이시고 바다를 지배하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예수님에게서 드러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51절).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두려움을 몰아내신다.

 

마르코는 제자들이 물 위를 걸으신 기적의 뜻도(51b절),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의 뜻도(52a절) 깨닫지 못하였는데, 그들의 마음이 오히려 완고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은 것이다. 마르코는 제자들의 몰이해를 폭로함으로써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역사상 예수의 삶에 대한 이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고 있다.

 

겐네사렛에서 병자들을 고치심 (5, 53~56)

 

예수님의 일행이 겐네사렛에 이르자 사람들이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병자들을 데려와 치유를 받게 한다. 군중들의 태도에서 달라진 것은 없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고 싶은 마음보다는 자기들의 필요에 관심이 모아져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옷단에 달린 술만이라도 만져서 치유를 받고 싶은 소망이 간절하다(5, 27 참조). 예수님은 이러한 인간적인 원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에게 치유를 통한 구원을 맛보게 하신다. 이 대목을 통해 마르코는 앞에서 언급했던 예수님의 활약상을 다시 한번 요약하여 하나의 단락을 매듭짓고 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가 되려면, 기적행위자 예수님에 머물러서는 안된다. 예수님의 기적 능력은 하느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표징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놀라운 능력을 지니신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약속된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로서 만나야 한다. [가톨릭신문, 2006년 5월 28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9. 조상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 (7, 1~23)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습관이 한번 몸에 배고 나면 걸음걸이 하나도 고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여럿이 함께 길들여진 전통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가 없다. 어떤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관습이나 사상, 행동 따위의 양식들은 역사적 생명력을 갖고 있기에 어떤 강력한 자극이 없는 한 그냥 조상들의 것을 답습하게 된다.

 

예수님 시대의 유다인들에게도 그들이 불변의 것으로 따르고 있는 관습이 있었다. 이른바 ‘조상들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율법뿐만 아니라 모세와 여호수아의 구전 계율을 물려 받아 전해준 선현들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었다.

 

마르코 7장의 논쟁사화에서는 8장부터 나올 이방인 선교에 앞서 마르코 복음사가의 공동체에 있었을 법한 논쟁을 보여 준다. 조상들의 전통에 따라 사는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새롭게 받아들인 이방계 그리스도인 사이의 갈등이다.

 

앞서 유다인 영역에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6, 30~44), 물 위를 건너심(6, 45~52), 예수님의 놀라우신 치유 능력에 대한 집약문(6, 53~56)에 이어,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사 몇 사람과 논쟁을 벌이시는 장면이 나온다(7, 1~23).

 

논쟁은 ‘빵을 어떻게 먹느냐’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유다인들에겐 세정(洗淨) 인습이 있어 음식을 먹기 전에 손과 몸을 깨끗이 씻거나 그릇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빵을 먹었다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더러운 손을 부정(不淨)한 손이라고 칭하였는데, 손을 씻고 안 씻는 것이 위생상의 문제가 아니라 제의(祭儀)적인 법규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조상들의 전통’ 가운데 생활 규범을 ‘할라카’(‘걸음’이라는 뜻)라고 불렀고 모세의 율법을 명확하게 하는 규정들과 관습들인 전통을 고수하는 일을 생명처럼 여겼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이 인습을 따르는 일이지 하느님을 섬기는 일은 못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신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 본말(本末)이 전도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빵을 먹는 고마움에서 여러 가지 세정 의식이 나왔음 직한데 본래의 의미는 사라지고 형식만 남았을 때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인간의 전통이 하느님의 계명을 어떻게 어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가 코르반 인습에 관한 논쟁이다(9~13절). ‘코르반’(히브리 말로 ‘예물’이라는 뜻) 서약을 통해 부모에게 공양할 물건을 성전에 바친다고 맹세하면 공양의 의무가 면제되었는데, 전통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사례가 종종 있었던 것이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5절)

 

이어서 금기 식품과 관련된 인습을 비판하시는 말씀이 군중들과(14~16절), 또 제자들에게(17~23절) 반복하여 나온다.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 3~21에 따르면 정결한 식품과 불결한 식품을 가려 놓았는데, 예수 시대 유다교에서는 금기식품법이 더욱 강화되었다. 초대교회에서는 유다인들의 관습과 이방인들간에 융합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았다. 그런데 특정 음식에 대한 금령의 폐지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식사 공동체에서 유다 출신들과 이방 출신들 사이의 벽을 없애게 된다(사도 10~11, 18; 갈라 2, 12).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원인은 인간의 외부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부의 악한 마음에 있다고 단언하신다(7, 23). 사람의 마음에서 온갖 나쁜 생각들과 죄악이 나온다고 말씀하시는데(20~23절), 복음서에서는 죄악 목록들이 여기에서만 나온다. 예수님께서는 이 논쟁으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는 말씀으로 종결지으시고, 띠로와 시돈, 데카폴리스 등 이방 지역으로의 여행 갈 채비를 마치신다(24절).

 

유다인들의 전통에 대한 논쟁이 한국인에게는 생소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얼마나 많은 편견이 있는지? 어느 사회나 독특한 식습관이나 관습들이 있는데 나라마다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여 상대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다.

 

하느님의 원초적인 뜻에 부합되지 않은 유다인들의 인습을 비판하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모습이 드러난다. [가톨릭신문, 2006년 6월 4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10. 이방인들을 상대로 활동하신 예수님(7, 24~37)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이야기(7, 24~30)

 

바리사이와 율사들과의 긴 논쟁 후에 예수님께서는 ‘띠로’라는 이방인 구역으로 향하신다. 갈릴래아 북쪽과 맞닿은 이 지역에는 여러 민족이 살고 있었고 주로 이방 종교를 믿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알아차리지 않도록 어떤 집에 살짝 들어가셨는데, 결국 사람들에게 알려진다(24절). 예수님께서 숨어 계시고자 하나 결국 드러나시고 말았다는 것은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로(1, 44~45; 6, 32~33; 7, 36), 숨어 계시는 것은 선교 사명과는 부합하지 않는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린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는 이 부인은 헬라(이교도) 사람으로서 시리아-페니키아 출신이라고 소개된다. 그녀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은 채 언어, 문화, 종교, 국적, 인종, 성 등의 특성을 통해 신원이 알려진다. 다른 때와 달리 이 이야기에서는 군중과 제자들이 등장하지 않고 예수님과 이 여인만이 독대하고 있다(25~26절).

 

언뜻 보기에 구마 기적사화에 속하는 이 이야기는 여느 기적 이야기와 달리 전개된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악령에서의 해방)를 거부하시고, 이야기의 중심이 기적 이야기에서 예수님과 여인 사이의 논쟁으로 넘어간다.

 

예수님의 태도는 평소 사람들의 필요에 마음이 움직여 곧바로 행동에 옮기시는 것과는 달리, 여인의 청원을 거절할 수 있는 우월한 위치에서 여인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태도를 보이신다. 오히려 예수님의 태도에서 당시 유다인과 비유다인간의 인종적인 갈등, 가부장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자와 남자의 불평등한 관계를 그대로 볼 수 있다.

 

가부장 사회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의 말을 지지하고 긍정하는 데 익숙하며, 자신들의 명예가 손상되고 무시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상대방을 긍정하고 지원하는 방식으로 말한다. 이는 여자들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물러서지 않고 사정한다. 여인과 예수님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예수님: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여인: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여인은 성경에서 드물게 자기 목소리를 가지고 예수님께 직접 말한다. 이들의 대화는 빵-자녀-식탁-집-개 등에 대한 신학적 논쟁이 중심에 있다. 여인의 대답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우선성을 존중하면서도 비유다인들도 예수님의 식탁 공동체에 포함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예수님: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여인은 예수님의 모욕적인 비유 말씀을 논박의 근거로 삼아 논쟁하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에 따라 딸의 치유를 선언하시게 함으로써 딸의 행복을 얻어낸다. 비난과 거부에 굴복하지 않고 이를 역습하면서 반박하는 여인의 태도에서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굳은 의지와 확신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여인의 대담성과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이런 중요한 신학적 논쟁을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 안에 담은 이유는 무엇일까?

 

해설자는 30절에서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예수님에 의해 일어난 기적을 증언하는 증언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집의 안/밖, 유다 본토/외국 땅, 유다인 남자/이방인 여자, 정결/불결, 자녀/개, 믿음/불신 등을 대조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당시 사회 안에 존재하던 여러 종류의 차별을 폭로하고, 이제 새 시대가 되었으니 부조리한 관습과 제도를 넘어 이방인을 위한 구원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있도록 초대한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행동은 유다인과 대조적으로 굳센 믿음을 간직한 이방계 그리스도인의 모형으로서 이방 선교의 신학적 근거를 마련해 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6월 11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심(7, 31~37)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는 물리적으로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물론이고, 남의 나라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결정적인 순간에 낭패를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의 심각성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오죽하면 메시아 시대가 도래하면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고 묘사된다(이사 35, 5~6 참조).

 

예수님께서 이방인 땅(띠로, 시돈, 데카폴리스)에서 병자를 치유하셨다는 이야기가 전형적인 치유 이적사화의 양식에 따라 상황묘사(31~32절), 기적적 치유(33~34절), 치유실증(35절), 목격자들의 반응(37절) 순으로 소개된다. 이제 유다인과 이방인의 경계를 넘어서 만인에게 구원이 펼쳐진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신다(33절).

 

그러나 결정적으로 병의 치유가 이루어진 것은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라고 말씀하신 때였다(34절).

 

예수님의 기적 행위는 신비한 일을 묘사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 시대에 이루어지게 될 구원사건이 예수님을 통하여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강조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대로 약속된 구원의 기쁨이 모든이에게 결정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37b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는가?

 

이 사건을 보고 사람들이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37a절)고 말함으로써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서 하신 말씀(창세 1, 31), 그리고 종말에 모든 것이 새롭게 되리라는 묵시적인 말씀(묵시 21, 5)을 연상케 해줌으로써 하느님의 나라의 도래와 예수님이 새로운 창조의 주인이심을 은연중에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될 것이다. 그야말로 아람어 “에파타” 곧 “열려라”는 말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준다는 말이 되기에 초대 그리스도교에서 세례식 때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제 세례를 받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복음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11. 두 번째 먹이심(8, 1~21)

 

사천 명을 먹이심(8, 1~9)

 

앞서 오천 명을 먹이신 첫 번째 빵의 기적 사건이(6, 34~44) 이제 이방인에게도 주어진다. 두 이야기의 구조와 주제가 비슷한 것으로 보아(군중을 가엾이 여기심, 제자들과의 대화, 외딴 곳에서 빵과 물고기로 하는 식사, 배불리 먹고 남음, 많은 군중 등), 서로 다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기보다는 하나의 사건이 유다인과 이방인, 곧 서로 다른 공동체 안에서 전승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두 번째 빵의 기적사화에서는 나누어준 빵의 숫자가 다섯 개가 아니라 일곱 개이고, 남은 빵조각이 열두 광주리가 아니라 일곱 바구니로, 빵을 먹은 사람의 숫자가 오천 명이 아니라 사천 명으로 나타난다.

 

열둘이라는 숫자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나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관련이 있다면, 7이라는 숫자는 가나안 땅 이방의 일곱 민족(신명 7, 1)이나 예루살렘의 헬라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책임 맡은 일곱 명의 보조자들(사도 6, 1~7), 곧 이방계 그리스도인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표징 요구를 거절하심(8, 10~13)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신다(10절). 달마누타 지역이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으로 이끄신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시험하고 하늘에서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태도는(11절) 그 옛날 하느님을 시험한 광야 세대의 행동을 연상케 한다(민수 14, 11. 22 참조). 하느님의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은 애초에 들을 마음이 없다. 마음을 열어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허락하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표징이 보일리 없다.

 

자기 생각과 아집으로 꽉차 있으면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은 꼬투리를 잡겠다는 속셈을 드러내는 것 뿐이다. 무상의 선물로서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전 인격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표징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6월 18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경고(8, 14~21)

 

이제 두 가지 빵의 기적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시는 단계에 이른다.

 

그런데 이야기의 흐름이 매우 상징적이다. 제자들이 빵을 가져오는 것을 잊어버려, 배 안에는 빵이 한 개밖에 없었다고 한다(14절).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너희는 주의하여라.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라고 분부하신다(15절). 그러자 제자들은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자기들에게 빵이 없다고 서로 수군거리고(16절),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어찌하여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고 제자들을 심하게 꾸짖으신다(17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일까? 빵이 한 개밖에 없다는 사실과 바리사이들의 누룩(헤로데의 누룩은 마르코의 가필)과는 어떤 연관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의 질책은 유다 민족에게 내려졌던 예레미야의 날카로운 비판을 상기시킨다.

 

“어리석고 지각없는 백성아 제발 이 말을 들어라.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구나.”(예레 5, 21).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17b절)는 질문은 앞서 첫 번째 빵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제자들의 완고함을 꾸짖었던 말씀이시다(6, 52).

 

제자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또 그분의 권능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다인과 이방인을 위해 각각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셨던 기적 사건을 상기시키신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유다인과 이방인을 위해 존재하시는 하나의 빵이라는 말인가? 바리사이와 헤로데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악한 누룩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성경은 계속하여 그 의미를 감추고 있지만 성경을 읽는 독자는 마르코 복음 1, 1~8, 21 전체를 마무리하는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야말로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빵’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14장 22절에 가서야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곧 예수님 자신이 빵이라고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6월 25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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