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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구약] 욥기가 제시하는 고통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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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7-26 조회수4,241 추천수2

[김혜윤 수녀의 성서말씀나누기] 욥기 (5-7) : 욥기가 제시하는 고통의 변증법 (1-3)

 

 

‘고통’을 죄의 결과로 인식

 

「반전」이나 「올인」이라는 말이 유행인 듯하다. 절체절명의 고투를 계속하다가 가진 것을 모두 거는 승부수를 던진 뒤, 막판 뒤집기로 승자가 되겠다는 결론, 누구에게나 숨겨져 있는 영웅심을 자극하는 비상한 전략이기도 하지만,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21세기식 도박이기도 하다.

 

욥기의 저자는 마지막까지 해결의 실마리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욥으로 하여금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 해답을 찾게 하는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극도의 부정과 저항 이후에 오게되는 전적인 긍정을 유도하고 있다고나 할까. 욥기의 이러한 구조를 학계는 독일 「관념론적 변증법」에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하는데, 프레드리히 헤겔에 의하면 만물은 「변증법적 원리」에 의해 생성 발전된다. 「정」(正,These)이 있으면 이와 대립되는 「반」(反, Antithese)이 생기기 마련이고, 이 대립의 고통스런 과정은 「합」(合, Synthese)이라는 결론을 창출해낸다는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욥기가 제시하는 「정」(正)의 입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 「정」이 만나게될 「반」과 「합」의 결론은 다음 주에 제시될 것이다.

 

 

정(正)의 입장

 

욥기의 저자가 먼저 부각시키고자 했던 「정」의 입장은 「친구들의 주장」을 통해 표현된다. 이들의 논지를 요약하자면, 고통의 일차적 원인은 바로 고통 당하는 당사자의 죄에 기원한다는 것인데, 즉 고통을 죄의 벌(결과)이라고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어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욥의 친구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이스라엘 전통 안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신명기적 사고방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 사조의 가장 큰 특징은 철저히 「결과론적인 입장」(인과율의 법칙)을 취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고통(결과)을 죄(원인)로 인한 벌이라고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세」가 없다고 믿었던 구약성서의 고대적 세계관에 근거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모두, 악인이건 선인이건 예외 없이, 「쉐올」(죽음의 나라)에 가게된다고 믿었었다. 이러한 관점은, 선한 이는 반드시 살아생전에 축복을 받아야 하고, 악인은 죽기 전에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정식을 도출시킬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후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된다면 선행의 결과는 반드시 생전에 보상되어야 공평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스라엘은 객사나 요절, 급작스런 재해, 질병, 사고, 불임 등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이라 여겼고, 장수, 무병, 부귀, 영화는 하느님께 성실했던 이들에게 주시는 보상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이러한 논지를 수긍하지 못한다. 그가 계속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자신의 무죄함이었고, 따라서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바 없으니 현재의 고통은 부당한 것임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이러한 욥의 억울한 심정은 이어지는 욥의 항변 부분(「반」(反)의 입장)에서 제시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을 잠적시키는 이론

 

인간은 누구나 자기 민족의 고유한 전통과 의식에 영향을 받고 조정된다. 이러한 전통적 사고는 인간 안에 뚜렷이 각인되어 결코 포기할 수도, 소외시킬 수도 없는 깊은 정체성으로 작용하지만, 때로는 완고하고 절대적인 족쇄가 되어 현재의 삶과 인간 스스로를 가두는 폐쇄성 짙은 폭력으로 변하기도 한다. 제도와 관습이 지나치게 강조되다 보면 인간이나 삶이라는 주체는 소외되고 마는 당착(撞着)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욥기의 저자는 당시의 독자들에게는 절대적이었던 기존사고의 부실과 착오를 의도적으로 노출시킴으로써 유다 민족을 둘러쌓고 있던 치명적 벽을 과감히 철거한다.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제도이자 이론이라고 절대적으로 신성시되어온 전통적 사상이지만, 어느새 하느님과 인간은 간데 없고, 맹목적 집착과 소외만 남아있는 억압기재로 전락했다면 그것은 벗어나야할 과거의 그림자일 뿐이었다. 제도나 이론 자체가 하느님과 인간을 가로막지 않도록 불순물을 제거하고, 보다 진정하고 흐뭇한 관계로 돌아가자는 것, 욥기가 제시하는 혁신적 신학이며 탁월한 지혜였던 것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2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인간은 누구나 ‘죄인’

 

「이번만은」 감기 없이 지나가겠다고, 제일 먼저 주사도 맞고, 귤도 한 바구니씩 사서 열심히 먹어보았지만, 결국 「이번에도」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차라리 걸리고 나니, 감기를 피해 다닐 때 보다 마음이 편하다.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노력할 땐 모든 것이 노심초사이고 불안하지만, 차라리 배신당하고 나면 의외의 꿋꿋함이 발휘됨과 비슷하다고나할까. 잠시동안의 불쾌감만 참을 수 있다면 실패나 고통은 오히려 「기회」라는 생각도 잠시 해본다. 나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때, 삶은 비로소 「다시 시작되는 것」이니 말이다. 스스로의 무죄함을 주장할 때는 모든 것이 지독한 굴레이더니, 차라리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인정하면서부터 욥은 드디어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이러한 궤적을 「반(反)」과 「합(合)」의 입장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자.

 

 

반(反)의 입장 : 욥의 항변

 

지난주에 소개한 「정」(正)의 입장(신명기적 사고방식)은 철저히 인과응보에 기초한 윤리적 사상으로, 이스라엘이 왜 선하게 살아야하는지를 잘 제시해주고는 있었지만, 「무죄한 이들의 고통」이나, 열심히 살아왔지만 불시에 고통을 당해야했던 이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었다. 고통을 죄의 결과라고 본다면, 어린 아가의 죽음이나 죄 없이 살아온 욥 같은 사람이 당하는 고통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결과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유배와 유배 이후 혼란기라는 극도의 고통을 체험하면서, 일 안 해도 잘먹고 잘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로 어렵게 살아야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복잡한 세상의 현상들을 상선벌악 이론이나 단순한 공식만으로는 모두 다 설명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 안에, 기존의 신명기적 사조(전통의식)는 서서히 그 의미를 상실해갔고, 심지어 인간들은 무죄한 이들에게 고통을 허락하는 하느님을 「폭력적」 존재로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사상의 변화를 욥기는 욥의 항변을 통해 여실히 제시하고 있다. 욥의 무죄선언은 곧, 그에게 고통을 아무런 이유없이 허락한 폭력적 하느님에 대한 고발이었던 것이다.

 

 

합(合)의 입장

 

욥의 친구들의 주장과 욥의 항변이 통합되지 못한 채, 서로의 갈등이 극대화될 무렵 하느님께서 직접 등장하심으로써 답을 제공하신다. 그런데 답을 주시는 방법이 좀 각별하다. 욥의 도발적 저항에 똑부러지게 응수할만한 대답을 주시는 대신, 천체와 자연세계를 보여주시며 그 모든 것의 주인이 누구인지 만을 상기시키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발생한 건 그 때였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는 명제는 곧 자기 자신의 주인 역시 하느님이시라는 것에로 귀결되었다. 즉, 욥은 인생에서 만나게 되는 행복, 불행, 고통, 성공, 실패가 그 어느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니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느님에 의한, 하느님 자신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결국 지금까지의 불평과 억울함은 자기 삶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착각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된 순간 욥은 더 이상의 항변을 그치게 된다. 더불어, 무죄함에 대한 주장 역시 자신의 교만에서 나온 결과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세상 어디에도 죄 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 「무죄하다」는 판결은 철저히 자기의 주관적 판단에 의한 규정이지, 하느님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시작하고 싶은 분들께

 

한동안 방에 사막 사진을 걸어두고 본 적이 있었다. 사막을 다녀오신 어느 분의 말씀이 마음에 남아있어서였다. 그곳에 가면 무엇이 세상의 중심인지를 알게 된다고 했던가. 바람과 모래, 별과 태양이 살아있는 그곳에서 인간은 그저 피조물일뿐, 진정한 주인은 하느님 한 분뿐이심을 새삼 느끼게 된다는 거였다.

 

불평, 불만, 분노는 삶의 주인이 「나」라고 자부한 오만함에서부터 기인된다. 나의 죄를, 한계를, 초라함을, 그리고 나의 실패를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언젠가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하시는 분들께, 그리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다.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9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고통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

 

우리는 지난 2주간에 걸쳐, 욥기가 모색하고자 한 진정한 기능을 정(正)반(反)합(合) 이론을 통해 알아보았다. 저자는 고통이 죄의 결과가 아니며, 오히려 하느님을 직접적으로 만나게 하는 은총이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인간 본연의 현실(한계를 가지고 있는 죄인이며,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을 깨닫게 하는 지혜의 장이라는 것을 새롭게 제시함으로써, 고통에 대한 신학적 재해석을 시도해 놓았다.

 

 

혁명적 시도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고통을 「긍정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누구도 예외 없이 마주해야 하는 삶의 딜레마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러한 긍정적 시각은 「십자가상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절대적 신조를 준비하는 원천이 되기도 하였다. 유다 사회 안에서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던 신명기적 사고는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영향력은 무엇보다도, 율법학자들과 기득권층(바리사이파, 사두가이파)의 지지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미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는 기득권층에게, 자신들의 호화롭고 안락한 생활을 스스로의 선행과 바른 생활에 대한 축복의 결과라고 설명하는 신명기적 인과율보다 더 기특하고 충성스런 논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더욱 절대권을 실어주기 위해서 그들은 상대적으로, 나병환자, 창녀, 세리, 불임 여인, 소경 등을 부정한 이들이라고 치부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규정된 그들은 철저히 격리되어 존재해야할 이들이었고, 죄인에 상응한 모욕과 천대, 소외 무시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폭력적 시선과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하며, 그들 죄인과 한자리에서 먹고 생활하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심」으로써 완쾌시켜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분명, 당시의 기득권층과는 대립될 수밖에 없던, 그러나 욥기의 의식과는 분명히 한 연장선에 서있었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메시아관의 변화

 

이러한 사고의 전환은 그들의 오랜 소망이었던 「메시아관」과도 직결되어있었다. 이스라엘이 전통적으로 기다려왔던 메시아는 고통(억압과 가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 그리고 죄와 악의 결과인 고통을 영원히 없애주실 분이었다. 유다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할 수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고통스러운 모습」(십자가)으로 죽음을 당했다는데 있었다.

 

그 고통스러웠던 죽음의 현장은 예수님이 절대로 메시아일리 없다는 증거였고, 오히려 저주받아 마땅했던 인물이었음을 증명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나자렛 사람 예수를 두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입장(그리스도교)과 정치범이라고 폄하한 입장(유다교)의 첨예한 대립은, 바로 이러한 고통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부터 기인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아직도,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제시한 욥기적 사고방식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이라는 그리스도교적 정식을 합리적으로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고통을 없애 주시러 오신 분이 아니라, 그 어떤 고통 중에도 우리와 함께 계심으로써 그 고통을 극복하게 하시고, 결국 고통을 넘어서는 구원(부활)에로 이끄신다는 종말론적 희망을 우리 모두에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답을 가지고 있는 고통

 

태어나는 것에 동의한 바 없는데 태어난 것처럼, 많은 관계와 사건들도 내 허락이 없이 불현듯 다가온다. 돌연히 들이닥친 문제들은 우리를 당황하게 하지만, 「모든 문제는 동시에 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답은 나와 통합되지 못한 채 겉돌기만 하던 내 자신의 진정한 얼굴을 마주하게 하는 기회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통은 계속될지 모른다. 나의 진정한 얼굴이 하느님의 얼굴(모상)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될 때까지는…. [가톨릭신문, 2003년 11월 16일, 김혜윤 수녀(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광주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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