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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미사 전례의 발전 역사2: 바실리카 미사 시대(4-5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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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4,180 추천수0

[미사 얼마나 아십니까] 미사 전례의 발전 역사 (2) 바실리카 미사 시대(4-5세기)

 

 

콘스탄티노 대제의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종교 자유를 갖게 되고, 그 여파로 그리스도교가 동서 로마 제국 내에서 국교의 특권을 누리게 됨에 따라 미사를 비롯하여 모든 전례가 급격한 변화와 성장기를 맞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 이루어지던 성찬례(미사)가 신자수의 증가로 큰 규모의 건물로 옮겨짐에 따라 자연적으로 예식도 이전보다 더 길어지고 장엄하게 되었다.

 

당시 로마인의 지배 하에 있던 도시에는 공공건물 중에서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이 세워져 있었고, 주일이 되면 이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이 전례 집회 장소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은 장방형의 건물로서, 그 안쪽에 반원 모양의 마루를 몇 단계로 높인 우묵한 곳을 압시스(Apsis)라고 했다. 그 중앙에 사회자석이 있었는데, 그 압시스에서 반원 모양의 벽을 등지고 말을 하면 그 소리가 건물 전체에 잘 통하게 되어 있었다. 말씀 전례는 성서 봉독이건 설교이건 이 압시스로부터 회중을 향해 행하여졌다.

 

미사 예식 부분에 있어, 동방교회에서 연도(煉禱) 형식의 탄원기도가 시작예식에 도입되어, 교회 공동체를 위해 탄원하는 여러 가지 의향이 제시되었고 이에 대해 신자들은 '기리에 엘레이손'(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이란 말로 대답하였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원래의 공동기원이 서서히 없어지게 되었다. 동시에 공동기원 끝에 하던 평화의 인사도 '주님의 기도' 후, '영성체' 전에 하게 되었다.

 

그리고 구약성서 봉독 후 응답시편을 노래하던 것이 발전하여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은 제단 계단에 올라가서 선창하였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이 부분을 층계송(層階誦)이라 부르게 되었다. 성당의 구조가 커짐에 따라 자연히 봉헌 행렬이 형식을 갖추게 되고, 후에 봉헌기도(예물기도)와 연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날의 전례나 계절을 풍부히 표현해 주는 감사송이 많이 만들어졌고, 미사의 대표적 주례 기도인 '감사기도'는 '로마전문'(Canon)으로 고정되고 통일되었다. 감사기도의 본문인 '로마전문'은 후대에 첨가된 약간의 말을 제외하면 이 시대에 이미 지금의 '감사기도 제1양식'으로 구성되었다.

 

이 감사기도를 주례자는 모든 신자들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하고, 마지막 영광송이 끝나면 신자들은 큰 소리로 "아멘"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예로니모는 신자들의 이 "아멘" 소리가 바실리카 양식 건물에 우뢰처럼 울려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영성체 때 노래하던 시편의 노래가 끝난 후 '나눔의 의식'의 끝맺음으로써 '영성체 후 기도'가 본기도처럼 주례자에 의해 행하여지게 되었다. 미사의 마침예식으로 먼저 '백성을 위한 축복기도'를 하고 '이떼 미사 에스트'(Ite Missa Est)라는 파견사로써 미사를 마쳤다.

 

바실리카 건축 양식이 교회의 전례 집회를 위한 건물로 세워지게 되면서부터는 미사 집전의 중심 장소도 회중의 중앙에 준비했던 나무로 된 식탁 대신에 돌로된 큰 제대로 바뀌게 되었다. 그래서 차츰 식사적인 의미를 지닌 미사가 제사적인 의미로 변모되기 시작하였다.

 

[가톨릭신문, 2004년 2월 8일,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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