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4세기의 전례적 요소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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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2 | 조회수1,662 | 추천수0 | |
[전례 해설] 4세기의 전례적 요소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에서 관용령(寬容令)을 반포(313년)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와 예배의 자유를 보장해 주고 교회 재산과 예배 공간들을 반환해 주라고 명령했을 때, 이것은 교회와 전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이 되었다. 그와 함께 전례는 그 당시의 주변 문화와 활발하게 접촉하면서 여러 가지 전례적 요소를 발달시키게 됐다. 이제 그 몇 가지를 간단하게 살펴보자.
건축물
지하에 있던 교회가 지상으로 나옴에 따라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어 교회를 찾게 되고, 이에 따라 교회는 예배를 위한 넓은 공간을 필요로 하였다. 황제와 그의 가족들은 예배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 교회에 기증했는데, 이러한 건축물들은 황제의 권위에 어울리는 크고 웅장한 것들이었다. 그래서 경신 예배를 위한 단순하고 소박한 옛 바실리카(Basilica) 건축 양식이 형성되었다. 이때 옛 베드로 교회와 라떼라노 대성전과 같은 교회 건축물이 생겼다.
음악
고대 이교도들의 의식 안에서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음악은 모든 제사, 축제, 잔치에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요소였고, 그들은 여러 가지 다양한 악기도 사용했다. 그러나 교회는 이교도들이 사용했던 악기들을 배척하고 노래만을 중시했다. 그래서 악기 없이 소박한 단음의 노래, 즉 인간의 순수한 목소리만으로 하느님을 찬미했다.
전례 언어
그리스도교 전례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서방에서도 오랫동안 그리스어가 전례 언어로 사용됐는데, 이것은 3세기까지 서로마 제국에서도 그리스도인의 다수가 그리스인이었음을 말해 준다. 그래서 전례 언어는 그리스어의 특징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화려하게 말을 건네는 것을 좋아했는데, 이에 따라 하느님께 대한 호칭도 길게, 특히 지상적인 것을 부정함으로써 생긴 말을 길게 연결하곤 했다. 예컨대 파악할 수 없는 분, 이해할 수 없는 분, 끝이 없는 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이라고 하느님을 불렀다. 그리스인은 또한 자연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기도했는데, 이는 그리스인들의 종교적인 성향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2~3세기 이래 점차 라틴어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재는 라틴어의 언어 정신과 로마인의 정신이 전례 언어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짧고 간결한 것과 명백한 표현은 로마인들의 표현법으로 전례 언어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호칭 기도와 법적이며 시적인 언어 형식은 로마의 정신 유산으로 라틴어로 된 기도에 영향을 끼쳤다. 라틴어는 4세기 후반에 전례 언어로서의 위치를 굳힌 것으로 보인다.
미술
고대 이교도들의 그림과 같은 동일한 주제들이 그리스도인에 의해 그려진 까따꼼바의 그림 안에서도 발견된다. 또한 이교도들의 그림에서와 같이 자연에 대한 환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다양한 소재가 그림으로 표현되는데, 그리스도인의 그림은 그리스도교적 표지와 상징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양을 어깨에 메고 있거나 양을 치는 목자는 이교도들도 좋아하는 소재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그리스도인을 위한 목자이고 양떼를 의미하는 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표현했다.
생활 풍습의 영향
로마인의 생활 풍습들은 전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로마를 비롯한 지중해 문화에서 입맞춤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어떤 사람을 형제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때, 받아들이는 표지가 바로 입맞춤이었다. 고대에서는 문지방이나 문 기둥에 입맞춤함으로써 성전을 존중하는 표시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음식을 차려 놓은 식탁도 성스러운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식사 전 식탁에 입맞춤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입맞춤은 단순한 인사의 형태이며 성스런 대상물에 대한 존경의 표시였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당시의 인사 법을 전례 안에 받아들인 것이다. 주교는 새 세례자에게 견진을 집전한 다음, 마지막으로 그에게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나서 새 신자는 교회 안에 있는 신자들에게 들어갈 수 있었고, 그는 선배 신자들로부터 입맞춤의 인사를 받았다. 미사 시작과 끝에 제대에 입맞춤하는 것도 이런 풍습에 속한다. 그 후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 경우에 입맞춤의 인사를 했다.
미사 전례의 끝에 우리는 고대 로마 문화에서 유래하는 또 하나의 관습을 갖고 있다. 그것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말이다. 이 말은 “가십시오. 끝났습니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고대 로마 시대 황제의 알현이 끝나거나 재판이 끝나거나 종교 의식이 끝났을 때 사람들을 돌려보내가 위해 사용한 말이다. 이미 200년경에 이 관용어가 사용됐으리라 여겨지며, 400년경에는 이 관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그 밖에 전례 예복은 후기 로마 시대의 축제 의상을 미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데, 사실 이 축제 의상이 고대 로마 시대에는 평상복이었다.
궁정 의식에서 온 전례적 요소들
전례는 또한 궁정 의식(宮廷儀式)에서 사용하던 여러 가지 요소들을 받아들였는데, 수용 원칙은 그러한 요소들이 미신적 성격을 상실해 아무런 문제점이 없을 경우에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본래 황제의 상(像)에 분향하는 것을 거부했고, 황제의 입상(立像)을 화환으로 장식하는 것을 거부했다. 또한 황제의 상 앞에서 부복의 자세를 취하거나 장궤하는 것도 거부하였고, 황제를 주님(Kyrios)이라 부르길 거부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상 숭배의 흔적을 포함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거부했던 것이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고 더 이상 잡신 공경을 요구하지 않게 되자, 상황이 급변해 과거 이교도들이 이용했던 예식의 여러 요소들은 더 이상 종교적 의미를 갖지 못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주교들에게, 특히 교황에게 존경을 표시함으로써 자신의 그리스도교적 신앙을 표명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여러 가지 특권을 부여했다. 주교들은 로마 제국의 최고급 관리들과 황제가 향유하던 명예권을 받았다. 이제 사람들은 주교 앞을 지날 때 장궤를 하거나 부복의 자세를 취함으로써 주교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게 됐다. 또한 황제나 귀족들의 공식 행차에는 두 명의 시종이 부축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것이 전례 안에 받아들여져 주교가 봉헌하는 대미사 때 두 명의 의전(儀典) 사제가 특별한 임무 없이 주교 옆에 서서 따라다녔다.
그 밖에 초와 향의 사용도 로마 궁정 예식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고대 로마 집정관들은 공식 행차 시 그들 앞에서 횃불이나 굵은 초의 촛불을 운반하게 할 수 있는 명예권을 가졌다. 그와 함께 화로 하나를 앞세울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이 화로에 향료를 뿌려 가며 행렬해 나갔다. 로마 황제는 이 관습을 궁중 의식 안에서도 유지시켰다. 이러한 명예권이 4세기에 황제의 궁정에서 교황궁으로 옮겨졌다. 화로는 나중에 향로로 간편하게 바뀌었다. 미사 동안 초는 본래 제대 옆에 놓여졌던 것이 11세기부터는 제대 위에 놓여지기 시작했다. 이제 초는 전례 거행시 항상 등장하게 되었고, 향도 자주 전례 안에서 애용하게 되었다.
4세기의 전례적 요소들을 통해서도 다음과 같은 원칙이 확인된다 : “성교회는 신앙이나 공익에 관계없는 일에 엄격한 통일성을 강조하고자 하지 않으며, 전례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오히려 여러 종족과 민족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은 이를 보호 육성한다. 또한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이나 오류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나 호의를 가지고 고려하고, 할 수 있다면 잘 보존하고자 한다. 그것들이 참되고 올바른 전례 본정신에 적합하다면, 때로는 전례 자체에도 이의 도입을 허용한다”(전례 헌장 37항).
[경향잡지, 1989년 8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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