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대림성탄] 성탄의 유래와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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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4-10-29 | 조회수4,665 | 추천수0 | |
성탄의 유래와 의미
서론
성탄(聖誕, Christmas)은 12월 25일에 지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일(生日)을 일컫는 말로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태어나심을 경축하는 날이다. Christmas는 "그리스도의 미사"라는 뜻인데, 성탄시기는 12월 15일부터 주님 공현 대축일(公現大祝日)까지이다.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간의 존재 가치가 달라졌기에 인간인 우리가 새로 태어난 것(새 창조)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탄은 모든 생일 중에 가장 의미 있는 생일이다. 이제 성탄의 유래와 의미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성탄의 유래(由來)
먼저 성탄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보자. 엄밀히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초기 신자들의 관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고, 그리스도의 탄생일이 언제였는지에 대해서는 4복음서도 언급을 하지 않는다.
성탄시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발전하여 생긴 축일이다. 전통에 의거하여 354년의 한 로마 역사가는 12월 25일을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날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은 이 축일의 기원은 2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발견된다. 교황 텔레스포루스(Telesphorus)는 이미 부활시기와 성탄시기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리스도교의 자유를 보장하였고 이때부터 신앙 생활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다. 황제의 배려로 박해받던 교회가 이제는 국교로 성장하였고 그 결과 4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성탄을 지켜 왔다. 이때부터 성탄시기의 두 큰 축일들이 생겨났는데, 하나는 로마 교회가 선택한 12월 25일의 "예수 성탄 축일"이었다. 이 축일은 본래 지중해 전 지역에서 200년 이후 로마인들이 "불멸의 태양신(太陽神) 미트라의 생일(Natalis Solis invicti)"로 지내던 날이었으며 동시에 이 이교 축제는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고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동지(冬至, Brumalia)를 기념한 축일이었다. 이 이교도 축일은 아우렐리오 황제가 적극 권장하고 명하였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에 태양신 숭배를 국교로 승격시켜 결정하여 로마 제국의 전지역에서 지켰던 축제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21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던 주일(主日, Dies Dominica)을 미트라교의 태양 숭배일(Sunday)과 결합시켜 그리스도의 부활이 이교 신앙을 승리하도록 배려하였고 주(週) 1회의 휴일을 정하고 모든 관리들의 휴일로 삼았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론에 관한 교의(敎義)가 정리되고, 그리스도 탄생에 대한 신학적 의미 부여가 확정되자, 미트라교의 축일인 12월 25일을 그리스도의 탄생일로 대치시키고 확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3세기 이후부터 자주 "정의의 태양"(말라 4,2)으로 묘사되었으므로 교회는 성탄 축일을 지냄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참 태양"이시며 "세상의 빛"이심을 경축하였다. 이 빛은 이교의 태양신을 몰아내었다.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셨고 부활하셨다는 믿음을 전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주님께서 돌아가신 날은 하느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신 날로 여겨졌다. 바로 그날이 3월 25일(성모 영보 = 예수 아기의 잉태)이었다. 그날부터 계산하여 주님의 생일을 12월 25일로 정하여 믿는 마음으로 지냈다. 이렇게 되어 리베리오 교황 시절에 로마에서도,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도, 순례자 에테리아 수녀의 기록에 따르면, 4세기 중반에 12월 25일을 성탄 축일로 지내는 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이 축일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자극을 받아 생긴 것으로서, 실제로 성탄 대축일 미사 경문은 아리우스 이단을 물리친 니케아 공의회의 승리 노래와 같다.
민족 대이동이 끝난 후 오랫동안 라틴 교회는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곧 프랑크족을 제외한 모든 게르만족들은 아리아니즘에 물들어 있었다. 이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데 성탄 축일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니케아 공의회의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가르침이 성탄 축일 미사 전례의 본문에 수록되어 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탄 축일이 대축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성탄 축일에 특전이 주어져서 세례성사를 부활 대축일에서와 같이 줄 수 있게 되었다.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민중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과 아울러 구세주의 겸손을 강조함으로써 성탄 축일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두 번째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정한 1월 6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이었다. 동방 교회는 12월 25일보다 1월 6일을 더 선호하였다. 왜냐하면 이날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날이며 성부께서 세상에 당신 사랑하시는 아들을 소개시켜 주신 날이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르 1,11). 그래서 우리는 이 축일을 "주님 공현 대축일"이라고도 부른다. 그리스도께서 참 임금으로 나타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왕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임금이시다. 그런 이유에서 이날은 또한 거룩한 삼왕(聖三王) 축일이라도 불린다. 동방의 가스발, 멜키올, 발타샬 왕들(동방 박사 세 분)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구세주를 찾아와 경배 드리고 예물을 드린 것을 기념한다(마태 2,1-12 참조).
본래는 1월 6일도 그리스도교의 축일이 되기 전에 알렉산드리아의 도시 신(神)인 에온(Aeon)의 축제일이었다. 알렉산드리아는 희랍 문화가 찬란하게 꽃피고 상업이 발달한 대도시였다. 이 방면에 도움을 주는 신이 바로 에온이었기 때문에 숭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공현"(Epiphania)은 본래 태양이 떠오를 때를 가리키는 말인데, 황제에게 적용시켜 황제나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방문을 할 때 도착 때에 쓰던 종교적 의미가 담긴 말이다. 이 서민적이고 전(前)그리스도교적인 관습이 영향을 끼쳐 전 동방 지역 교회에 1월 6일을 참 왕이시고 세상의 통치자로 오신 그리스도의 성탄시기로 삼아 지내는 축일이 된 것이다.
386년 12월 20일(성탄시기 전 주일),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는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중요한 강론을 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12월 25일에 미사에 초대하였다. 로마 교회의 본보기를 그들에게 알려 주면서, 로마에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하에 실시된 국민 호구 조사의 명단이 기록 보존실에 비치되어 있으며, 그래서 그곳 로마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언제 탄생하셨는지를 더 확실히 알 것이니, 우리 교회에서도 그들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의 성탄 축일을 12월 25일에 지내야 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그 결과 12월 25일에 주님의 성탄 축일을 지내는 일이 동방 전역에 확산되었다. 반면에 로마 교회는 또한 동방 교회의 전통에서 1월 6일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받아들여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통치자의 도착을 알리는" 공현 축일의 내용을 여러 날에 걸쳐 분산시켜 지내게 되었다. 곧 12월 25일은 베들레헴에서의 공현을 기리고, 1월 6일은 별들이 빛난 사건과 동방 박사들의 도착을 기념하고, 세례 축일은 1월 6일에서 1월 13일로 옮겨서 지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그 내용이 또한 "공현"을 포함하는 축일로서 공현 대축일 후 2번째 주일에 지내도록 하였다.
반면에 희랍 교회는 12월 25일에 조금은 조촐하게 성탄을 지내고, 1월 6일에는 아주 성대하게 지냈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예수님의 세례 축일을 선호하였고, 동시에 바다와 식수를 축복하는 등 아주 화려하고 장엄한 전례를 마련하였다. 주님 공현 대축일은 동방 교회에는 특별한 축일, 곧 주님의 성탄 축일이다. 또한 그들은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고, 미사 후에는 사제와 신자들이 행렬을 이루어 세례대로 나아간다. 그곳에서 사제는 물을 축성하면서 "요르단강의 축복"을 내려 주시기를 기도드린다. 그리고 신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세례성사를 기억하고 마귀에게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모든 질병에서 치유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그 축성된 물을 가지고 집으로 간다. 서방 교회에서 1월 6일에 세 분의 동방 박사들이 새로 태어나신 메시아를 만난 것을 기념하여 구유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을 핵심으로 등장시키는 반면에, 동방 교회에서는 구유의 아기 예수님보다는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공적인 활동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핵심으로 삼는다. 역사적으로 볼 때 1월 6일에 지내던 공현 축일에 대한 동방 교회의 최초의 언급은 이미 3세기에 나타난다.
동방 교회의 이 전통 중에 일부분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으로 말미암아 로마 가톨릭 교회 안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곧 주님의 공현 대축일 다음 주일을 예수님의 세례 축일로 지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의 독서에서는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하셨던 예수님의 첫 기적을 상기시킨다. 이 세 가지 사건들이 모두 하느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표로 이해된다. 사건마다 있었던 외적 표시들이 이 점을 드러낸다. 곧 하늘에 나타난 신기한 별은 동방 박사들을 안전하게 베들레헴으로 안내하였다. 또한 요르단강에서의 세례 때 하늘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로 표현하였고, 가나의 혼인 잔치 때에 예수님께서 물이 술이 되게 하는 기적을 통해서 자신이 바로 파견되어 오신 구세주,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다(요한 2,1-11). 이 세 가지 사건들을 일컬어 "Theophania" 또는 "Epipania"라고 부른다.
서방 교회에서는 이 세 가지 원천 중에서 다만 새로 태어나신 메시아의 공현만을 선택하여 1월 6일에 지내게 되었고 민중 신심은 "삼왕 축일"이 탄생되는 데 큰 몫을 하였다. 복음서에는 왕들의 이름이나 숫자에 대한 언급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9세기에 처음으로 삼왕들의 이름, 가스팔, 멜키올, 발타샬이 등장한다. 삼왕들은 인류의 3종족을 대표하고 그 당시 알려졌던 지구의 세 지역,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를 상징한다고 여겨졌다. 전승을 보면 4세기에 삼왕들의 유해가 발견되었고 밀라노(이탈리아)에 보존되어 오다가 1164년에 바르바로사 황제가 쾰른(독일)의 대주교에게 선물하여 특별히 제작된 금궤 안에 모셔져 쾰른 대성당 안에 모셔져 있다.
독일어로 "Weihnacht"라는 말은 "거룩한, 축성된 밤"(Heilige Nacht, Holy Night)이라는 뜻을 간직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이 되신 이 밤보다 더 거룩한 밤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2. 성탄 구유
성탄 구유는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는 모습을 구유를 중심으로 요셉, 마리아, 목동들, 동물들을 배치한 모형으로 로마 가톨릭 세계에서 주로 만들어지며, 교회나 가정에서 성탄시기의 12일 동안 둘레에 촛불을 꽂고 정중하고 아름답게 장식한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세피오(Preseppio)라고 하며, 독일에서는 크리페(Krippe)라고 부른다. 최근의 모습에서는 자주 성탄 전야 미사 시작 때 아기 예수님을 인형으로 모시고 행렬하여 제단 앞에 있는 구유 안에 놓는다. 그리고 공현 축일이 되면 주위에 있는 목자들이 세 사람의 왕(동방 박사)들로 바뀐다.
성탄 구유는 1223년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의해서 그레치오(이탈리아)에 있는 성당 안에 처음으로 안치되었다. 이후로 베들레헴의 목동들처럼 구유로 순례하는 전통이 생겨났다. 머지않아 구유는 많은 성당과 수도원 안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학교와 가정에서도 구유를 만들게 되었다. 같은 시기에 구유와 함께 이루어지는 연극도 성행하게 되어, 성탄 복음의 내용을 신자들에게 눈에 보이게 표현하는 관습도 생겨났다.
3. 성탄 나무(Christmas tree)
성탄 나무의 유래는 그리스도교 이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교도의 동지 축제 때에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12일간의 밤" 동안에 푸른 가지들을 잘라서 보호와 주술의 상징으로 삼으며 여름이 빨리 오기를 주문하는 전통이 있었다. 모든 문화 안에 그리고 종교 안에서 푸른 나무는 신들이 거처로 삼는 곳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생명의 표지였다. 생명력, 비옥함,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성서에서도 나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낙원에서의 나무에서부터 십자 나무에 이르기까지 나무는 깊은 의미를 지닌다(광주가톨릭대학, [성서신학사전], "나무" 100/1참조).
성탄 나무를 세우는 관습은 프랑스 알사스 지방과 독일의 슈바르츠발드에서 1509년에 나타났다. 마르틴 루터와 종교 개혁가들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성탄 상징으로 성탄 나무를 취하였다. 나폴레옹을 대항하여 싸운 전투에서 전나무(Tannenbaum)는 모든 독일인의 자유를 위한 상징이 되었다. 전나무는 19세기 말 가톨릭 교회에서도 또한 가정에서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성탄 나무에 즐겨 매다는 "생명의 열매들"은, 곧 사과, 호두, 과자 및 상징적인 금색의 공들과 은색의 장식품들은 성탄 나무가 낙원에 서 있던 나무 대신에 서 있음을 나타낸다. 성탄시기가 끝날 때에 성탄 나무는 "약탈"을 당하는데, 생명 나무에서 생명의 열매들을 따먹기 때문이다.
4. 성탄 노래
"크리스마스 캐럴"이라고 불리는 크리스마스 가곡(歌曲)은 민요를 모태(母胎)로 하여 발전하였으며, 하느님께 대한 찬미, 그리스도 탄생의 기쁨과 감사를 표현한다. 본래는 노래를 부르면서 추는 춤이었으나 각국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지금까지도 활발히 성탄 전야에 전례 중에 또는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부르고 있다.
유명한 성가로는 "Stille Nacht, Heilige Nacht"(고요한 밤, 거룩한 밤), "Es ist ein Ros entsprungen"(이사야 말씀하신:가사는 독일 마인츠에서 1587년에 쓰여졌고 곡은 쾰른에서 1599년에서 인용된 슈파이어 교구의 성가곡집에 들어 있다), "Zu Bethlehem geboren"(베들레헴에서 나신 아기:가사는 1637년에 Friedrich Spee가 썼고, 곡은 프랑스 파리에서 1599년 쓰여졌다), "Adeste fideles"(어서 가 경배하세:가사는 1790년에 수도원장 Borderies의 것이고, 곡은 17세기의 John Reading이 쓴 것이다), "Heiligste Nacht"(거룩한 밤:가사와 곡은 Christoph Bernhard Verspoell이 1880년에 쓴 것이다), 그 외에 H?del의 "기쁘다 구주 오셨네", Mendelssohn의 "천사의 찬송", Schulz의 "귀여운 아기들", Adam의 "경사롭다", Saboly의 "구유에 누워 계시니" 등이 유명하다.
5. 성탄 선물의 유래
성탄시기에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은 성탄시기의 역사보다 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곧 그리스도교 이전의 이교도 시대부터 태양신의 축일과 동짓날에는 선물을 주고받았다. 로마 관리들뿐만 아니라, 노예들까지도, 독일의 농민들과 천민들도 주인들에게 일년 동안 수고한 대가로 선물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성탄 선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신자들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성탄 선물의 역사는 마르틴 루터가 활성화시켰다. 그는 1535년 그때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던 12월 6일 니콜라오 축일의 선물 교환을 없애버리고 그 대신에 성탄시기에 선물을 교환하는 새로운 관습을 도입하여 자리 매김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하여 니콜라오 성인 대신에 이제는 아기 예수님께서 선물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 되셨다. 니콜라오는 대림시기에서 성탄시기의 인물로 변화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본래의 산타클로스(Sinterklas)의 전통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 결정이 동시에 유감스럽게도 물질적으로 흐르는 축제의 기쁨으로 전락되는 계기가 되었다.
6. 성탄 미사
성탄 대축일 미사를 3번 드리는 특별한 전통이 있다. 이유는 교황이 의무적으로 미사를 드려야만 했던 중요한 세 가지 동기들을 모아서 함께 기리는 것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첫째로 로마의 성모설지전대성당(聖母雪地殿大聖堂, Santa Maria Maggiore)의 베들레헴 동굴에서의 미사와, 둘째로 비잔틴(콘스탄티노플)의 황제 성당의 성 아나스타시아 축일의 미사와, 셋째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의 미사였다. 이러한 "3大 미사 전통"에 덧붙여서 그리스도 탄생의 신학적 3중적 의미가 포함되어 이 대축일에 중요성과 지속성을 가져다 주었다. 곧 그리스도의 베들레헴에서의 역사적 탄생, 그리고 각 사람의 영혼 안에서의 탄생과 영원하신 성부에게서의 탄생이었다.
7. 성탄을 위한 내적 준비
갈리아(프랑스) 지역 교회에서는 5세기경부터, 성탄 6주 전부터 매주 3일(월, 수, 금요일)에 단식을 지켰다. 로마 교회는 그레고리오 대교황 전에 대림시기가 성탄시기 전에 지켜졌고, 4주간(주일) 지속되었다.
성탄 다음날에는 동방 교회에서 4세기 말부터 교회의 첫 순교자인 성 스테파노 축일을 지냈다. 서방 교회에는 5세기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이 도입되었다. 성탄 팔일축제 축일(신년 첫 날)에는, 카푸아의 빅토르 주교가 펴낸 독서(546년)와 뚜르의 주교회의(567년)의 Canon 17항이 말해 주듯이, 그리스도의 할례의 기념일을 지냈다. 이 축일은 동시에 이교도의 신년 축일을 몰아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이 축일의 제정과 함께 성탄시기의 핵심 시기의 결정은 완성을 보게 되었다.
결론
4세기에는 모든 이단자들에 대항하여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神聖)을 장엄하게 고백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성탄의 두 대축일이 생겨났다. 로마 교회는 12월 25일을 선택하여 이교도의 태양신 숭배를 극복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참된 태양이시며 탄생으로써 온 세상을 비추시는 빛이심을 선포하였다. 이 참된 태양은 죽음으로 멸망하지 않으며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분이시다.
동방 교회는 1월 6일을 선호하였다. 우리는 동방 교회와 함께 이날에 주님 공현 대축일을 지낸다.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알리는 축일이다. 공현은 삼왕의 아기 예수님께 대한 경배로 표현되며, 요르단강에서 예수님의 세례 때 들려온 성부의 목소리로 증거되며, 또한 가나에서의 주님의 첫 번 기적으로 나타난다.
성탄시기의 기본적인 신비는 뒤따라오는 성가정 축일(성탄시기 후 첫 주일)과, 성탄 팔일축제 축일인 천주의 모친 성모 마리아 축일(1월 1일) 안에서, 그리고 공현 후 주일에 예수님의 세례에 관한 복음을 읽을 때에 계속적으로 강조되어 나타난다. 특히 1월 1일 성서 말씀은 예수님의 이름을 알리는 내용과 성모 마리아에 대하여 강조하여 언급한다.
성탄 대축일 후 40일에는(2월 2일) 최후로 성전 안에서 아기 예수님을 봉헌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날 초를 축성하여 들고 성전에 들어가는 예절로 그리스도께서 가져 오신 빛을 드러낸다(초 축성 미사).
그리스도교 신자 가정은 성탄 대축일 전야 미사에 참례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린다. 신자들은 기꺼이 거룩한 밤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강생의 사건을 묘사하는 주님의 구유 앞에 모여들며, 그리고 생명 나무를 상징하며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연상시키게 하는 성탄 나무 주위에 둘러서서 성탄의 의미를 새긴다. 가장(家長)은 주님의 탄생에 관한 복음 말씀을 읽어 주고, 모든 가족들은 기도를 드리며 성탄 성가를 부른다. 기도 중에 특별히 "주님의 천사가 마리아께 아뢰니"(삼종경)는 성탄 축일을 지내는 이유를 밝혀 주는 기도이다. 성탄시기의 선물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아들을 선물로 주신 것임을 깨닫게 해 준다.
주님 공현 대축일에는 오래된 전통에 따라서 삼왕들이 했던 것처럼 기도하면서 가정을 돌며 방마다 성수물을 뿌리고 향을 피워 뿌린다. 문에는 백묵으로 십자가 표시와 햇수를 기록하고 CMB 글자를 써서 남긴다(Christus mansionem benedicat = 그리스도께서 집을 축복하실지어다). 삼왕의 옷을 입은 복사들은 동네 길거리를 돌며 집집마다 방문하여 곤경을 겪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위한 성금을 걷어서 바친다.
[사목, 2001년 12월호, 장인산(대전가톨릭대학교 교수, 신부, 교부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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