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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축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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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8-01-10 조회수2,054 추천수0

[이 달의 전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 31일)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인 5월, 특히 교회가 마리아께 봉헌한 이 달에 ‘마리아의 노래’가 기원하는 축일의 의미와 마리아를 사랑하는 자녀들이 즐겨 노래하는 ‘성모찬가’ 노래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하느님께 매일 우리 자신의 삶의 노래를 불러드립시다.

 

 

1. 역사적 개관

 

이 축일은 천사를 통한 잉태의 소식이 있고 난 후 친척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마리아에 관한 성서상의 보고 내용을 그 대상으로 한다. 이 방문과 일명 ‘마리아의 노래’라고 불리는 ‘성모 찬가(Magnificat)’가 시간상 연결된다. 동시에 사람들은 이 두 분 만남의 시간에 어머니 태중에 있는 예언자 요한의 성화(聖化)가 이룩되었다고 믿었다.(루가 1장 15절과 연결된 루가 1장 44절)

 

이 같은 성서적 사건들은 중세기 사람들의 정서와 마음을 사로잡았는데, 특히 이 사건을 축제의 기념일로 만들었던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그 대표적이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였던 보나벤뚜라(Bonaventura) 성인은 1263년 이 사건을 축일로 격상시켜 자기 수도원에 도입했다.

 

7월 2일이 세례자 요한의 탄생 8부 날이었기에 이 날이 축제일로 선택되었다. 이 축일은 교황 우르반 4세(1378~1389)에 의해서 인정받았고, 교황이 작고하신 뒤 후임 교황이셨던 보니파시오 9세(1389~1404)에 의해서 1389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그리고 비오 5세(1566~1572) 교황에 의해서 비로소 이 축일은 전체 교회의 보편 전례력에 받아들여졌다. 비오 9세(1846~1878) 교황은 교황령으로 인해 일어난 폭동이 진정된 1850년 피신에서 귀환한 후 이 축일의 등급을 상향시켰다. 개정된 전례력에서는 이 축일을 5월 31일로 옮겼는데, 그 이유를 주님 탄생 예고 축일과 세례자 요한의 탄생 축일 사이의 시기가 복음서의 보고와 일치되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2. 묵상

 

노래는 느낌이나 감정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든지 노래 없이 역사를 함께 한 민족은 없습니다. 아마도 노래는 인간의 역사(歷史)와 함께 시작한 듯합니다. 민족이나 한 개인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은 노래 속에 담겨져 있으며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그 민족의 특성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노래는 민족이나 풍습이나 언어를 초월해서 인간 공통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모아 주기도 합니다. ‘노래는 세계를 간다’라는 제목의 노래도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노래들이 오늘날 전 세계에서 불리어집니다. 비록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들을 부를지라도 그러나 대부분의 노래들은 빨리 잊혀집니다. 소수의 노래들만이 세기를 넘어 수백 년에 걸쳐서 또는 천년이 훨씬 넘게 사람들에 의해 불리어지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시작되어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 곳, 그 곳에는 수백 년에 걸쳐 오늘날까지 민족의 구분 없이 불리어지는 노래가 있습니다. 일명 ‘마리아의 노래’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성모찬가(Magnificat)’가 바로 이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마리아가 이름 불리는 곳에서는 항상 불려집니다. 또 매일 매일의 교회의 기도인 시간전례(성무일도)에서도 이 노래는 전 세계에서 쉬지 않고 불려지고, 날마다 이 노래로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의무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리아가 자신의 친척인 엘리사벳을 만났을 때 불렀던 노래 안에서 우리 인간과 하느님과의 만남을 노래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이제로부터 과연 만세가 나를 복되다 일컬으리니,

능하신 분이 큰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자비하심을 아니 잊으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으니,

이미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위하여,

영원히 우리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로다.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 인류를 대표하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래 하느님은 인간 가까이에 계십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대표적으로 예언자들은 구원하시고 도와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체험했습니다. 이제 같은 역사의 시점에서 나자렛 고을 출신인 처녀 마리아는 하느님과의 직접 상봉을 체험합니다. 마리아는 그분을 세상에 전해 주며 하느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그녀와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말씀에 대해 자신의 찬미노래가로 대답하십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나이다.”,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하고 노래한 후, 이 찬미 노래의 이유를 다음의 관점에서 계속 노래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보살피십니다. 이에 대해 마리아는 찬미의 노래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의 경우와는 달리 권세 있고, 힘 있고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가지고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을 바라보시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자주 찾아가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자기 가까이로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의탁하는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돌보십니다. 하느님은 비록 자신이 죄짓는 죄인이며 잘못을 범하고 있음을 알고 있더라도 하느님께로부터 모든 것을 바라는 그 사람을 바라보십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자기 손으로 거두지 못하는 병자들과 연약한 그 사람들을 바라보시고 돌보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로운 눈길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총애는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는 잊혀졌거나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이에 대해 마리아는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에는 중요하지 않은 아주 평범한 사람인 아브라함을 보살피시고,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억압받았던 이스라엘을 생각하셔서 뛰어나게 하셨음같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작은 마을의 평범한 가정 출신의 보통의 한 처녀를 바라보시고 보살피셨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과 자신이 직접 체험한 바를 노래합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노래한 자신의 체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를 바라보시고 그녀를 돌보셨던 그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고 돌보시고 계심을 우리도 느끼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반대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경험을 나누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삶 가까이에 계시고 그분의 자비를 노래하기 보다는 오히려 멀리 계심에 대한 불평이나 원망의 노래 나아가 불신앙이나 좌절의 노래를 부릅니다. 기쁨이나 감사의 말씀을 드리는 노래가 입술에 옮겨지지 않고 원망과 불만과 고통의 하소연만 우리 입술 위에 담겨집니다.

 

“도대체 어디에 계십니까, 하느님?”혹은 “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십니까?”이러한 외침은 고통 속에서 수없이 많이 나옵니다. “제가 사기를 당할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나의 남편이 죽어 갈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나의 어린 딸이 사고를 당했을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내가 이런 부당함을 당할 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내 귀여운 자녀가 내 눈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생명이 꺼져 갈 때 도대체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는 마리아의 노래가 아닙니다. 더구나 찬미의 노래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어떤 노래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인생의 모든 경험을 신앙과 사랑 안에서 자신을 성숙시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고통을 겪으면서도, 골고타의 처참한 고통과 괴로움에 직면해서도 마리아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자신의 노래를 부르길 멈추지 않았습니다. 마리아처럼 우리도 좌절과 회의에서 신앙으로, 하느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삶에서 신뢰의 삶으로, 십자가에서 부활에로의 찬미 노래를 우리의 생활 안에서 직접 불러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를 피할 수는 없지만 그 가운데서도 주님께 대한 확신과 분명한 신뢰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마리아와 같은 찬미의 노래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월간 빛, 2004년 5월호, 최창덕 F. 하비에르 신부(성바울로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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