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전례] 초기의 참회성사 | |||
---|---|---|---|---|
이전글 | [전례] 순교자 공경 | |||
다음글 | [전례] 새해와 축복 | |||
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2 | 조회수1,881 | 추천수0 | |
[전례 해설] 초기의 참회성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간의 죄를 풀어 줄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마태 18,18 참조). 또한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사죄권을 위임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너희가 용서해 주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을 것이고 용서해 주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한 채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교회는 죄인들의 회심과 회두를 위해 여러 시기와 지역에서 다양하게 참회 방법을 발전시켰다. 이미 원시 공동체는 죄인을 회두시키기 위해 일정한 기간 죄인을 파문(excommunicatio)하기도 했다(1고린 5,1-13). 또한 신자들은 일상적 잘못을 용서받기 위해 기도, 단식, 자선과 다른 여러 가지 선행을 많이 했다.
그러나 3세기까지는 참회성사의 형식과 실천 방법이 분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회는 또한 사죄권에 대해 잘 말하려고 하지 않은 듯싶다. 예비 신자나 새 세례자들에게 가급적 이러한 문제를 알려 주려고 하지도 않았다. 새 세례자들은 세례 때 받은 은총을 보존해야 했고, 그들이 한 번 더 회두할 기회가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떼르뚤리아노는 참회론(De Poenitentia)에서 큰 회두가 이루어져야 하는 세례에 관해 말한 후 세례받은 후 범죄한 신자들을 위한 참회가 있음을 마지못해 언급한다. 세례받은 다음에도 참회할 수 있고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죄를 범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배가 파선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생하다가 구조되었다면, 그 사람은 그때부터 더 이상 배나 항해를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 때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은 죄인도 그와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례받은 사람은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한번 더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으면 좋다는 것이다.
4~6세기 로마 교회의 참회 전례는 3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간음, 배교, 살인죄 같은 중죄를 지은 사람은 참회 전례에 참여함으로써만 사죄를 받을 수 있었다. 첫번째 단계에서 죄인은 주교에게 신고하고 그에게 자기 죄를 개별적으로 비밀리에 고백한다. 그 다음 죄인은 공적 경신례에서 추방됐다. 그는 파문된 것이다. 교회는 거룩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므로 죄로 말미암아 은총을 잃어버린 사람은 완전한 의미에서 더 이상 교회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인은 완전히 배적되지 않고 교회가 화해를 중재하게 된다. 이 단계에서 주교는 참회자에게 보속을 정해주었고 ‘그를 참회자 그룹에 편성시켰다. 두번째 단계에서는 참회 행위가 이루어졌다. 이 참회 행위는 고복(苦服)을 입고 단식, 고신(苦身)을 해야 하며 파문을 받은 상태에서 전례에 참례하면서도 신자들과 자리를 달리해야 하는 등 수치와 수모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이 행위는 엄격했을 뿐 아니라 거의 일생 동안 영향을 미쳤다. 참회자들은 영성체를 할 수 없었고 봉헌물을 제대로 운반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경신례에서 주교에게 특별 강복을 받았다. 이 강복은 동방에서는 독서들이 끝나고, 북아프리카에서는 영성체 전에, 로마에서는 영성체 후에 베풀어졌다. 참회자들은 이 강복을 받고 그곳을 떠나야 했는데, 그들은 참회 기간 동안 항상 이 강복을 받아야 했다. 이 강복은 참회 기간을 알차게 지내고, 마침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도록 참회자들을 도와주었다. 세번째 단계에서는 참회자가 하느님과 교회와 다시 화해(reconciliatio) 하고 교회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들은 이제 다시 성령으로 충만한 살아 있는 교회인 그리스도 신비체 안에 다시 결합됐다. 이것은 단순한 파문의 해제가 아니라 기도와 안수를 동반한 성사적 행위로 참회자에게 은총을 선사한다. 주교는 일정한 예식을 통해 참회자가 완전한 자격을 가전 교회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참회자의 죄를 사해 주고, 그에게 은총을 전달했다. 이렇게 마지막 단계에 이루어지는 화해 예식은 성사적 행위였다. 이 예식은 교황 인노첸시오 l세(402~417년 재위) 때 로마 교회에서는 성목요일에 거행됐는데, 참회자들이 부활절을 기쁘게 잘 지내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화해 예식의 비교적 정확한 과정이 6~7세기의 젤라시아노 성무 집행록(Sacramentum Gelasianum)에 나온다. 이 성무 집행록에 따르면 화해 예식은 미사 중에 거행됐는데, 복음과 봉헌 사이에 이루어졌다. 먼저 부제가 참회자들의 이름으로 주교에게 화해를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면 주교는 참회자들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권고했다. 그 다음 참회자들은 모두 바닥에 엎드렸고, 이 때 주교는 그들 위에 하느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사 하고 청하는 간구를 했다. 여기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나서 주교는 개개인에게 화해를 위한 안수를 했으며, 동시에 그는 참회자들을 일으켜 세웠다.
공개 참회자들은 언제 참회 행위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주일과 기쁨의 부활 시기 즉 부활 대축일과 성신 강림 대축일 사이에 있는 7주간 동안에는 참회를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었다. 이때는 참회자들이 행해야 했던 것처럼 단식을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해서는 안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 누가 참회를 위해 신고했다면 성신 강림 주일 이후에 비로소 참회자 명부에 올려졌다. 한편 이 참회 행위는 오랫동안 지속돼야 하지만 일년 내내 동일한 참회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사순절 때 강화되고 엄격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순절이 시작될 때 공개 참회자들이 단체적으로 참회의 행위를 했다. 이미 5세기에 사순절이 참회를 위한 고난 시기로 간주됐다. 그 당시에는 고난 주일(오늘의 사순 제5주일)에 사순절이 시작됐으나 주일에는 참회가 시작될 수 없었기 때문에, 그 다음 날인 월요일에 참회를 시작했다. 이러한 날에는 순회 미사가 있었는 데, 지정된 성당으로 가기 전에 신자들이 다른 곳에 모였고 거기서부터 호칭 기도를 하면서 참회의 행렬을 하여 미사 거행 장소로 갔다. 7세기부터는 사순절이 재의 수요일에 시작되므로 이날부터 참회 행위도 시작됐다.
참회 기간은 최종적으로 주교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3세기 시리아 교회에서는 통상적으로 몇 주간이면 충분했다. 이에 반해 갈리아에서는 예컨대 낙태에 대한 참회는 평생 계속됐다. 주교는 또한 참회 방법을 정해 주었는데 예컨대 일정 기간 육식을 금하고 고복을 입고 재를 바르거나 혹은 장례식 때 상여 운반 등이었다. 그리고 참회자들은 전례 참례시 무릎을 꿇어야 했고, 단식을 해야 했고 때로는 희사를 해야 했고, 채식을 해야 했고, 공동체 안에서 자선을 해야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든 점은 여러 가지 금지 규정들이었다. 군대나 상업에 종사할 수 없었고, 일반 법정에서 재판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참회 기간 동안 완전히 금욕 생활을 해야 했으며 때로는 일생 동안 성생활이 금지됐다. 또한 배우자가 죽으면 참회자는 더 이상 결혼해서는 안되었다. 참회자였던 사람은 이제 수도자처럼 살아야 했다. 그러나 참회자가 참회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 그는 누범자로 간주되어 교회는 그에게 어떤 도움도 거부했다. 왜냐하면 평생 한 번 공개 참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공개 참회가 필요한 경우에도 죽기 직전까지 참회를 미루는 경향까지 생겼다. 대개 5세기 이후의 교회는 환자 참회를 위한 고유 예식을 갖게 됐는데, 여기서는 참회 기간이 며칠 간으로 단축됐다.
7세기 이후로는 영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참회 방법이 교회에서 사용됐다. 즉 성사를 여러 번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신자들로 하여금 1년에 한 번 참회성사를 사순절초에 받게 했다. 영국에서는 재의 수요일 전날에 참회성사를 받았으며, 그래서 이 날을 고백의 화요일이라 불렀다. 성목요일에는 공개 참회자들이 주교에 의해 사죄받고 ‘화해하는’ 화해의 날이었다. 여기에는 사순절초에 고백을 한 신자들도 참석할 수 있었다. 이 예식이야말로 본연의 의미에서 합동 고백이었다.
[경향잡지, 1989년 12월호, 장석윤 비오(태백 장성본당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