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구약] 지혜, 지혜문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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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10-07-25 | 조회수4,164 | 추천수1 | |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지혜 (1-2) : 예언운동 계승한 새 패러다임
지금까지의 이야기
지난주까지 우리는 시편 전반에 대한 개관과 소개를 통해 시편의 여러 특성들을 살펴보았다. 또한 시편의 유형들 중 가장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찬양시」와 「탄원시」를 선택하여 직접 다루어보기도 하였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지금까지 소개된 내용들 잠시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 보아야 할 것 같다.
올 초부터 구약성서의 「성문서」 부분을 살펴보는 것으로 시작된 우리의 여정을 통해, 성문서는 크게 「시문학 작품」과 「지혜문학 작품」으로 되어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우선적으로 살펴본 것은 시문학 작품, 즉 시편이었다. 지난주를 끝으로 시편에 대한 설명이 마무리되었고, 이제 우리는 성문서의 또 다른 부분, 지혜문학의 세계에로 들어가려 한다. 언제나처럼, 우선 지혜문학이란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여정을 시작하고자 하며, 따라서 앞으로 몇 주간은 이 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이다.
지혜문학적 성격
성문서가 「기록된 글」(The Writings)들의 선집(collection)이라는 사실은 이 지면에서 이미 몇 차례 반복된 내용이다. 즉, 성문서는 일정한 문학적 특성이나 문체적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그룹이 아니라, 시, 역사 소설, 잠언, 이야기, 노래, 우화, 묵시 등 다양한 양식의 연합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문서의 이러한 복합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게 하는 공통적 특성이 있으니, 바로 「지혜 문학적」이라는 성격이다. 즉, 성문서에 해당되는 여러 작품들은 서로 각기 다른 장르, 형식을 드러내고 있지만 모두 지혜문학적 요인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공통적이라는 것이다.
예언운동과 지혜문학
이스라엘의 「예언운동」은 사마리아 멸망(722)과 유배(587)를 중심으로 급격히 성장한 일종의 대사회적 운동(movement)이었다고 할 수 있다(물론 예언 현상의 기원은 훨씬 이전에서부터 찾아야겠지만 말이다). 예언이라는 양식을 통해 하느님의 계시에 접근하고, 이를 통해 난국과 유배라는 시련의 순간을 극복하고자 했던, 이스라엘 나름대로의 신학적 대안이 바로 예언운동이었던 것이다. 유배에서 돌아와 곧 바로 시도되었던 새 이스라엘의 정립은 성전재건을 중심으로 주도되었고, 후기 예언자들은 이러한 현안에 열광주의적 입장을 보임으로써 당시의 혼란을 해결하고 대의를 규합하고자 한다.
그러나 성전이 재건되어도 사회적 불안정과 정치적 부조리, 종교의 부패가 호전되지 않자, 이스라엘 내부는 더 이상 예언자들이 주창하였던 사회 개혁 패러다임에 편승하지 않게 된다. 어긋나기만 하던 예언자들의 약속은 더 이상 이스라엘 내부 안에 설자리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예언문학의 붕괴와 함께 이스라엘 안에 또 다른 현실적 대안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묵시문학」과 「지혜문학」이었다. 결국 묵시문학과 지혜문학은 예언운동의 바통을 이어받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이었던 것이고, 이를 중심으로 성문서의 여러 작품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문학 고찰을 시작하며
권위 있는 과학 학술지로 유명한 네이처(nature)는 지난 12일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의 화석이 아마도 현생 인류의 시조일 것이라는 논문이었다. 기사를 읽으면서 흥미로웠던 것은, 인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설들이 등장할 때마다 중심 이슈로 거론되는 주제는 바로 발견된 두개골의 뇌용적에 대한 것이라는 점이었다. 뇌용적의 크기로 보았을 때 단연코 가장 지능적 동물이라고 간주되는 인간! 하지만 그저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 「지혜롭다」는, 수준 높은(?) 형용사를 인간에게 붙여줄 수 있을 것인지, 매일 넌센스로만 가득한 한국의 신문기사들을 대하면서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이번 주부터 시작된 지혜문학에 대한 고찰이, 인간을 진정 다른 동물과 차별화 시키는 결정적 지혜란 무엇인지, 그리고 정녕 지혜롭기 위해 자신과 사회에게 가차없이 가해야 할 진정한 고발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숙고하게 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해 본다. [가톨릭신문, 2003년 6월 2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순수’ ‘정직’은 지혜의 다른 이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음악 테이프도 너무 많이 들으면 늘어지는 것처럼, 너무 많이 오는 비를 보니 온 몸이 늘어지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피해 소식과 교통사고 소식은 이내 보도를 접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무너지게 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브레이크를 밟게되면 자동차가 원을 그리며 돌게 되는데, 이 때 주변에서 달려오던 차와 충돌하게 되면서 대형사고로 이어지게된다.
이런 사고는 바퀴와 도로 사이가 밀착되지 않고 비 혹은 눈이라는 「이물질」이 끼어 들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도로와 바퀴만이 존재해야할 순수 공간에 비(눈)라는 불청객이 끼여듦으로써 바퀴는 도로에 착지하지 못하고 흔들리게되는 것이다.
지혜문학에서 말하는 지혜가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느님-나, 인생-나, 너-나, 이러한 모든 관계성이 줄 긍정적 결과는 그 둘 사이의 밀착으로 인해 생겨난다. 만일 그 사이에 이물질이 들어오게 되면 둘 중 하나는 흔들리며 충돌하게 되는데, 흔들려버린 존재도 다치지만, 주변의 다른 존재들에게도 치명적 상처를 입히게 된다.
도로와 차바퀴뿐 아니라 신앙, 일, 사랑에도 이물질의 개입은 언제고 우리를 차선에서 이탈하게 한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순수한 경외말고 다른 마음이 끼여들면 신앙은 무너진다. 성공도 그렇다. 일에 대한 성실과 정직한 노력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와 정직은(이물질이 끼여들지 않은) 「지혜」의 다른 이름이며 이러한 지혜는 구원, 생명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지혜(호크마)의 어원적 의미
이제 좀 더 학문적 차원에서 구약성서 「지혜」라는 용어를 살펴봐야겠다. 히브리어로 지혜는 「호크마」(그리스어로는 「소피아」)라고 하는데 구약성서에서 318번 등장하며, 그 반 이상이(138번) 잠언, 욥기, 전도서에 등장한다. 매우 「성문서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이 단어가 등장하는 책들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셈이다. 원래 「지혜」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처럼, 지식이 많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사람 혹은 태도를 표현하거나,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솜씨, 기술, 테크닉, 방법, 수단 등 다소 「경험적인 기술」을 의미하는 말이었다(창세 41, 33 ; 신명 1, 13 ; 2사무 14, 20 ; 판관 28, 14 참조)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 『지혜』(호크마)는 사변-이론적 능력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솜씨, 기술 등 실제적인 것(이론적인 것이 아니라)과 관련된 능력을 말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성적 차원보다는 경험의 중요성이 부각된 용어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구약성서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지혜는 점쟁이, 마술사, 해몽가, 건축가, 기술자, 항해사(1열왕 9, 27; 22, 48~49; 에제 27, 8), 조각가(출애 35, 31~33), 시인, 가수, 연주가(1열왕 5, 10~12) 직물 짜는 사람(출애 35, 25), 대장장이(예레 10, 9), 직업적으로 곡하는 사람, 제사장, 서기관, 재판관, 왕 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는 이들이 이론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기술과 솜씨들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적용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왕을 지혜로운 자라고 일컬었던 이유는 그가 백성을 통치하는 「솜씨」와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는, 다분히 경험적 측면의 기술인이라는 이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혜문학이 언급하는 지혜는 나와 그(사람, 사건, 사물, 하느님)를 이어주는 가장 순수한 힘이며 역동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진실과 순수 보다 위대한 힘은 없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억지스럽기 만한 세상, 진정한 지혜를 발견하지 못해 흔들리며 가고 있는 세상을 향해 지혜문학이 선포하고자 하는 구체적 전략이며 지혜의 메시지이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공론에만 머물며 권력과 자본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전락해온 세상의 얄팍한 지식에 일침을 가하는…. [가톨릭신문, 2003년 7월 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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