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카니벌리즘의 부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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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중규 | 작성일2001-03-05 | 조회수4,317 | 추천수0 | |
현대 그리스도교계에 유행하듯 풍미하는 종교예식의 간소화 경향은 현대전위 실험극에서의 일반적 현상인 연극무대공간의 경직성적 빈곤과 통한다. 그리하여 현대연극이 일반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되었듯, 대중의 순진스런 마음은 그렇게 변해 버린 종교예식에서 생경함을 느끼고 교회를 떠나간다.
여기에서의 마음은 종교를 한낱 액세서리로나(상류층에서 볼 수 있다) 취미로(젊은이들에게서 볼 수 있다) 여기지 않는 우리 할머니들의 순수한 신앙심을 말한다. 이것이 교회를 세속적 집단의 하나로 전락시키는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사제가 일반신도들을 향해 예식을 행함으로써 화(和)는 얻었는지는 모르나, 성(城)은 잃어버렸다! 물론 그런 변화가 지니고 있는 보다 전향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공감하지 않는 바는 아니나, 사제의 주례(主禮) 아래 모든 신도가 함께 하느님을 향해 공동체 예식을 거행하면서 인간실존적 일체감을 느꼈던 그 깊이 있는 느낌을 상실하게 된 것은 분명 안타까운 점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건물의 멋잃음(화려함을 말할이 아니라 그 어떤 성스러운 아늑한 맛을 내는 분위기 그런 것이다)이나 성물(聖物)에 대한 경시(輕視) 또는 축일이나 주일같은 종교적 잔칫날의 그냥 그렇게 보냄 등등은 종교로부터 열(熱)을 앗아가 버렸다.
그리하여 그 안에서 그렇게 연극적 축제적인 면을 온통 제거해 버리자 종교는 마치 얼굴 없는 유령처럼 ’품’(bosom)을 지닐 수 없게 되었다.
더욱이 그런 것이 진정한 탈우상화를 위한 순수한 종교적 열의에서 비롯되었더라면 그래도 괜찮다 할 수 있겠지만, 기껏 시대적·현실적 요구에서 일어나고 있으니 문제다. 시대적·현실적 요구란 무언가? 기계적·물질적인 비인간화된 사회에서 메마를 대로 메말라 버려 공동체적 친교와 대화를 싫어하고 연극적 취미를 잃어버린 현대인, 한마디로 공동체에의 환희스런 참여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카니벌리즘의 소중함을 알지못하는 그런 인간들이 그러한 천박스런 것들을 마구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어두운 현대세계의 구원을 위한 길로 외친 ’카니벌리즘의 부활’, 그 때 그 카니벌리즘이 뜻하는 바 그 참된 것을 유대 하시딤의 현대철학자 아브라함 헤셸의 말은 나타내 주고 있다. 즉 카니벌리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말은 나의 지닌 바를 그대로 표현해 주고 있다.
"우리들 시대의 인간은 축제의 능력을 잃어 가고 있다. 축제 대신 그는 쾌락과 질탕하게 노는 것을 택한다. 축제는 공경하는 마음 또는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축제는 능동태이다. 질탕하게 노는 것은 수동태이다. 그것은 재미나게 노는 데서, 혹은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에서 오는 쾌락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축제는 인간의 행동의 초월적인 의미와 만나 주의 깊게 마주보는 것이다. 축제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 또는 사람이 우러러보는 것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행위이다. 요즘에는 노래부르기, 소리지르기, 연설하기, 춤추기 등등으로 표현하는 기쁨과 들뜬 기분의 시위운동, 때로는 공중시위운동을 말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밖으로 드러나는 잔치나 공중의 시위운동이 아니라 내면의 감사와 찬양,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에 정신적인 형식을 덧입히는 것이다. 축제를 벌이는 것은 좀 더 커다란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요, 영원한 드라마에 참여하는 것이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행위는 쾌락을 맛보는 데 그 목적이 있지만, 축제의 그것은 영(靈)이시며 축복의 근원이신 하느님을 높이 기리는 것이다."
고대세계의 추수감사절 같은 것이 진실로 그런 것이었는데, 이러한 의미에서의 축제가, 특히 종교의 세계에서 참으로 이뤄질 수 있다면 세계는 치유되고 인류는 구원받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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