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미사]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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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 작성일2009-07-02 | 조회수2,888 | 추천수0 | |
[전례 해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태양, 그것은 하느님의 신호다. 태양, 그것은 우리들의 이즘이다. 우리들의 신호는 떨궈지지 않는다”(박두진, 시 ‘8월’ 중에서).
“먼저 여름이 태양을 예찬하고 싶다. 여름의 해는 뜨겁다. 문자 그대로 작열하는 태양이다. 태양은 광명 중의 광명이요 열 중의 열이요, 힘 중의 힘이다”(안병욱. ‘여름 예찬’ 중에서).
태양 없는 지구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태양은 시인의 희망이나 예찬을 넘어 신이나 절대적인 우상으로 숭앙을 받기도 하였다. 고대의 에집트, 시리아, 인도 등 옛 동방에서 특히 태양신 숭배가 성행하였다. 무적(無敵)의 태양신(Sol invictus) 숭배자들은 아침 일찍 자기 집의 지붕 위에 올라가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이렇게 외쳤다.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 이런 외침은 로마 황제가 한 나라를 방문할 적에도 동일하였다.
마음의 태양, 세상의 빛
신약성서 특히 바오로 서간에 보면 그리스도를 흠숭하는 표현으로 ‘주님’(Kyrios)이란 말을 덧붙여 놓았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로 세속적으로는 ‘소유주(所有主), 명령자’이고, 종교적으로는 신(神)의 표시이다. 초기 교회에서 이미 아라메아 말로 ‘마라나타’(주여, 어서 오소서 : 1고린 16,22) 하고 예수님을 부르며 기도하였다. 예수님은 주님이요 하느님으로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다”(필립 2,11).
동방 교회 특히 4세기말경 예루살렘에서 미사나 성무일도를 거행할 때 호칭 기도를 부제가 선창하면 신자들이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Kyrie, eleison) 하고 응답하였다. 5세기경에 로마에서도 동방의 것을 도입하였으나 그레고리오 1세 교황(590~604년)은 부제의 선창을 없애고, ‘기리에, 엘레이손’만 사용하였다. 그 후 ‘그리스테 엘레이손’과 교송을 하다가 9품 천사의 합창을 모방하여 ‘기리에 엘레이손’(세 번), ‘그리스테 엘레이손’(세 번), 다시 ‘기리에 엘레이손’(세 번)을 반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중세기에는 이것을 삼위 일체를 연상하며 찬미하도록 고정시켰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새 미사 경본에는 각 호칭을 한 번씩만 반복하도록 하였다. 물론 언어나 음악적 요청에 따라 더 넣을 수도 있다.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반복) + 그리스도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반복) +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반복)
당신은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사랑을 위해서 사는가, 사업을 위해서 사는가. 학문을 위해서 혹은 진리를 위해서 사는가. 어느 것이든 좋다. 우선 나의 보호자, 동반자, 구원자를 찾아보자. 내 마음의 참 빛(요한 1,9 참조), 세상의 빛(요한 8,12 참조), 정의의 태양(말라 3,20 참조)을 알고 있다면 자주 찾고 외쳐 보아라. “나를 비추어 주시는 주님, 허약한 이 몸을 붙들어 쉽게 체념하거나 금방 게을러지지 않도록 힘과 용기를 북돋아 주소서.”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미사 전례와 기도는 항상 ‘우리 주,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바친다. 그러면 구약 시대에 어떻게 불렀는가. 출애굽기(3,15)에 보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알려 주셨다. “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일러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또한 야훼란 존재자(存在者), 자존유(自存有), 있는 자 바로 그분이란 뜻임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전례 기도문에서 경외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즉 너무나 거룩한 이름이기 때문에 야훼의 이름을 일체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주님’이란 뜻인 ‘아도나이’(Adonai)란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아도나이란 이미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다. 즉 “야훼, 나의 주여’ 하고 아브라함이 부르짖었다(창세 15,2 참조). 이것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하느님이야말로 절대적 주권을 지니신 분임을 고백하는 뜻이었다. 아도나이는 구약성서에도 자주 사용되어 하느님의 고유한 이름이 되고 말았다.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서가 기원전 3~2세기에 그리스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을 ‘70인 역본’이라고 한다. 여기서 아도나이를 ‘키리오스’(Kyrios)라고 번역하였다. 이 용어는 그리스 시민들의 일상 생활에서도 사용되었다. 법적 소유자, 재산의 소유주, 지배자, 신들이란 뜻도 있었다. 즉 필립보 왕이나 알렉산더 대왕을 키리오스라 호칭하기도 하였다.
앞서 말한 대로 신약성서는 키리오스라는 칭호를 예수 그리스도께만 사용하였다. 특히 사도는 이 칭호에 왕이요 하느님이란 두 뜻까지 포함시켰다. 왕인 예수님은 전인류의 주님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로마 14.9). 또한 권세나 죽음과 같은 모든 원수들의 주님이시다(1고린 15,25-26).
“그리스도는 또한 당신의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골로 1,14). 그래서 앞서 인용한 대로 하늘과 땅과 지옥을 포함한 전우주는 예수께서 주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필립 2,10-11). 따라서 “예수께서 주님이십니다.”라는 신앙 고백은 옛 황제를 신격화한 잘못된 생활 습성을 올바로 잡아 고쳐 놓은 것이다. 태양신을 비롯한 모든 가짜 신들은 이제 모두 예수께 예속되어 있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토마 사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29) 하고 예수께 달려들며 외쳤다.
간청이요 찬미
‘기리에, 엘레이손’ 하고 부르는 미사 성가는 참여한 신자들의 심금을 울린다. 바하, 베토벤, 스트라빈스키 등이 작곡한 유명한 합창곡들은 중세기에 이미 226개나 작곡되었다고 한다. 그중 유명한 것은 교황청 미사곡집(Graduale Vaticanum ; 1908년)에 수록되어 있다.
자비를 구하는 기도의 대상은 누구인가. 키리오스 즉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부르는 호칭이 ‘기리에’이다. 그리스도는 주격(主格)이지만 크리스테(Christe)는 부르는 뜻의 호격(呼格)이다. 사람을 부를 적에 ‘여보세요’ 하듯이 그리스도를 부를 적에 ‘주님이시여’ 또는 정답게 ‘여보세요, 주님’이라 부를 수 있다.
사람을 부를 적에 억양이 있듯이 예수님을 부를 적에도 두 가지 억양이 있다. 즉 간청과 찬미의 억양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기도는 기도자의 호소요 간구이며 용서를 바라는 죄인의 청원이다. 이 기도는 간구자의 자기 비하요 자기 고발이며 자신을 비우는 자기 포기이다. 마음속의 어두움을 깨우치고 자비를 베풀기 위해 내려오는 밝은 빛을 맞이하는 태도이다(2고린 4,6 참조).
간청의 부르짖음은 주님의 능력과 선하심을 믿고 있다. 그러므로 간청의 기도인 동시에 찬미의 기도이다. 겸덕에서 나온 찬미요, 경탄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의 현존
참회의 기도 중에는 전능하신 천주를 찾는다. 즉 참회의 기도를 들어주실 분은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이제 자비의 기도는 그리스도를 찾아 외치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 대한 고백이다. 그분은 약속대로 모인 공동체 안에(마태 18,20) 현존하고 계신다.
나와 주님이 마주서는 시간, 진지한 자기 반성, 준엄한 자기 검토의 시간이다.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아버지 곁의 행복과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자신을 희생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이신 후 부활의 영광을 누리며 성부 오른편에 앉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신가. 그분은 공상 속의 인물이나 피조물인 태양이 아니라 교회 안에, 역사 안에, 성령 안에 대화의 상대로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신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 그분의 손에 권세와 나라가 있다. 주님은 실로 믿는 자의 눈을 뜨게 하신다.
[경향잡지, 1991년 8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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