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위령] 위령의 날(11월 2일) | |||
---|---|---|---|---|
이전글 | [축일] 포교 사업의 수호자 예수 아기의 성녀 데레사 동정 대축일(10월 1일) | |||
다음글 | [축일] 주님 공현 대축일(1월 1일 다음 주일)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0-29 | 조회수3,650 | 추천수0 | |
11월 2일, 위령의 날 - 죽음을 뛰어넘는 희망의 기도
세상에는 서로 다른 상반된 개념들이 있다. 양지와 음지, 위와 아래, 남과 여, 사랑과 미움 등 이런 것들이 상반된 개념들에 속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 가운데 ’우연과 필연’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우연은 이것이 또는 저것일 수도 있는 경우이다. 결과로 일어나는 현상이 있지만, 꼭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만이 아닌 경우를 ’우연’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연은 꼭 그렇게 이루어지거나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이다. 결과로 귀착되는 것이 당연히 그러한 경우를 ’필연’이라 한다. 그런데 우연과 필연은 서로 넘나든다.
우리의 삶은 우연에서 시작하지만, 필연에로 넘어간다. 인간이 태어나는 일은 ’우연’에 속한다. 물론 새 생명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귀결된 일이지만, 그 속에는 우연이 있다. 곧 ’내’가 태어날 수도 있고, 또는 내가 아닌 ’어떤 이’가 태어날 수도 있다. 여기서 내가 태어난 일은 우연에 속한다. 그렇지만 태어난 나의 삶이라는 과정은 계속해서 우연으로 남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 다음부터 ’내’라는 존재는 필연의 삶을 살아야 한다.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도덕과 윤리규범이 있고, 존재의 이유가 있다. 이것은 필연에 속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필연이다. 당연한 귀결이니까. 그러나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이것은 또한 ’우연’이랄 수 있다.
이렇게 우연과 필연은 서로 이동하고, 필연 속에 우연을 내포하고 있다. 인간 삶 전체가 그런 것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은 ’우연히’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을 사는 일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어떤 ’필연성’이 요구된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루려고 애를 쓴다. 필연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지로 필연적 요구를 통제하고 지배한다. 또 그것을 성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들이 있다. 바로 ’우연’에 해당되는 것들이다. 바로 ’내’가 태어났다는 우연,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그 우연은 인간 능력 밖의 일이다. 이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손에 달렸다고 믿는다. 우리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은 사실 모두 하느님의 능력에 속하는 일이다. 우리가 태어나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가 태어난 일은 하느님의 축복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닥치게 될 죽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팔을 거두시는 것이다. 물론 필연의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보살핌과 보호가 필요한 일이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손에 달린 이것들만큼은 결코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나 능력도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그렇다. 일찍이 ’인간 생명’이 하느님께 속한 것임을 알고 있다. 11월은 완연한 가을이며 겨울의 문턱에 서있다. 낙엽은 지고 생명의 변화에 대해 묵상하게 만드는 좋은 계절이다. 교회는 이 달을 특히 위령성월로 지내고 있으며, 11월 2일은 ’위령의 날’로 정하고 기도한다. 이날은 죽은 이를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래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주님의 손에 달렸음을 깊이 깨우쳐준다.
그렇다면 교회는 망자를 기억하고 기도하는 일을 어떻게 실천해 왔을까? 일찍이 초대교회 때부터 그들을 기억하였다. 처음에는 당대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이 하던 대로 망자 시신을 공경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특정한 날에 모여서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죽은 이를 기억하고 음복도 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 날은 그들의 달력에 의하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인 2월 마지막 날이었다. 그리스도인들도 자기 지역의 풍습에 따라, 망자를 위해 기도하러 모였다.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에는 묘지에서 성찬례를 거행하기도 하였으며, 통곡 대신에 찬미가와 시편으로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세기에 로마에서는 베드로 사도좌 축일인 2월 22일을 망자를 기억하는 날로 지냈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죽음과 죽음 후의 심판에 관한 신학과 교리가 많이 발전하였다. 또 성인 통공의 교리에 따라 죽은 이를 위한 기도가 매우 강조되었다. 중세를 거치면서 교회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선포하였고, 죽은 모든 이를 이날 기억하고 그들의 구원을 하느님께 기도하였던 것이다.
위령의 날이 되면, 우리는 먼저 떠나가신 조상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죽은 모든 영혼이 하느님의 자비로 영원한 안식과 하늘 나라의 상급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이날 교회는 교황의 지향에 따라 3대의 미사를 봉헌한다. 이날 미사의 주제들은 죽음을 뛰어넘는 강인한 희망(첫 미사), 구원의 관문인 죽음 앞에 가질 겸손한 자세(둘째 미사) 그리고 세례를 통해 이루는 부활의 완성에 대한 굳은 믿음(셋째 미사)을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날 위령성월을 시작하면서, 교회는 신자들에게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그들의 영원한 삶을 위한 희망과 믿음을 새롭게 다짐하고, 겸손을 갖추는 ’희생과 극기’를 요구한다. 또 죽음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언젠가 하느님께로 떠나갈 것임을 기억하며, 더욱 진실된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 나기정 다니엘 신부(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신학대학 교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