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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교회 전례에 나타난 성령의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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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4-10-29 조회수3,200 추천수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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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전례에 나타난 성령의 일치

 

 

2000년 대희년을 앞두고 우리는 ‘성령의 해’를 지내고 있다. 우리는 신앙 생활 가운데 하느님과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를 하고 또 듣고 있다. 그러나 성령에 관해서 충분히 인식하고는 있지만, 직접 삶 속에서 깊이 있게 체험하고 느끼기에 부족한 점이 많다. 여기서는 교회 전례 안에서 성령의 위치와 역할을 살펴보고, 그 이해의 폭을 넓힐 뿐 아니라 영성적, 사목적 노력과 관심을 가져 보고자 한다.

 

 

1. ‘일치’에 관한 소고

 

성령의 가장 두드러진 역할은 일치를 이루는 일이다. 따라서 성령의 일치에 앞서 먼저 인간학적인 관점에서 일치에 관한 숙고가 필요할 것 같다.

 

일치(unitas)란 무엇인가? 먼저 다른 개념들과 구별해야 할 것이다. 일치는 통일(uniformitas)이 아니다. 통일은 같은 꼴을 갖추는 것이다. 하나의(uni-) 형태(forma)로 된 것이 통일이다. 식당에서 같은 메뉴를 시키면 식단 통일이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통일된 것이다. 같은 기계로 찍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일치는 또 합치(conformitas)와 다르다. 합치는 동등한 값 또는 가치를 갖는 경우이다. 어떤 상황과 조건에 알맞은 사물이 배치되어 적합한 경우이다. 적합성이 여기에 해당된다. 돼지고기에는 새우젓이 제 격이다. 가장 적합한 동반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때 새우젓은 돼지고기에 부합한다. 일치는 또한 유사(similitudo)와 구별된다. 아무개는 누구와 닮았다고 말할 때 유사성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유사성은 두 사물 또는 개체간의 공통점을 지적하지만 두 개의 상이한 개별성을 전제로 한 표현이다. 일치는 또한 모방(imitatio)도 아니다. 모방은 어떤 모형(model)을 따라함, 또는 같거나 비슷한 것이 되기를 의도함이다. 모방은 경우에 따라 일치를 지향하는 한 가지 과정 또는 단계일 수는 있다. 

 

그렇다면 일치는 어떤 것인가? 일치는 ‘함께 공유 또는 통교하는 내적인 친교(communio)’가 있는 경우이다. 연결되고 관련된 어떤 내적인 관계가 이루어질 때 일치가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일치는 ‘조화’, ‘어울림’(combinatio)에 더 가깝다. 상호 도움이나 상호 보완 관계일 때 어떤 교류가 있는 것이고 조화가 이루어진다. 청춘 남녀가 만나 친해지고(친교) 잘 어울리면(조화) 바늘과 실과 같다(일치)고 한다. 우리는 일상에서, 특히 인간 관계를 이야기할 때에 ‘일치’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화목, 조화, 우애, 형제애, 사랑, 나눔, 공동체, 만남, 대화, 도움, 관심, 배려 등과 같이 더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표현들을 사용한다. 이런 말들은 모두 '일치'의 한 가지 면모를 나타내는 실제적이고 실천적인 표현들이다. 이처럼 ‘일치’는 다른 유사 개념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일치에 대한 내면적인 이해를 갖고 살펴보도록 하자.

 

 

2. 성령과 일치

 

성령은 일치를 이루시는 분이다. 일치를 이루어주신 가장 단적인 이야기는 사도들에게 내린 오순절의 성령 강림 때 일어난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사도 2,1-13 참조). 

 

그들의 마음은 성령으로 가득차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여러 가지 외국어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 그리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저마다 자기네 지방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 

 

영이 사도들에게 내렸다. 영은 서로 말이 달라 통교할 수 없었던 이들을 모두 알아듣게 하였다. 모두 하나로 연결시켜 준 것이다. 말이 다른 것은 생각과 사상이 달라 표현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며, 결국 통교할 수 없이 언어가 갈린 것을 말한다. 또 구약의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교만이 그 자신들을 분열시킨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의 죄가 일치를 해치고 분열시킨다면, 성령은 죄를 용서해 주고 화해시키며 하나가 되게 묶어주신다. 영은 내적인 친교를 가져다주며, 모든 이가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우리 가운데 활동하시면서, 우리 인간들 간에 친교를 가져다주고 성령께서 맺어주시는 여러 가지 열매들을 맺게 해주며, 궁극적으로는 일치를 이루어 주신다.

 

 

3. 교회 예배에서 성령의 위치

 

성령께서는 늘 교회 전례의 중심에서 활동하시며 전례를 거행하는 교회의 살아 계시는 영이시며, 거행하는 전례에서 활동하심으로써 교회를 활성화시키신다. 이제 교회의 전례 안에서 성령의 위치와 활동을 성사 전례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특히 각 예식의 기도문에서 드러나는 성령과 그 역할을 중점적으로 찾아볼 것이다.

 

1) 세례 예식

 

세례 예식은 그리스도교 입문 예식이다. 세례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세례는 씻음의 예식이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요한 3,5 참조). 그만큼 성령의 위치도 세례 예식에서 두드러진다. 성령이 언급되는 부분은, 삼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본질적인 부분도 있지만, 세례수 축성과 세례 후 도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① 세례는 본래 생수(aqua viva, 흐르는 물)로 거행하였다. 세례수 축성 기도는 구마 기도를 한 다음 축성이 따르고 이어서 성령 청원 기도로 이루어진다.1) 세례수 축성에는 준비된 물의 예형들이 나열된다.2) 이 물의 예형들에는 하느님의 기운과 능력(성령)이 언제나 작용하고 있다.

 

세상 태초에 성령이 물 위를 거닐으실 때 이미 거룩하게 하는 힘을 물에 …

천주 성자께서 요르단 강물에서 요한의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을 충만히 받으시고 … 

성령을 통하여 독생 성자의 은총을 이 물에 부어주심으로써 …

묵은 허물을 씻어버리고 물과 성령으로 새로이 태어나게 하소서. 

 

이렇게 세례수 축성은 성령의 임재(epiclesis)가 필수적이다. 특히 창조와 홍수는 교부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예형인데 창조의 물은 파괴된 세상을 다시 창조할 성령에 대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요르단 강의 주제에 관해서는 새 창조와 새 생명에 관한 신학적 노선을 깔고 있다. 요르단 강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와 새 생명을 위한 부활이라는 비슷한 주제가 연결되는 것이다. 

 

② 초대 교회의 문헌과 교부들의 증언을 볼 때에, 세례는 물로 씻음을 받은 다음 도유로써 세례를 마친다.3) 현행 예식도 마찬가지이며, 그리스도인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특권이 덧붙어 있다([어른 입교 예식서], 224항 참조). 

 

주님께서 이 형제들의 죄를 사하시고,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셨으니, 몸소 구원의 성유를 바르시어 주님의 백성이 된 이 형제들이 사제이시요 예언자이시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세례 후 도유는 새로 태어남의 씻음으로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한 설명이다.4) 이렇게 세례 예식은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일이며, 물은 곧 성령으로 축성되고, 죄의 용서와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물도 성령의 힘(virtus)이며,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남은 하느님의 자녀로 ‘그분과 일치’하고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 공동체와 일치’하게 만드는 입교 예식인 것이다.

 

2) 견진 예식

 

견진 예식은 한마디로 성령에 의한 성사이다. 하지만 견진은 세례와 성체와 함께 입교성사의 세 성사가 갖고 있는 일치성을 고려해야 하며(전례헌장, 71항 참조), 견진은 세례와 함께 신도들의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교의헌장, 10.11.26.33항; 평신도 교령, 3항 참조). 세례와 관련된 성령의 수여와 견진과 관련된 성령의 특은은 ‘그리스도를 닮음’(imitatio Christi)의 영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인간으로 태어나셨을 때와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께서 함께하셨다. 이때 성령은 예수님께서 ‘야훼의 종’, 예언자, 메시아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처럼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성부의 자녀가 되기 위한 성령을 받으며, 견진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예언자, 메시아가 되도록 성령을 받는다. 

 

견진과 세례의 연대성은 견진 예식 첫머리에 하는 세례 서원 갱신으로, 또 미사 중에 견진을 거행함으로써 성찬례와의 연대성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적극적인 참여를 권장하여 공동체 백성도 이 예식 거행에 초대되어 이미 받은 성령의 결실인 믿음을 공적으로 드러내도록 권고하고 있다([견진 예식서], 4항 참조). 세례 서원 갱신은 모든 성사와 마찬가지로 견진을 받기 위해 믿음을 전제로 한다. 두 가지 형태로 구성되어 있는데, 소극적인 것(악을 끊음)과 적극적인 것(신앙 고백)으로, 여기서 견진자가 하는 응답은 개별적인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모든 세례 교인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교회의 믿음과 합치하는 것이다([견진 예식서], 23항 참조). 성령에 대한 이해가 발달하면서 성령에 대한 강조와 교회 믿음의 일체성을 위협하는 이단적, 분리주의적 경향으로 참된 교리의 은사인 성령의 은사와, 사도적 전통 안에서 각 공동체의 책임자인 주교가 주례하는 것이 견진의 큰 특징이다. 주교는 교회 구성원간의 통교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지요, 교회 일치, 증거의 진실성, 믿음의 정통성의 보증이요 성령 강림절의 교회와의 연결점이기 때문이다([견진 예식서], 7항 참조). 견진 예식에서 주교는 성령의 선물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며,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선물을 청하거나 그리스도와 비슷하게 만들어주는 인호, 도유를 통하여 성령의 선물이 주어진다. 그러므로 주교가 집전하여 신앙 고백을 다시 함으로써 교회와 일치하게 만든다. 정통 신앙과 교회와의 완전한 통교는 교회의 일치를 위한 필수 조건이며, 이 일치는 주교가 보장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오늘’ 견진자들에게 오순절날 사도들에게 있었던 바와 같이 성령이 내려오실 것을 말함으로써, 성령에 관한 믿음을 발전시켜 묻고 있다. 이처럼 오순절 사건을 열거함으로써 견진이 세례인의 오순절로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견진의 중요 예식은 안수와 도유이다. 

 

① 먼저 주교가 신자들에게 함께 기도하도록 권고하는 부분은, 세례로 새로 태어남,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도록 견진자들에게 성령의 특은을 주심 등의 내용이다. 안수와 함께 이루어지는 성령 청원 기도는 권고문의 내용을 더욱 발전시키고 있다. 곧 물과 성령으로 후보자를 다시 나게 하고 죄에서 해방시키는 세례의 효과를 상기시키며, 성령의 칠은을 보내주시기를 청한다. 

 

이 교우들을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게 하시고 죄에서 해방시키셨으니, 

이 교우들에게 파라클리토 성령을 보내주시고, 

지혜와 깨달음의 성령, 의견과 굳셈의 성령과, 지식과 효성의 성령을 보내주시며 

주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의 성령을 보내주소서. 

 

여기서 견진이 세례의 보완(완성)이라는 측면이 부각된다. 파라클리토(보조자, 중재자, 변호자)로 불리는 성령의 특은은 7가지로 세분되어 나타나는데(이사 11,1-3 참조), 이는 위대한 왕, 예언자들, 성조들 안에서 탁월하게 드러나는 특은들로서 메시아와 왕에게 내려주는 천상의 힘이다. 이 특은들은 하느님의 영이 메시아 위에 충만하고도 항구히 머물며, 그 결과 그리스도와 완전히 비슷하게 닮도록 만드는 것이다. 견진의 성서적 근거와 관련지어 볼 때에(사도 8,14-17; 19,1-7 참조), 메시아 시대에 고유한 것이자 새 공동체의 특성을 이루는 성령의 선물은 모든 세례자에게 주어지며 세례 예식과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선물은 사도들에게 받으며, 모든 이가 '하나의 교회'에 소속됨을 선언하는 것이다. 

 

②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십시오.”라는 말과 함께 이루어지는 크리스마 도유는 견진의 본질적 요소이다. 이 말은 성령의 선물과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아주 잘 드러내 준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약속하신 선물(특은)로서 내려온 성령은, 하느님께서 세례자 안에 넣어주신, 새 계약에 들어가도록 해주신 내적 날인(인호)이다. 그것은 믿음의 강화, 마치 하나의 보증처럼 항구한 표지, 마지막 날을 위한 하나의 담보와 같은 것이다. 또한 기름바름은 파견과 관련된 성령에 의한 축성에 연결된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도유는 상징적인 뜻으로 이해되지만, 예언적 성격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스도인의 도유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도유와 연관을 가지는 것이다. 성령의 표지는 신자들의 마음 안에 거처하시면서 그를 비추고 그리스도와 닮게 만든다. 이 영적 도유는 외적인 예식인 기름바름으로 표현되지만, 그리스도의 영적 도유에 비추어 해석되며, 왕과 예언자가 받는 도유의 연장으로 이해된다. 

 

모든 성사는 함께 모인 교회가 수행하는 행위이며, 교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이 같은 사실은 특히 견진에 해당되는데, 견진 예식 안에서 교회는 모이며, 성령 강림절에 태어난 공동체, 부활하신 분의 영에 의해 움직이는 공동체로 드러난다. 견진을 거행하면서 교회는 성령강림 사건을 다시 체험하며, 성령의 활동에 영향을 받고 그에 의해 움직이는 공동체라는 인식을 가지면서 왕이며, 예언자이며, 사제인 백성으로서 신원을 깨닫게 되며, 세상에서 주님을 증거하도록 촉구된다. 견진자는 이렇게 성령으로 새로 태어난 백성으로서 신분과 임무를 갖는다. 여러 직무들, 특은들, 서로 다른 소명과 역할, 복음으로 충만한 진리로 나아감, 계속적인 성장과 발전, '더 큰 일치와 삶의 성화를 추구함' 등의 신분을 갖춘다. 

 

견진은 세례와 견주어 보면, 세례의 발전, 완성이란 관계를 갖는다. 세례와 견진은 두 순간에 이루어지는 하나의 예식인 것이다. 두 성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닮게 만들며, 세상에서의 임무를 위하여 교회에 가입시키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며 그분의 영으로 살게 한다. 견진과 세례는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두 개의 보완적인 것이다. 견진성사로써 파스카 신비의 부각되는 관점은, 성령에 의해 고무되어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견진자가 능동적이고도 특별한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내포하며,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는 오순절 신비 안에서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따라서 견진이란 세례자를 위한 의미 있고 결정적인 행위이며, 성령에 의해 인도되는 공동체로서 자신의 신원과 세상에서의 자신의 임무가 드러나며, 수세자들을 교회와 그리스도께 ‘완전히’ 일치시키는 예식인 것이다. 

 

또한 이 두 성사는 그리스도 파스카의 최대 표지이자 성령에 의해 활기를 얻는 교회의 온전한 표현인 성찬례 공동체에 연결시킨다.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와 오순절(성령 강림절) 신비에 참여하는 것은 새 계약의 제사이자 일치와 생명의 샘인 동일한 신비에 기쁘게 그리고 온전히 참여하는 것을 뜻한다.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이들은 세례와 견진의 은총을 예식 안에서 새롭게 하기 위하여, 죽음과 부활의 기념제를 함께 지내러 모인다. 그리스도의 과업을 완수할 임무를 띠고 있는 그분의 영, 세 성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음매인 ‘그리스도의 영’에서 출발할 때, 견진은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잘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교회를 일치시키고 건설하시며, 교회를 당신 몸과 영으로 만드시는 것은 성찬례를 통해서이다.

 

3) 성찬례

 

성찬례에서 성령의 위치와 역할은 대단히 포괄적이며 종합적이다. 

 

이미 시작 예식의 인사에서, 삼위일체적인 인사(㉮ 형식)는 성찬례 안에서 위치하는 성령 본래의 역할을 단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 인사는, 곧 삼위일체의 일치된 모습 안에서 우리의 예배가 이루어지는데,5) 성찬례에서 성령의 역할은 일치를 이루어주시는 것임을 말해 준다. 삼위이신 하느님께서 일치하시듯이, 하느님과의 일치와 공동체 구성원간의 일치를 가리킨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성찬례의 감사 기도에서 ‘성령 청원 기도’(epiclesis) 부분을 들 수 있다. 성찬례에서 성령의 위치는 예물의 축성과 일치 기원으로 이루어진 공동체(회중)를 축성하는 일이다. 축성 기원은 직접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청한다. 

 

성령으로 이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제4양식). 

 

또한 일치를 기원하는 성령 청원 기도는 성찬례를 받아 모시는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몸(교회)으로서 성령 안에서 한 몸이 되기를 청한다. 

 

성자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저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마음 한 몸이 되게 하소서(제3양식). 

 

이렇게 성령 청원 기도는 제물의 성화 기능을 수행할 뿐 아니라, 성령께서 성찬례에 참여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에 작용하셔서, 이들이 거룩한 신비에 참여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구성원들 상호간에 서로 일치를 이루게 되어 성화와 은총의 결실을 풍성하게 얻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봉헌물에 대한 효과와 참석자에 대한 성령의 열매는, 성령의 활동이 성찬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음을 말해 준다. 주님 부활의 첫 선물은 그 결실로 가져다 준 ‘성령의 증여’이다. 그래서 교회의 전례 생활 안에서 가장 거룩한 성사로 불리는 성체성사(성찬례)는 성령의 열매를 포함하여 성령의 신비로운 활동과 성령의 현존 없이는 결코 불가능한 것이다.6) 

 

따라서 최후 만찬 때 그리스도께서 하신 성찬 제정의 말씀처럼, 축성의 효과를 말할 때 성령의 신비로운 활동을 내포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주례자는 예물 위에 두 손을 펴 안수하며 성대하게 성령을 부른다.7) 주님 신비를 기념하고 재현하는 성찬례에서 성령의 역할은 그 전례에 효과를 부여하고 참여 공동체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드러나지 않는 활동과 현존이 있다. 예수 부활이 성령 강림과 연결되어 있듯이, 또한 성령의 활동이 성화시키며 구원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의 활동인 것이다. 

 

모든 이가 한 몸을 이루는 성령 청원 기도의 일치 기원은 또한 생활 예배를 강조한다. 우리의 예배와 삶이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적 일치(unitas personalis)를 이루게 된다.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한다면 성찬례를 지내더라도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없다. 그래서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하지만, 또한 성찬례가 교회를 형성하는 것이다. 믿는 이들이 모여서 빵을 나누는 예배를 드리지만, 하느님께 예배 드리는 이 전례가 생활 안에서 실천될 때에 참 교회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날로 당신의 몸이 되도록 당신 몸을 우리에게 주시며 이렇게 나날이 교회를 이루신다.8) 

 

성찬례에서 이루는 최종적인 열매(결실)는 일치이다. 이 성사의 최종 효과는 신비체와의 결합이다.9) 성찬례가 추구하는 것이 일치라면, 교회는 이 성사가 주는 은총에 힘입어 자라고 발전하는 일치가 이루어지게 된다(마태 5,23 참조). ‘같은 빵과 같은 잔을 나누어 받으려는 우리가 모두 성령으로 한 몸’(제4양식)을 이루게 된다. 예물 준비 예식(봉헌 예식)에서 예물 운반과 봉헌을 통하여 공동체는 직접 공동 사제직을 수행하고 참 사제이며 제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들도 봉헌한다는 뜻을 표현한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과 일치의 상징들은 일치 기원의 성령 청원 기도에서 가장 완전하게 이루어진다. 또 이 상징들은 그리스도께서 몸을 나누어 주심과 그분의 영의 불가분의 활동과 연결된다. 이 상징들은 잠시 후에 거행될 영성체, 곧 그리스도와의 실재적인 일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강조할 것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형제적 일치 안에서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와의 일치 안에서 성숙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적 일치가 상호간의 친교의 선행 조건인 것이다. 

 

또한 일치를 기원하는 성령 청원은 성찬례를 거행하고 성체를 영할 공동체가 이 위대한 선물에서 최대의 열매를 얻을 수 있도록 기원한다. 감사 기도문을 통하여 공동체에 성령께서 임하시어 공동체가 지금 거행하고 있는 신비에 깊숙이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이것은 성령의 내적 활동이 가져올 두 가지 열매를 말한다. 이 두 열매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단 하나의 제사와 봉헌을 바치는 것과 형제들과 함께 단 하나의 몸을 이루는 것이다(감사 기도 제2양식 참조). 이렇게 우리 안에서 성찬례의 참된 열매가 맺어질 수 있도록 성령의 충만함을 우리가 받을 수 있도록 청하는 것이다(감사 기도 제3양식 참조). 

 

더 나아가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신비에 깊이 들어감으로써 ‘성인들과의 통교’라는 일치로 확대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순례하는 지상의 교회들과 이미 천상 영광에 도달한 교회와의 깊은 일치가 필요함을 느끼고 있다. 감사 기도문은 성변화 이후 곧바로 교회 공동체가 일치의 범위를 확대한다. 곧 성인들과의 통교와 죽은 이들을 기억함, 그리고 산 이들을 기억하며 자연스럽게 일치를 위한 청원 기도를 연장하고 확대한다.

 

4) 혼인 예식

 

성사로서 혼인은 믿음의 관점으로 고찰해야 한다. 계약의 논리와 그 관점에서 혼인을 이해하며, 따라서 혼인은 부부가 온전히 통교하며 살도록, 교회 안에 존재하는 부부에게 수여되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사건인 것이다. 

 

우리 인간이 지향하고 있는 ‘너’는 인간인 ‘너’가 아니라, 하느님이신 ‘너’이다. 따라서 결국 인간은 하느님과 혼인하며, 하느님에 의해서 혼인을 맺는다. 타인은 하느님의 성사(표지)이다. 다른 이는 하느님의 사랑이 둘러싸고 있는 역사적 통교가 일어나는 개별적 자리이다. 각자는 하느님께서 우리 이웃으로 드러나는 성사이다. 사람이 사랑의 극치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혼인 예식의 주례자는 신랑, 신부 당사자이며 남자와 여자를 일치시켜 한 몸으로 만들며, 하느님의 말씀과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성령의 힘으로 당신 몸인 교회에 일치시켜 준다. 부부 사랑의 끈은 신의로 드러난다. 혼인 예식 시작 권고에 이 점이 강조되어 있다. 

 

오늘 특별히 혼인성사로 풍요하고 굳건하게 하시어

두 분이 한평생 신의를 지키며, 혼인 생활의 모든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

 

또한 혼인 축복을 통하여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결합을 나타내는 표상이며, 부부 일치를 항구하게 지키는 신의를 위해 성령의 은혜를 청한다. 

 

… 남녀가 더 이상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비로운 결합을 미리 보여주셨나이다. 

… 성령의 은총을 내리시어 주님의 사랑을 이들 마음에 부어주시어 

부부의 신의를 끝까지 지키게 하여주소서. 

 

그러므로 부부간의 ‘신의’는 부부가 자기 인격과 부부로서의 신실함을 책임 있게 그리고 상호간에 선사하고 봉헌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이 신의의 성숙이며 사랑의 발전이다. 그러므로 혼인은 성화이다. 성령의 개입과 증여된 영원한 사랑으로 이루어진 예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인은 생명이다. 혼인은 생명과 신비의 통합, 일상의 삶 안에서 상호간의 성숙과 일치를 지향하는 예식인 것이다. 또 공동체적 특성을 갖고 상호간의 도움, 나뉠 수 없는 사랑과 봉사를 실천한다. 사랑 안에서 사람은 충만함, 자비심, 공생, 하나 되게 만드는 만남을 체험한다. 혼인은 하느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것,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는 것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결(일치)이 불가 해소적이듯이 부부의 연결은 삼위의 통교 신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 신랑 신부는 성사적 은총으로 도움을 받아, 부부 사랑, 곧 영의 가치들, 애정과 육체적 사랑을 조화롭게 용해시킬 수 있는 사랑의 전형적인 차원을 정화하면서 구체화하는 것이다.10)

 

5) 서원 예식

 

수도 서원은 세례와 관련시켜 볼 때, 세례성사가 의도하는 복음 완덕의 실천을 완성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11) 수도 서원 예식은 서원 장엄 축복 기도를 통해 성령을 청하고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일치를 기원한다. 

 

오늘 서원한 모든 수녀에게 성령을 충만히 내리시어

이미 결심한 바를 끝까지 지키게 하시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천상 잔치에 다 함께 참여하게 하소서. 

 

이 축복 기도로써 교회는 서원자의 서원을 공인하면서 성령을 새 서원자들에게 보내주시도록 성부께 간청한다. 성령 청원 기도는 수도 서원의 신비적 차원을 잘 드러내 준다.12) 이렇게 장엄 축복 기도는 이 기도문 안에서 거룩함이라는 목표에 수도자들을 인도하는 완덕의 삶을 위한 진정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6) 성품 예식

 

성품은 안수와 이어지는 성령 청원의 축성 기도가 핵심이다. 안수는 구약에서 축복의 자세이며(창세 48,14; 레위 9,22 참조), 제물에 안수하여 봉헌자와 제물을 동일시하는 동일성의 동작이다(출애 29,10; 레위 3,2.8; 4,4 참조). 또 안수는 어떤 직무를 맡기는 동작이다(민수 27,18-20; 신명 34,9 참조). 곧 안수는 직무의 전달과, 하느님의 영의 선물을 통하여 그 직무를 완수할 수 있는 능력의 전수를 뜻하고 있다. 신약에 와서는 성령 증여의 표지로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예식과 연계되어 있다. 성품 예식에서 안수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의 선물을 받아 수품자가 성화되고 그 직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것이 성령의 선물이다. 

부제 서품을 위한 성령 청원 기도를 보면, 

 

주님, 간구하오니, 이들에게 성령을 보내시어

봉사의 업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칠은으로 굳세게 해주소서. 

 

여기서 성령이 내림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는, 부제들을 성화하여 그들이 부제직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내려주는 것이다. 일곱 은혜는 단지 고전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이사 11,1-2 참조). 성령이 후보자에게 내리시면 그들은 부제로 축성되고 그들의 일에서 풍부한 결과를 얻게 된다. 

 

사제 서품을 위한 축성 기도는, 

 

전능하신 아버지, 간구하오니, 

이 부제들에게 사제의 직위를 주소서. 

이 부제들의 마음속에 성령을 새롭게 하시어,

주님께서 맡기시는 사제 직무를 받아 보존하며, 

덕행 생활로 모범이 되게 하소서. 

 

이 청원 기도는 사제적 기능들의 수여와 관계된 성령의 선사가 그 근간을 이루고 있다. 구절들은 시편에서 엮어낸 것들이다(시편 51,10.11 참조). 내적인 성화와 지워지지 않는 인호를 주시는 성령의 수여로 사제 서품의 핵심 부분인 이 성령 청원 기도에서 주교 품위에 다음가는 둘째 품위임을 강조하고 있다. 사제는 참 사제이지만, 주교의 사제직에 일치하는 협력자인 것이다. 사제가 받은 직무는 복음화, 사목, 예배 등 세 가지의 직무이다. 

 

주교 서품에서 사제직의 완전한 품위를 설명하고 있으며, 교회 일치의 표지임을 가장 잘 나타낸다. 

 

성부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을 주시고, 

성자께서는 그 성령을 거룩한 사도들에게 주시어, 

그들이 가는 곳마다 주님의 성전인 교회를 세우고 

주님께 끊임없이 영광과 찬미를 드리게 하셨으니, 

이제 성부에게서 발하시는 그 위대한 능력의 성령을 간택된 이 형제에게 부어주소서. 

 

주교는 교회 일치의 표지가 되어 공동체를 다스리고 지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영, 곧 성령을 받은 직무자이다. 이 영은 성부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세례 때와, 특히 부활 때에 주신 바로 그 영이다. 생명을 주는 영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저녁 때 그리고 성령 강림 때에 특별하게 이 영을 당신 제자들 안에 부어 넣어주셨다(요한 20,22; 사도 2,33 참조). 주교는 안수를 받음으로써 성부께 성령을 받아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고 교회 일치의 표지가 된다. 이로써 주교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교회를 건설하는 이들이 된다. 또 축성 기도는 성령을 교회와 일치시키는 영광송으로 끝맺는다. 주교 품위의 삼위일체적 차원에서 나오는 주교직의 교회적 차원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주교품은 교회의 심장과 연결되며, 성령의 힘으로 교회를 건설하고 성부의 영광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적 중개의 보이는 표징이 된다. 

 

세 가지 성품의 축성 기도문은 단순하고도 장엄하게 거행된다. 이 기도는 성찬례의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는 순간에 견줄 만하다. 이 중요한 순간에 말(축성 기도)과 행동(안수 등)으로써 성사의 의미가 뚜렷이 드러난다. 회중(교회 공동체)은 또한 ‘아멘’이라 응답함으로써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일치하고, 이제 막 이루어진 성사로써 교회 일꾼의 수가 늘어나는 데 참여함으로써 영적 열매를 얻고 자유 의지와 품위를 갖추어 이 의식에 참여한다. 곧 성품의 수여는, 후보자의 내적 성화와 후보자가 받게 될 직무의 수행에 필요한 능력을 수여하기 위한 ‘성령의 선물’이 전달되는 것이다. 성화와 능력의 은사로써 서품된 이는 유일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닮게 되며, 이 성화와 능력은 그리스도의 중개로 성사적 표지가 된다.

 

7) 화해 예식

 

화해는 일치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다. 진실하지 못하고 자신과 타인과 하느님께 끼친 손해(죄)는 용서받아야 하며, 이 용서는 화해의 과정을 거친다. 화해의 예식은 안수와 함께 죄를 용서해 주는 사죄경에서 성령의 역할과 위치를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려고 성령을 보내주셨으니 

교회를 통하여 이 교우에게 용서와 평화를 주소서. 

 

성서에 근거한 안수는 성령의 임재를 나타내 주고 용서의 축복을 내리는 중요한 동작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 예식은 이루어진다. 성령께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만나도록 배려해 주시는 것이며, 아버지는 성자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고해자를 갱신시키시는 것이다. 화해 예식은 죄로 아버지와 멀리 떨어진 이들을 다시 결합시키고 일치시킨다. 이 예식을 위해서는 외적인 조건뿐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환경도 갖추어야 한다. 고해 신부와 고해자가 성령을 청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신을 집중함으로써 밝혀진 영적 질병에 적합한 처방을 찾고자 한다면, 숙련된 영적 의사의 분별력을 통하여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행위는 놀라운 화해와 일치의 결실을 얻게 해준다.

 

8) 병자 도유 예식

 

병자 도유 예식은 병자에게 하는 안수와, 이마와 두 손에 바르며 외는 기도에서 성령의 은총을 청한다. 안수와 함께 이루어지는 권위 있는 말씀은 치유의 표지가 된다(마태 9,18; 마르 6,5; 루가 13,13 참조). 

 

주님께서는 당신의 자비로우신 사랑과 기름 바르는 이 거룩한 예식으로 

성령의 은총을 베푸시어 이 병자를 도와주소서. 

또한 이 병자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고 구원해 주시며 

자비로이 그 병고도 가볍게 해주소서. 

 

병자 도유에서 중요한 것은 먼저 그리스도교적 희망을 향해 열린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병자들에 대한 염려는 사제들만의 일이 아니라, 전체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일이다([병자성사 예식서], 33항 참조). 이 예식은 주 그리스도께서 병자들에게 보이셨던 ‘관심’(cura)을 보여주는 주된 표징인 것이다([병자성사 예식서], 5항 참조). 성령의 은총은 병자에게 개별적으로만 내리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활동하고 살아 움직이시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성령의 은총이 드러난다. 공동체가 병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한다. 병자는 하느님 앞에 있는 인간의 상황, 곧 나약함, 허약함을 느낀다. 몸이 아프면 마음도 약해진다. 공동체가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병자는 공동체에게 소외감을 갖거나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데 장애를 느낄 것이다. 공동체가 병자에게 보이는 관심과 배려가 구세주 그리스도와 성령의 현존을 잘 드러내고 실현하는 효과적인 표지가 되기 때문이다.

 

 

4. 종합:성령의 역할과 일치

 

이처럼 성령은 주님의 신비를 기념하는 모든 전례를 감싸시면서 그 전례에 효과를 부여하시고, 그 전례에 참여하는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신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부활하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 되며, 그리스도를 닮는 삶을 시작한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과 일치하며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 형제들과 일치하는 소명을 받게 된다. ‘견진’에서는 입교 예식 가운데 성령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성령의 특은으로 성숙한다. 세례에 이어 완전히 그리스도께 일치하게 된다. ‘성찬례’는 전례의 절정이다. 성찬례에서 성령의 역할과 함께 주님의 신비와 결합하고 일치하는 삶을 구체적으로 살게 하는 생활 예배가 강조된다. ‘혼인’은 인간 사이의 일치의 끈이 가장 분명하고 강하게 나타나며, 구체적으로 그 끈을 잇는 신의가 강조된다. ‘서원’은 세례의 복음 완덕을 지향하는 삶을 실현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며 종말론적 완성을 향해 열려있다. ‘성품’은 교회 일치의 표지로 드러나는 목자를 세우는 것으로 교회 공동체를 관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에 심어주신 영의 능력을 발휘하여 일치에 힘쓰게 한다. ‘화해 예식’은 영의 능력으로 일상의 죄와 불화를 용서와 화목으로 조성한다. ‘병자 도유’는 공동체에게서 결코 소외될 수 없는, 공동체의 관심과 배려로 이루어내는 일치를 말해 준다. 

 

이렇게 성령은 성사와 준성사의 예식에서 항상 예절의 핵심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역할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지향점은 일치이다. 교회 공동체와의 일치, 그리스도와의 일치, 하느님과의 일치를 지향하고 그 결실을 얻게 한다. 교회의 전례는 ‘하나 됨의 목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성령의 활동(activitas)으로 이루어지며, 이 활동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활성화(animatio)하도록 전례적 사목이 필요할 것이다. 

 

[매일 미사]의 본기도에서 덧붙인 기도문은,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면서 성령의 해를 보내는 교회 공동체가 새롭게 인식해야 할 성령의 은총과 소명을 간략하게 잘 말해 주고 있다. 

 

또한 2000년 대희년을 준비하는 저희에게 성령의 불을 놓으시어, 

세례와 견진 성사의 은총을 새롭게 하시고, 

만민의 복음화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일치을 위하여 헌신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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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또 부활 성야 때에 세례수를 축성하기 위해 그리스도 또는 성령을 뜻하기 위하여 부활초를 세 번 물에 담그는 것이다. 중세에는 입김을 세 번 부는 것도 있는데 이것은 성령의 바람(기운)을 뜻한다. 

 

2) [어른 입교 예식서], 215항 참조. 준비된 물의 예형은 창조 때의 물, 노아의 홍수, 홍해, 요르단 강,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물 등이다. 

 

3) 성 암브로시오의 양식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그대를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그대의 죄를 벗겨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영원한 생명 안에서 그대에게 몸소 기름을 발라주신다.” 또 젤라시안 성사집은, “물과 성령으로 그대에게 죄의 용서를 베풀어주신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대를 구원의 크리스마 성유로 몸소 표하신다.” 

 

4) 이어서 견진을 계속해서 받을 경우 이 도유는 생략되고 견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견진 때에도 안수 다음에 이루어지는 도유는 안수로 주어진 것이 성령의 선물임을 말해 준다. 

 

5) 삼위일체적인 예배의 형태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성부께 지향하는 기도’로서 본기도의 결문에 잘 나타난다. 

 

6)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가 제대에 올려 놓은 것들(빵과 포도주)은 성령의 보이지 않는 활동을 통하지 않고 성체와 성혈로 축성되지 않는다.” 하였고([삼위일체론], 1.IV. 4,10), 파스카리오 라드베르토는 “사제가 그리스도의 말씀(성찬 제정 말씀)을 할 때에 빵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몸으로 축성된다.”고 하였다([주님의 몸과 피에 대하여], IV,3.). 

 

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 미사 전례서를 개정하면서 전통적인 로마 전문(canon)의 감사 기도 외에도 추가된 3개의 감사 기도는 성령 청원 기도가 강하게 나타난 동방 교회의 것을 따르고 있다. 이것은 또한 동방 교회와의 일치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로마 전문은 성체 설정의 '기념'이 강조된 반면, 동방 교회의 것들은 한결같이 성령 청원 기도가 두드러진다. 특히 예물에 대한 축성뿐 아니라, 백성(회중)에 대한 축성(일치 기원)도 드러난다. 

 

8) 1고린 10,17 참조:“빵은 하나이고 우리는 여럿이지만 한 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 

 

9) 성 토마스 데 아퀴노, [신학 대전] III, q. 73,a.3 참조. 

 

10) 혼인에서 신부가 쓰는 베일(면사포)의 의미와 함께 동정녀 축성(서원 예식)을 생각하면서 또한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고려해 볼 수 있다. 봉헌된 동정녀에게 수여되는 베일은 그들의 축성으로 드러나는 하느님과의 혼인으로서 성사인 이 세상 안에서의 삶 안에서 상징적으로 실현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라는 관점에서 베일을 쓴 신부는 축성된 동정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동정녀의 경우 그들은 ‘직접 그리스도와 일치’라는 자신들의 목표로 나아가지만, 신부의 경우는 혼인의 표지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그 일치에 도달’한다. 곧 혼인은 그리스도 신비의 혼인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반면, 동정성은 이러한 혼인의 종말론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다 

 

11) 앞에서 언급한 서원자의 베일은 직접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지향하는 복음 완덕의 길을 상징한다. 

 

12) 수녀들의 경우 수도회에 따라, 그리스도의 신부가 됨과 동시에 그리스도와의 영원한 결합을 드러내는 반지를 서원의 표지로 수여하기도 한다.

 

[사목, 1998년 9월호, 나기정(대구 효성 가톨릭 대학교 교수, 신부, 전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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