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신약] 그리스도론과 길 위의 제자직(마르 8,27-10,4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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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5 | 조회수4,296 | 추천수1 | |
[최혜영 수녀의 성경말씀나누기] 마르코 복음서 (25-33)
제2부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8, 27~10, 45)
복음서의 전반부에서는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약상이 그려졌다. 예수님께서는 임박한 하느님의 통치를 당신의 말씀과 행동으로 힘차게 선포하셨다.
그러나 이제 반대의 표적이 되어 수난 받고 돌아가실 예루살렘 여행길에 오르시게 된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8, 27~10, 45)의 앞뒤로 소경을 치유하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예수님을 알아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벳사이다의 소경 치유=8, 22~26 / 예리고의 소경 치유=10, 46~52).
벳사이다의 소경을 점진적으로 치유하심(8, 22~26)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몰이해에 꾸중하시는 이야기(14~21절)와 그들의 첫 번째 신앙고백(27~30절) 사이에 자리잡은 이 이야기는 갈릴래아에서의 활동(1, 14~8,21)과 예루살렘으로의 여정(8, 27~10, 52)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그런데 벳사이다의 소경 치유는 즉각적이고 완전하게 치유하지 않으시고 점진적으로 치유하시는 점이 특이하다.
예수께서는 눈먼 이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두 눈에 침을 뱉으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며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신다. 앞서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7, 31~37)와 비슷한 점이 많다[침을 뱉고 만지는 제의적인 행위, 함구령, 이사 35, 5~6a 인용 등]. 처음에는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이던 것이 두 번째 단계에 이르러서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볼 수 있게 된다(25절).
치유사화는 보통 치유 받은 이의 선언이나 목격자들의 반응으로 끝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그에게 집으로 보내시면서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당부하신다. 제자들에 대한 함구령과 같은 것이다.
마르코가 예루살렘 여정을 서술하면서 점진적으로 시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은 제자들의 영적 진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예수님을 수난 받고 고통 당하는 메시아로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기까지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다. 십자가의 길을 통하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없다. [가톨릭신문, 2006년 6월 25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IV. 그리스도론과 길 위의 제자직(8, 27~10, 45)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 이야기는 예수는 누구신가 하는 그리스도론적 물음과 그분을 따르는 제자됨의 길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으로 집약된다. 이 여정 중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운명을 세 차례나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을 교육하시고 철저한 십자가 추종의 삶을 촉구하신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분의 길을 따르려면 파스카의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
1. 첫 번째 수난 예고(8, 27~38)
베드로의 고백 (8, 27~30):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앞서 “예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관한 군중의 여론을 보도하였음에도 불구하고(6,14-16), 다시한번 예수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다룬다.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의 길이 결코 순탄치 않을 고난의 길이 될 것이기에 마음의 각오가 단단히 필요하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9절). 제자들에게 직접 주어지는 이 질문은 복음서 전체를 이끌어 온 중심 주제였을 뿐 아니라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핵심적인 물음이 된다. 나(우리)에게 예수는 누구신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30절)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은 우리에게 정답으로 제시된다. 나자렛 예수는 우리의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시는 것일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
문제는 어떤 메시아(그리스도) 상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유다인들은 그들에게 정치적 해방을 가져올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는데, 이는 예수님께서 보여주려고 하시는 고통 받고 죽음을 당하시는 메시아의 길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예수께서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일지 보여주실 것이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8, 31~33)
이스라엘 북쪽 헤르몬 산 아래 필리피의 카이사리아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서 제자교육이 시작된다(31절).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기대하던 그리스도 상과는 전혀 다르다. 내가 기대하던 메시아는 어떤 분이었나?
이승에서 활약하신 사람의 아들은 인간의 죄를 사할 수 있는 전권을 가지고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신 분이 아니었던가?(2, 10. 28).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로 붙잡고 반박하기 시작한다(32b절). 그가 고백했던 ‘그리스도’ 칭호와 예수님의 운명 예고는 도저히 연결시킬 수가 없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33b절). 베드로를 향한 호된 꾸지람은 ‘하느님의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만든다. 제자됨의 길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사탄의 짓이다.
예수 추종의 자세(8, 34~38)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당신을 어떻게 따르고 본받아야할지 알려 주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나를 따라야 한다.”(34b절) /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잃을 것이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것을 구할 것이다.”(35절) /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의 대가로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느냐?”(36~37절) /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38절)
본디 서로 상관이 없던 네 가지 토막 말씀들이 일찍이 어느 전승자에 의해 한데 묶여 집성문이 된 것을 마르코가 채집하여 이 자리에 배치한 것이다. 철저한 자기 부정과 십자가 수락이 자기실현과 구원의 길이라는 삶의 역설이 담겨 있다. 마르코의 첫 번째 독자였을 박해 받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큰 위로와 도전이 되는 말씀이시다.
이제 십자가 추종의 길은 임박한 종말과 관련된다. 예수를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를 추종하는 삶은 수난과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인 도래, 곧 구원을 지향하게 될 승리의 길이 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7월 2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2. 삽화 : 영광스러운 변모와 엘리야 재림 논쟁(마르 9, 1~13)
고통 중에 있을 때에는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오로지 고통 속에 매여 있게 된다. 이런 때 실낱같은 빛이 있다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십자가 추종의 삶이 아무리 힘든다 해도 부활의 영광을 생각할 수 있다면 이는 더없는 희망이 된다.
예수의 변모 사화(9, 2~10)는 부활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예시해 주는데, 변모사화 앞에는 임박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관한 말씀(9, 1)이 실리고, 변모사화 뒤에는 엘리야 재림과 관련된 논쟁(9, 11~13)이 실려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 도래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2베드 1, 17~18 참조). 예수의 청중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도래할 때까지 죽지 않고 살아남을 자들이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주어진다. 마르코는 이어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체험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이 궁극적으로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고 있음을 알려 준다. 사람의 아들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 나라의 궁극적인 도래, 곧 구원을 지향하고 있다.
영광스러운 변모(9, 2~10)
이스라엘 성지 순례를 다녀온 분들은 이즈르엘 평야가 한가로이 내려다보이는 둥근 지붕 모양의 타보르 산 정상에 세워진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 성전’을 기억할 것이다. 해발 563m, 폭은 약 3.3km 정도밖에 안되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주변이 평원이라 우뚝 솟아 있는 느낌이다. 타보르 산이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장소였다고 최초로 입증한 사람은 예루살렘의 주교 치릴루스였다고 하는데, 성경의 ‘하르 타보르(높은 산)’와 잘 어울린다.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전망 안에서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의 모습은 명백히 부활을 예시한다.
이야기의 구성이 하느님이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신현사화(탈출 24장)와 비슷한 점이 많다. ‘이렛날’ 하느님께서 구름 가운데에서 모세를 부르신 것처럼(탈출 24, 16) 이 사건은 ‘엿새 뒤에’일어난다. 하느님의 계시가 이루어진 결정적인 시점이라 하겠다. 종말에 나타나게 되리라는 엘리야와 모세(묵시 11, 3~6)가 현시를 통해서 나타난 것이다. 예수님의 눈부시게 빛나는 옷은 천상 영광의 표징 가운데 하나이다. 세 명의 제자들, 곧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천상행복을 앞당겨 체험한 것이다.
예수님의 변모는 종말에 완전히 드러날 예수님의 정체를 일시적으로 보여주며 부활의 영광을 드러낸다. 베드로는 눈앞에 펼쳐진 천상행복에 취하여 초막 셋을 짓고 여기에 머물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보는 영광은 완전하지 않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7절).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오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다시한번 상기시킨다.
예수님께서는 산에서 내려오면서 다시한번 제자들에게 이르신다.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실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9절) 마르코 복음서에서 제자들에 대한 마지막 함구령이다.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겪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역사적 예수의 삶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엘리야 재림 논쟁(9, 11~13)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이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율법학자들의 말이 무슨 뜻이냐고 묻는다.
여기에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유다인들과 빚었던 갈등이 묻어 있다.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종말의 인물로 받들었지만, 유다인들은 종말이 도래하기 전 엘리야가 재림한다고 성서(말라 3, 23~24; 집회 48, 10~11) 말씀을 인용하여 엘리야가 아직 재림하니 않았으니 예수가 종말의 인물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엘리야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그를 제멋대로 다루었다는 것인데, 이는 곧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하느님 나라의 온전한 도래를 위해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야만 했던 점에서 공통된다. 두 사람 모두 구약의 예언자들이 겪었던 것처럼 고난을 받아야 하며, 세례자 요한의 운명은 그리스도의 운명을 예고한다.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도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파스카의 길을 통과해야한다. [가톨릭신문, 2006년 7월 9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어떤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심 (9, 14~29)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갈릴래아 활동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 때 성령께서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 11)라고 예수님의 정체를 드러내셨다.
그러나 바로 다음에 광야에서 유혹 받으셨다는 사건을 다룸으로써 예수님의 일생이 악령과의 투쟁임을 보여준다(1, 12~13).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 2~10)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고 부활의 영광을 미리 예시하지만, 바로 뒤에 더러운 영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쳐주심으로써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 후에도 악의 힘이 여전히 존재하고 제자들의 믿음도 불충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 중에 하나밖에 소개되지 않는 이 치유 이야기는 상황묘사가 꽤 길고 장황해서 두 개의 다른 기적 사화가 연결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이야기는 단순히 치유 이적사화가 아니라 악령을 추방하는 축귀사화의 성격이 있고, 또한 치유사화를 중심으로 하여 믿음의 중요성과 제자교육의 주제가 다루어진다.
이야기는 예수님이 일행과 함께 다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는 곳으로 가시는 것으로 시작한다(14절). 어떤 사람이 말 못하게 하는 영이 들린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제자들이 고치지 못했다는 상황 묘사가 길게 전개된다(14~19절).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뻣뻣해지는 증세로 보면 영락없는 간질환자이다(참고 마태 17, 14~21; 루카 9, 37~43a).
그러나 마르코 복음사가는 병명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 병이 악한 영에 사로잡힌 결과라는 점을 강조하고 그 환자가 얼마나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는가를 반복하여 말한다(17~18, 20, 22, 26절).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19절).
제자들이 치유 능력을 가지지 못한 데 대해 예수께서는 몹시 속상해 하신다. 성령이 충만하다면 제자들도 예수님과 같은 능력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날처럼 무신론이 판을 치고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세상에서 예수님의 탄식이 더욱 실감난다.
20~27절에서는 벙어리 영이 들린 아들을 가진 아버지의 믿음을 중심으로 소년의 치유과정이 상세히 묘사된다. 여기서 중요한 신학적 주제는 믿음이다. 처음 사람들이 아이를 데리고 왔을 때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아이를 치유하시리라는 희망은 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 아버지의 믿음이 점점 발전하는 것 같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 주십시오.”(22절)
이에 대해 예수께서 그의 전적인 믿음을 촉구하신다.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3절). 믿음에는 온전한 투신만이 필요하다. 적당히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아이 아버지는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 주십시오.”(24절)라고 말하고 그의 믿음은 아들의 치유를 가져온다.
예수님은 치유자이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 하느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신다. 예수님께서 악령에 사로잡힌 아이를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죽기까지 악의 힘에 대항하여 계속하여 싸우시는 모습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는 대목은(27절) 예수님의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 ‘일으키다’, ‘일어나다’로 번역된 동사는 부활을 말하는 데 쓰인다.
28~29절에서는 제자들이 소년을 치유하는 데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 예수와 제자들의 토론이 나온다. 제자들이 영을 쫓아 내지 못한 이유에 대해 묻자 예수님께서는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가 없다.”(29절)고 말씀하신다. 기도는 믿음의 증거이다. 결국 믿음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필자의 경우도 종종 기도를 부탁 받게 되는데 부탁하는 분의 태도에 따라서 그분의 기도가 이루어질지 가늠하게 된다.
신앙의 신비라고 했던가? 이제나저제나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청해야 할 가장 큰 은혜인 것 같다. [가톨릭신문, 2006년 7월 16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3.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제자교육(9, 30~50)
예수님께서는 과연 당신 죽음의 길을 미리 훤히 알고 계셨을까?
예수님께서는 평소대로 ‘하느님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사명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이상을 펼치며 생활하셨을 것이고, 그 결과가 어떠할지 예측하지 못하셨을 리가 없다.
유다교 지도층의 반대가 심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면서 아무래도 종국에는 고난을 받으시리라는 예감을 가지셨을 것으로 짐작된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두 번째 예고 (30~32절)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1절)
사람의 아들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게 된다는 것은 대단한 역설이다. ‘넘겨진다’는 말은 수난과 죽음을 뜻하는 말로서 하느님의 행위를 암시한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가르침의 정점을 이 세상 안에서 생을 어떻게 마감해야 하는가에 두고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왜 죽음을 당하셔야 하는지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32절). 어떤 죽음을 맞을 것인지는 제자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 되지 않겠는가?
제자들의 서열 다툼(33~37절)
제자들이 길에서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했다는 것은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하느님 나라의 윤리는 이처럼 철저한 섬김과 겸손에 바탕을 둔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7절)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단은 이처럼 작은이들, 곧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신뢰와 희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다.
바깥 사람에 대한 포용(38~41절)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바깥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악마를 내쫓는 것에 대해 초대교회는 개방적인 태도를 보인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예수님을 비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특권을 독점하려 하지 말고 바깥 사람을 관대하게 포용하라는 것이다.
이런 태도야말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예수의 제자라는 명예나 특권만을 내세워 외부 사람들에 대해서 폐쇄적인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한편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비록 인간적으로 볼 때 작은 이들이지만 그들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쳐라 (42~48절)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를 넘어지게 하는 사람, 곧 제자들과 예수님 사이를 이간시키는 사람에 대한 단죄가 예고된다. 그런가하면 나의 손과 발과 눈이 작죄하도록 충동질하는 일이 있다면 가차없이 절단하여 죄를 짓지 못하게 하도록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성한 몸으로 지옥의 영벌에 떨어지기보다는 불구의 몸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는 말씀이시다.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라는 비유로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신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칠 결단이 필요하다.
소금의 상징어(49~50절)
불로 소금절이가 될 것[불소금에 절여질 것]이라는 말씀은 우리에겐 생소한 표현이지만, 불과 소금 모두 부패를 막고 불순물을 정화하는 상징이므로, 제자들이 심판의 시기가 오기 전에 시련 가운데서 정화되고 하느님께 올려지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너희는 마음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라.”(50b절). 예수 추종의 길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철저히 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마음에 소금을 간직해 자리다툼이나 특권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 서로간에 평화를 보존해야 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7월 23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4. 삽화 :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군중을 가르침 (10, 1~31)
필립보의 가이사리아(8, 27)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걸으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래아 지방과(9,30) 그 지방의 도시 카파르나움을 거쳐(9, 33), 이제 유다 지방과 요르단강 건너편으로 와서(10, 1) 군중을 가르치신다. 머지않아 예리고를 거쳐(10, 46)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이다(11,1; 참조 10, 32). 이혼에 대한 논쟁(1~12절), 어린이와 하느님 나라(13~16절), 부자와 하느님 나라(17~27절), 추종과 보상(28~31절)에 대한 중요한 가르침들이 삽화처럼 다루어진다.
이혼에 관한 논쟁 (10, 1~12)
한국사회의 이혼율이 세계 몇 위 안에 든다는 반갑지 않은 보고가 벌써 몇 해째 계속되고 있다. 이혼의 증가로 인한 가정해체의 폐해는 고스란히 자녀들의 몫이 되는데 그렇다고 불행한 부부생활의 연장이 자녀양육에 도움이 되는 것만도 아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하고 묻는다(2절). 유다인들은 신명기 24장 1~4절을 내세워 아내의 소박을 정당화하고 있었는데 이혼의 사유라는 것이 여자들의 의사는 전혀 상관 없이 남성 위주로 해석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이혼장을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한 것이지(5절), 이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라고 창세기 1장 27절과 2장 24절을 인용하여 당신의 결혼관을 밝히신다.
“창조의 시작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6~9절)
이는 당시 소유물처럼 여기던 아내를 남성들의 편의에 따라 쉽게 소박하는 폐습을 비판하고 아내를 존중하도록 하는 여권선언이었으며,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가르침으로써 혼인의 거룩함과 가정의 소중함을 강조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혼 단죄 말씀이 이미 초대교회부터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르코 교회가 예수님께서 이혼 자체를 단죄하기보다 이혼한 다음 재혼하는 것을 금하셨다고 풀이하였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따로 말씀하신 내용에서 짐작할 수 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혼인하면, 그 아내를 두고 간음하는 것이다.”(11절; 병행 루카 16, 18). 그리고 12절에서는 “또한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혼인하여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반대의 경우를 가정하는데, 이런 말은 여자에게도 이혼하고 재혼할 권리를 인정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나 해당되는 말이었지 유다 사회에서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한편 마태오 교회에선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마태 5, 32; 19, 9)라고 “불륜을 저지른 경우”라는 예외 규정을 삽입하는데, 이는 아내의 성적인 부정 행위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마태오 교회의 입장을 반영해 준다.
사도 바울로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뜻에 따라 반이혼률을 주장하지만 부득이 이혼한 경우 재혼만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내는 남편과 헤어져서는 안 됩니다. - 만일 헤어졌으면 혼자 지내든가 남편과 화해해야 합니다. -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버려서는 안 됩니다.”(1코린 7, 10~11).
그러나 혼종혼(비신자 부부)의 경우 한 편만 그리스도인일 때 신자편에서 이혼을 주장해서는 안되지만, 비신자 편에서 이혼하려고 하면 갈라서도 무방하다는 예외규정을 만들었다. 그리스도인의 평화를 위해서라는데, 그러니까 1세기 교회에서는 이미 예수님의 반이혼률이 완화되었음을 보여준다(1코린 7, 12~15).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 율법이나 규범을 넘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반이혼법을 제정하셨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남편들에게 남녀의 동등성과 결혼의 신성함을 깨우쳐 준 가르침이라고 하겠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원칙적으로 고수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법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구원경륜 안에서 문제를 풀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교회 내 신자들의 이혼과 재혼의 문제에 대해서 윤리신학자 베른하르트 헤링 신부의 저서 <이혼자에게 출구는 없는가?>(이동익 역, 성바오로출판사, 1999)에서 지혜로운 해답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7월 30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4. 어린이와 하느님 나라 (마르10, 13~16)
앞서 이혼에 대한 논쟁(10, 1~12)에서 약자인 여자들의 입장에서 혼인해소불가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이제 자연스럽게 또다른 약자인 어린이에 대한 말씀을 듣게 된다. 당시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어린이는 법적 권한이나 사회적 지위가 없는 약자 중의 약자였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14b절)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인간 세상의 논리를 뛰어넘는 혁명적인 발언이었다. 산상 설교(마태 5~7장)와 마리아 찬가(루가 1, 46~55)를 상기시키는 이 말씀은 하느님의 통치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선정(善政)임을 가리킨다. 어린이들은 상처입기 쉽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느님 나라가 어린이들처럼 약하고 힘없는 이들의 차지라는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겠는가?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15절). 하느님 나라는 바리사이처럼 열심히 공덕을 쌓아서 스스로 차지하는 소유물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는 무상의 선물로 다가오시는 역동적인 하느님의 다스림이시기에, 인간의 업적을 넘어서며 궁극적으로 그 완성은 종말론적 전망 안에 놓여 있다.
이제 한 폭의 그림처럼 예수님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시는 광경을 만난다. 어린이들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들의 부서지기 쉬운 연약함, 작은 것에도 감탄할 줄 아는 순수성, 무조건적인 순응성이다. 어린이들은 하느님 나라를 자기 방식으로가 아니라 하느님의 방식 그대로 수용하고 선물로서 받아들인다.
부와 가난 (10,17-31)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난을 선택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으로서 부와 가난에 대한 윤리적인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 내용들이 세 가지 에피소드로 전해진다. 첫째는 어느 부자가 자신의 재산 때문에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르지 못했다는 이야기이고(10, 17~22), 두 번째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고 가르치신 내용이고(23~27절), 세 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 대한 현세와 내세에서의 보상(28~31절)에 대한 말씀이다.
어떤 부자가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잘 지키며 열심히 살아온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셨다고 하시는데, 그래도 제자됨에 부족함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21절). 그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어 슬퍼하며 떠나갔다고 한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23절). 경제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영적으로‘특전적인’ 입장에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재물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은 눈을 돌려 하느님의 선물에 관심을 두려 하지 않는다. 가난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겠지만, 제자직에 방해가 되는 것은 철저하게 포기할 수 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앞서 파견 설교에서 보았듯이(6, 7~13) 유랑전도사의 생활이란 간소할 수 밖에 없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은 가난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사명을 수행하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지상적인 것들을 떠나야 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29-30절).
예수님의 사명에 동참한 제자들에 대한 보상은 단지 종말론적일 뿐 아니라, 현재적이고 교회론적이다. 그들은 가족과 소유물을 떠났지만 새로운 가족과 소유물을 갖게 되었고,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의 열매를 맺은 씨앗처럼 풍요로운 결실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보상 목록에서‘아버지’가 빠진 것은 하느님의 새 가정 안에서 가부장적 지배가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는,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8월 13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5. 세 번째 수난 예고 (10, 32~45)
예루살렘 상경기 안에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가 세 번에 걸쳐 실려 있다. 각각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 제자들의 몰이해, 그리스도론과 제자직분에 대한 가르침의 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행선지를 잃을세라 간간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점진적으로 수난과 죽음의 긴장감이 고조된다.
셋째 수난 예고 (32~34절)
예수님과 열두 제자, 그 밖의 다른 일행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고 있다. 갈릴래아에서부터 따라온 여인들도 그 일행과 함께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의 태도가 비장하다. 죽음의 장소를 향해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으시는 예수님의 태도와, 놀라움과 두려움으로 마지못해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 일행의 태도가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따로 불러 당신께 닥칠 일들을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한다. 그들은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당대 이스라엘 최고의회의 중심 세력인 수석 사제(대제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고, 그러면 그들은 예수님을 다른 민족들(로마인 빌라도)에게 넘겨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을 요약하여 놓은 듯 셋째 수난 예고는 다른 두 예고보다 명확하고 상세하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 (35~40절)
앞서 두 번째 수난 예고 다음에 나왔던 서열 다툼이(9, 34)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으로 더욱 실감나게 부각된다. 아마도 이 논쟁은 예수님의 추종자들 사이에 큰 쟁점으로 떠올랐던 문제인 것 같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은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재림하시는 때에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도록 해 달라고 청한다. 스승이 지상에 메시아 왕국을 세울 날을 은근히 기대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을 가까이서 보좌하겠다는 뜻은 좋으나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하느님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교육 방식으로 그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신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39b~40절).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수난의 고통에 동참하여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의 주권은 하느님께 속하는 것이므로 누가 오른쪽 혹은 왼쪽 자리를 차지할지 논할 바가 아니다.
잔과 세례는 죽음을 강력히 시사하는데, 내용으로 보아 훗날 야고보와 요한이 순교한 다음에 어느 전승자에 의해 덧붙여진 말인 것 같다.
섬기는 사람이 되라 (41~45절)
야고보와 요한의 말에 불쾌해 하는 다른 열 제자를 향해 예수님의 리더십 강의가 펼쳐진다.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지만, 하느님 나라의 통치는 오히려 높은 사람이 종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하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무슨 역설적인 가르침인가?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45절)
예수님의 죽음 해석의 배경에는 이사야서에 나오는 신비로운 인물 ‘주님의 종’에 대한 노래 네 편(이사 42, 1~9; 49, 1~7; 50, 4~9; 52, 13~53, 12)이 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의 종’에 나오는 인물로 이해했던 것 같다.(사도 8, 26~40 참조)
특히 주님의 종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목숨을 바친다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의 죽음은 ‘주님의 종’의 죽음 해석을 전제하고 있다.
‘많은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겠는데,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온 인류’로 확대해석하여 예수님의 죽음은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대속죄행위로 본 것이다.
과거 노예나 포로를 해방하여 양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몸값(贖錢)을 치뤄 속량(贖良)을 해야 했다. 이처럼 예수님의 대속죄적인 죽음은 온 인류를 죄로부터 구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평생 몸을 낮추어 봉사의 삶을 사시다가 마침내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하심으로써 그 사명을 완수하신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8월 20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5. 예리고의 소경 바르티매오를 고치심(마르 10, 46~52)
예수님의 일행이 어느 새 예리고에 이르렀다. 예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4㎞ 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시로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거의 끝나가고 본격적인 수난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고한다.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첫머리에 베타니아의 소경 치유(8, 22~26)가 실렸던 것처럼 이제 여정의 끝자락에 비슷한 소경 치유 이야기를 실어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제자교육과 관련된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두 소경 치유사화 안에는 어떤 발전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베싸이다의 소경 이야기에서는 눈먼 이가 타인의 손에 이끌려 예수께로 온다.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두 눈에 침을 뱉고 손을 얹는 등 길고 복잡한 치유과정을 거쳐 점진적인 치유행위를 해 주시는데, 이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고 그분의 참된 제자가 되는 길이 길고도 험한 길임을 예시한다. 소경은 치유를 받은 후에 다시 집으로 보내지고 마을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함구령이 내려진다.
이에 비해 바르티매오 이야기에서는 등장인물의 성격이 뚜렷하고 복잡한 과정 없이 즉각적이고 완전한 치유를 받게 된다.
처음부터 그의 이름은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고 분명하게 밝혀지고 주체성이 뚜렷한 주인공으로 드러난다. 그는 눈먼 거지로 길가에 앉아 구걸을 하는 처지지만, 매우 적극적이고 용기 있는 성격의 소유자로 예언적인 통찰력이 돋보인다.
“다윗의 자손(아들)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47절) ‘나자렛 사람 예수’가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바르티매오는 외치기 시작한다.
바르티매오란 이름이 인간 아버지와의 연관성을 나타내듯, ‘다윗의 자손(아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상적인 성군 메시아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리라는 믿음을 담고 있다.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메시아’이시라는 것을 환기시키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이스라엘이 되어 구원을 요청한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그의 청원은 단순히 신체적인 치유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하느님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외치던 탄원과 같은 것이었다.(시편 6, 3; 9, 14; 40, 12 ; 123, 3 등)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는다. 신앙고백과 같은 바르티매오의 외침이 군중들에게는 아직 메아리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비록 눈먼 소경이지만 어떤 확신으로 다시한번 메시아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그는 그를 가로막는 힘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49절)라고 계속하여 외친다. 아마도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어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갑자기 이야기는 반전되어 모든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고 부르심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예수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 오너라”고 말씀하신다(49절).
일대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옆에 있던 사람들의 태도도 바뀌어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라고 말한다. 그러자 소경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응답한다. 그의 태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과 닮았다. 그의 적극적인 태도는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범적인 제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51a절). 이 질문은 앞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에게 하셨던 질문과 같은 것이었다(10, 36). 예수님께서는 그가 스스로 하는 일이 무엇인지 주체성을 가지고 행동하도록 초대한다.
“스승님(랍부니),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랍부니’(아람어)라고 애정어린 호칭으로 예수님을 부르는 그는 청하는 분이 누구신지, 또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다시 보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으로 보아 그는 태생 소경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소경이 된 후 그가 상실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a절)고 말씀하심으로써 그가 육체적인 치유 뿐 아니라 근원적인 구원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확인시켜 준다. 시력을 회복한 것 이상으로 그의 영적인 통찰력이 회복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곧바로 시력을 선물로 받고 예루살렘으로 가게 된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따라나서게 된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6년 8월 27일, 최혜영 수녀(성심수녀회, 가톨릭대 종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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