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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욥기: 입문적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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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6 조회수4,247 추천수1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욥기 (1-2) : 입문적 개관 (1-2)

 

 

욥기의 핵심 주제 - ‘부재와 현존의 경계’

 

부재와 현존을 구분 짓는 지표는 무엇일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부재 한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음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이에 대한 구분이 얼마나 애매한 것인지에도 긍정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라 하더라도 그의 내면과 나의 내면이 만나지 못한다면, 그는, 내 앞에 있는 그는, 내게 없는 존재일 뿐이다.

 

욥기는 바로 이러한 「부재」와 「현존」에 대한 아슬아슬한 경계를 화두로 삼고 있는 책이다. 현존하고 있지만 그의 내면을 만날 수 없을 때, 그는 나에게 늘 타인이듯, 현존하시지만 내가 그분의 현존을 「발견」하지 못할 때, 하느님은 죽었거나(사신신학), 혹은 부재(무신론)하시는 듯이 보일 수밖에 없다. 20세기 전반, 두 차례의 세계대전 이후, 많은 지성인들을 열병에 걸린 듯 전염시킨 「실존주의」는 유감스럽게도 신의 죽음을 슬로건으로 삼은 무신론적 사조였다.

 

전 세계를 피와 죽음으로 물들게 한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도대체 신은 존재하고 있었는가? 그들이 제기했던 비수 품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실존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신의 죽음을 「겁없이」 선고하기에 앞서 짚어봐야 했을 것은 없었는지,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 것」과 「실제적 부재」 사이의 분명한 차이를 진지하게 고민해보았는지를 성찰한다. 나(인간)의 역량부족으로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하느님)가 부재한다고 단정지었던 만용은 전적으로 인간인 우리가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고통과 그 본질을 집요하게 파헤쳐 온 욥기에 접근해 보고자 한다.

 

성서가 제시하는 고통의 문제, 그로 인한 하느님 부재 선언을 새로운 시각으로 고찰해 보고, 욥기의 저자가 언급하고자한 진정한 신학적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욥기의 중요성

 

1952년, 사해 문서 발굴이 한창일 즈음 욥기의 히브리어 사본도 발견되었다. 이 사본은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욥기가 차지하던 위상을 뚜렷이 제시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는데, 바로 사본의 「서체」 때문이었다. 발견된 사본은 놀랍게도 모세오경에만 제한되던 특별한 서체로 기술되어있었던 것이다. 「토라」라고 불리며 이스라엘 경전의 중심 축으로 군림해오던 모세오경은 그 독보적인 위치를 다른 성서 작품들과 차별화시키기 위해 독특한 서체로 필사되곤 하였었다. 그런데 이와 동일한 서체가 욥기의 필사에도 적용되었음이 드러남으로써, 욥기가 모세오경과 견줄 만한 비중 있는 책으로 여겨졌음이 단적으로 제시된 것이다.

 

 

고대 근동 문학과의 관계

 

「의인의 고난」이라는 주제는 비단 욥기만의 독특한 주제는 아니었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학작품들 안에서 이 주제는 자주 발견되는 것이었는데, 수메르(기원전 3300년경) 지역에서 출토된 「사람과 그의 신」, 『「수메르 욥기」 등이 이 주제를 다루고 있으며, 아카디아어(기원전 2300년경)로 저술된 「바빌론 신정론」, 「바빌론 전도서」, 「인간의 비참함에 대한 대화」 등 역시 동일한 소재로 되어 있다. 이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는 내용은 고난 당하는 주인공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신에게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성서 욥기는 고통으로부터의 수동적인 해방만을 갈망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불사하면서까지 하느님을 만나고, 자기 고통의 부당함을 알리려는 자세를 부각시킨다. 즉,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에만 연연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정면에서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가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워지길…

 

사람들이 동경하는 것의 실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체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쩌면 그러한 동경은 이미,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절실함과 간절함은 아닐는지…다시 돌아온 가을, 보이지도 않고, 쉽게 느껴지지도 않는 하느님이지만, 그분과의 만남을 위해 분투하는 욥의 여정을 통해 좀 더 성숙한 신앙으로 아름다워지기를 희망해본다. [가톨릭신문, 2003년 9월 28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고통의 소용돌이 속에서 저술된 욥기

 

잊어야 하는데,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괴로운 흔적들이 있다. 고통은 어쩌면 잊어야할 것을 잊지 못하는데서,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을 이내 잊고 마는데서 생기는 불편한 부조리는 아닐는지. 남부 지방 전역을 강타한 폭풍 매미로 뜬눈으로 지새운 그 밤과는 달리 다음날 올려다 본 하늘은 거짓말처럼 높고 청명했다. 이럴 수가, 하는 마음에 무서웠던 어제와 잔잔한 오늘이 도대체 연결된 밤과 아침인지 조차 혼란스러웠었다.

 

하루밤사이에 삶의 터전을 잃은 분들께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간의 고통 안에는 어떤 방식으로건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했으면 한다. 아침 미사 가는 길에 발견한, 완전히 박살난 정원의 화분들과 뿌리째 뽑혀져 있던 나무들을 보면서 복잡한 생각들이 교차했지만, 옆에 있던 분의 말씀이 모든 근심과 흔들리는 마음을 단번에 날려주었다. 잘되었네요. 어차피 화분도 분갈이하고 정원도 다시 손질할 생각이었는데…. 흔들림과 고통을 해결해 주는 것은 의외의 태연함과 단순한 마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인간 고통의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한 욥기를 살펴보고 있다. 이번 주에는 저자와 그 시대적 배경 문제를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저자

 

지난주에 필자는 「인간의 고통」이라는 주제가 비단 성서 욥기에만 등장하는 특별한 주제가 아님을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해, 이미 전해져 내려오던 근동 지역의 여러 책들이 동일한 주제를 기술하고 있었고, 욥기 저자는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이 작품들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추정되고 있는 것이다. 욥기의 내용과 문체를 분석해볼 때, 분명하게 인식될 수 있는 특징은, 저자가 당시의 국제 문학에 정통했다는 것, 그리고 당시 고대 근동 지역에서 유행했던 대화법 문체에 정통했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요인들 때문에, 한 때 성서학계는 욥기의 저자를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외국의 인물로 추정하였다. 1) 외국 사고방식과 외국 지혜문학의 흔적을 자주 발견할 수 있다는 점, 2) 이스라엘의 고유 신학 사상, 예를 들어 출애굽 사건이라거나 시나이 계약 등이 부재하고 있다는 점이 그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결국 학계는, 욥기가 이스라엘 외부의 인물에 의해 외국어로(아랍어) 쓰여졌거나, 아랍어로 쓰여졌던 것을 후에 다시 히브리어로 옮긴 것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성서학계는 욥기의 저자가 이스라엘 출신이었음을 확신하는데, 특별히 시문 부분에서 발견되는 기존의 성서 전승들(예레미야의 고백록, 시편, 잠언 등)에 대한 인용과 적용이 매우 적절하고 수려하다는 것을 통해 저자가 이러한 유다 성서 전통에 정통했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대적 배경

 

욥기 저자에 대한 물음은 이 책이 언제, 어디서 서술되었는지에 대한 논란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여러 가설들이 제시되었지만, 한가지 명백한 것은 이 책의 드라마는 극심한 고난의 한복판, 고통의 소용돌이 안에서 생성되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학자들이 제안한 욥기의 저술 시기는 다음 세 가지로 구분된다. 1) 유배 중 2) 유배 이후, 성전 재건 시기 3) 500~350년 경.

 

그러나 욥기에 등장하는 여러 다양한 괴물들의 이름, 그리고 명백히 등장하는 사탄의 존재 같은 소재들은 상당히 후대적인 사고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기에, 욥기가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 최종 형태를 갖추었을 것이라고 보고있다.

 

고통과 죽음은 다시 살아남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삶의 모퉁이이다. 그 모퉁이를 돌아서면 생명과 빛을 만나게 되지만, 그 모퉁이를 돌기 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고통은 하느님의 부재로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저 막연한 관계로만 있던 당신과 우리의 관계를 좀더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것으로 하기 위한 은총의 장임을 욥기는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오늘 우리의 시련이 대한민국의 현실과 우리 자신의 진실을 다시 한번 닦아내는 자립과 의지의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가톨릭신문, 2003년 10월 5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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