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미사 전례의 발전 역사4: 12-19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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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0-29 | 조회수4,247 | 추천수0 | |
[미사 얼마나 아십니까] 미사 전례의 발전 역사 (4) 12-19세기
연출 미사 시대 (12-15세기)
이 시대에는 미사에 대한 연극적이고 상징적인 해설로 인해 전례에서 연출적인 효과를 추구하고 감각적인 요소가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12세기에 이르러서는 제대 위에 촛대가 놓이게 되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장궤하는 행위를 전례 중에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미사는 그리스도의 생애, 특히 수난에서 승천까지의 역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수난극 모양으로 설명되었다. 즉 성체거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을 바라보는 것이고, 마침 영광송 때의 성체, 성혈을 올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유해를 십자가에서 내리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또한 성체를 나누고 그 작은 한 조각을 성혈이 든 성작에 넣는 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다시 합치는 부활을 뜻하는 것으로 설명되었고, 영성체는 그리스도가 부활했을 때 제자들과 식사를 같이 한 것, 파견의 축복은 올리브 산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시며 승천하신 의미로 해석되었다.
주님의 식탁을 상징하는 제대는 신자들로부터 멀어지고 높아져서 근접하기 어려운 것으로 느껴졌다. 성당 안에는 천상 예루살렘을 연상케 하는 많은 성상들이 장식되었고, 이런 경향 속에서 구세주를 뵙고자 하는 마음은 미사 동안 성체를 직시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13세기에는 성체를 높이 들어올리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성체거양이 미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이해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미사 때 이외에도 성체를 보고 흠숭하도록 성체를 성광에 모셔 현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성체성사에 대해 이렇게 강조하다 보니 역으로 영성체에 대한 감소현상이 일어나 제4차 라떼란 공의회(1215)에서는 적어도 1년에 1번은 영성체를 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성체에 대한 과도한 공경심은 영성체 방법에도 영향을 미쳐 성체를 더 이상 손으로 받아 모시지 않고 혀로 받아 모시도록 이끌었고, 성혈은 영하지 않게 되었다. 성가 외에도 음향이 중시되어 '거룩하시도다'(Sanctus)와 성변화 때 종을 울렸으며, 성체 거양 때는 분향도 하였다.
한 마디로 이 시대에는 전례의 언어나 표지가 그 내용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외관에서 본질적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본래의 의미에서 벗어난 알레고리아(Allegoria)적 설명은 미사의 본질적인 부분에 오해를 낳게 하였다. 또한 외적이고 상징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부수적인 것을 미신화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것이 종교 개혁을 일으키게 하는 하나의 연유가 되었다.
루브리카 미사 시대(16~19세기)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은 미사의 제사적 특성, 직무 사제직, 지속적인 성체 현존 등 전통 성체성사 신학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하여 트리엔트 공의회(1543-1563)는 성체성사 교리를 정비, 보강하여 그 신학을 바탕으로 1570년에 비오 5세의 '로마 미사 전례서'를 발간하였다.
이 비오 5세의 '미사전례서'는 거의 대부분의 서방 전례 지역에서 표준 미사 전례가 되었고, 이후 400년 동안 일체의 토착 전례를 배격하고 서방교회의 통일 전례로서 부동의 위치를 고수하였다. 이로 인해 가톨릭 교회의 전례는 400년간 완전히 획일화되고 고정되어 생동감 없는 전례가 되었다.
[가톨릭신문, 2004년 2월 22일, 정의철 신부(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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