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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미사] 알렐루야와 복음 봉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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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9-07-02 조회수2,538 추천수0

[전례 해설] 알렐루야와 복음 봉독

 

 

이런 말이 있다. “현자(賢者)는 글을 읽고 깨닫고, 범부(凡夫)는 남의 말을 듣고 깨달으며 우자(愚者)는 해보고 나서 깨닫는다.”

 

그리스도인은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고 복음은 구원의 기쁜 소식임을 배워서 알고 있다. 그런데 성당에 올 적에 성서를 미리 읽어 보기는커녕 책도 없이 빈손으로 오거나, 의자에 앉아서는 잘 듣지도 않는다. 왜 “매일 미사” 책이라도 들고 오지 못하는가?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해 매월 주일과 평일의 성서 말씀이 들어 있는 “매일 미사” 책을 만들지 않았는가? 현자라서 이미 다 읽고 깨달았는가? 우자라서 못 알아듣는가? 하느님의 말씀은 삶이요, 힘이며, 결단이요, 은총이다. 그러므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곧 하느님 말씀의 거부, 은총 밖의 삶으로 심판을 자초함을 뜻한다. 준비 없는 미사, 듣지 않는 말씀의 전례, 증인의 의식이 없는 생활이라면 어떻게 주일을 거룩히 지낸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알렐루야 - 주님을 찬양하라

 

“큰 군중이 우렁차게 외치는 듯한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 왔습니다. 알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권세가 우리 하느님의 것이다. …… 높고 낮은 모든 사람들, 우리 하느님을 찬양하여라”(묵시 19,1-5).

 

알렐루야는 묵시록의 말씀처럼 “야훼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즉, 히브리어로 알렐루(hallelu)는 ‘찬양하라’이고 야(jah)는 야훼(Jahwe)의 약칭이다.

 

이 노래는 유다인들이 회당에서 말씀의 전례 중에 행한 시편(106, 111-117, 135, 146-150)의 낭독에 대한 환호의 답변이었다. 그리고 사도 시대에는 하느님의 어린양이 승리자로 오심을 기뻐하고 외치는 노래가 되었다. 알렐루야는 번역되지 않은 채 원어 그대로 전세계에서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예배 중, 복음서 봉독 전에 노래한다. 단지 옛 스페인 예절만은 복음 후에 행한다.

 

미사 경본 지침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알렐루야는 사순절만 빼고 언제나 노래한다. 회중이 함께 시작하든지 성가대나 흑 성가대원 혼자서 시작한다. 필요하다면 반복할 수도 있다. 성구는 독서 책이나 전례 성가집에서 취한다. 독서가 하나만 있을 경우에는 사순절 이외의 시기엔 알렐루야로 시작되는 시나, 시와 성구를 겸한 알렐루야나, 시만 노래하든지 알렐루야만 노래할 수도 있다. 노래할 수 없으면 생략해도 좋다. 사순 시기에는 시나 복음 전 성구만 노래한다.

 

 

부활의 노래

 

어떤 학자가 “알렐루야는 일종의 유쾌한 교회 요들송과도 같다.”고 하였다. 요들송의 매력은 가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랫소리에 있다. 즐겁고 유쾌한 소리일 뿐이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흥겹게 춤추며 ‘닐리리야, 지화자 좋다’고 노래할 적에 그것이 무슨 뜻이라기보다 그저 기쁨의 표현일 뿐인 것과 같다. 특히 부활 시기가 오면 그리스도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의식하면서 노래하였다. 구약시대에는 야훼 하느님만을 찾았지만 신약 시대에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환호하게 되었다. “마침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사도 3,15). ‘새 생명의 첫 사람, 생명의 주님’으로서 나타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예수님을 찬미하며 동시에 우리의 하느님임을 고백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명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여 단지 약속이나 신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그분에게서 부활의 환성, 즉 죽음을 이긴 승리자요 죄를 없이한 해방자로서의 광채를 바라보고 있다. 사죄, 새 생명. 부활, 영원, 광채 등 단어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우리의 희열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래서 외치는 것이다. 이젠 단어 따위는 접어 두어라. ‘알렐루야’, 노래하며 함성을 지르고 춤을 추며 감사할 뿐이다.

 

 

복음에 대한 환호

 

응송은 독서의 낭독으로 들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응답이지만, 알렐루야는 앞으로 올 것에 대한 대비요 준비다. 말씀의 전례에서 가장 중심 부분이 어디인가. 어디가 그 절정인가? 두 말할 필요 없이 복음이다. 복음은 예수님 자신이시다. 말씀, 수난, 십자가, 죽음, 부활, 재림이 담겨 있는 거룩한 책이다. 두 개의 독서나 응송도 실상은 복음에 대한 준비 과정에 불과하다.

 

복음의 말씀에 예수님이 현존하신다. 그래서 앉아서 듣던 신자들이 마주오는 복음 즉 예수님을 맞으려고 일어선다. 오실 주님 앞에 흠숭의 표시로 환호한다. 알렐루야는 말씀을 잘 듣기 위한 표현이요 준비이며 인사요 신앙고백이다.

 

 

복음 봉독

 

말씀의 전례에서 정점은 복음 봉독이다. 그래서 복음서에 최대의 경의를 표시하도록 되어 있다.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를 불문하고 복음서 자체를 호화롭게 장정하였고 미사의 입당식 때 부제나 사제가 정중히 손에 들고 가서 제단 위에 올려 놓았다. 그것은 귀빈을 모시고 모인 신자들 가운데로 행진하는 것과 같다. 복음서는 말씀에 현존하시는 주님이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유다인의 왕’처럼 환영받으시는 주님이시다. 신자들은 모두 일어서서 인사와 환호를 보내며 분향과 촛불로 경의를 표한다. 복음은 부제나 사제가 봉독하고 강복을 주며 준비 기도와 십자 표시, 봉독 후의 입맞춤(우리 나라는 목례) 그리고 “그리스도께 찬미”로써 복음 선포가 끝났음을 표현한다.

 

부제는 복음 선포 전에 사제 앞에 나아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강복하소서” 하고 청원한다. 이때 주례 사제는 손으로 십자 강복을 하며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주여 이 부제의 마음과 입술을 지켜 주시어 복음을 타당하고 정중하게 전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하면 부제는 “아멘”하고 대답한다. 그리고 주례자가 직접 복음을 읽을 때엔 이렇게 기도한다. “전능하신 천주여, 내 마음과 내 입술을 깨끗이 하시어 주의 거룩한 복음을 타당히 전하게 하소서.”

 

복음 봉독 전 이마에 작은 십자표를 한 것은 9세기부터이다. 그 후 점차 가슴과 입술, 그리고 복음서에도 십자 표시를 하게 되었다. 이마는 머리의 중심으로 복음 말씀을 잘 깨닫고, 입으로는 깨달은 바를 전파 또는 고백하며, 가슴속 깊이 간직하여 생활 속에 실현하려는 의지의 표시이다.

 

 

말씀의 영성체

 

교부(敎父)들은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전례 중에 특히 복음 말씀 안에 현존하시고 구원 활동을 계속하신다고 보았기 때문에 성체 안에 계심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초대 교회 성서 학자인 오리게네스는 “하느님 말씀의 살을 먹는 신자들은 날마다 어린양의 살을 먹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교회는 주일마다 아니 날마다 성당에서 식탁을 차려 놓고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고 하느님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도록 도와주고 있다. 말씀의 빵을 받을 적에 “말씀의 영성체”를 행한 것이 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과거에 소홀하였던 말씀의 식탁을 풍부하게 채웠다. 전례 헌장(51항)은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하느님 말씀의 풍성한 식탁을 마련하도록 신자들에게 성경의 보고(寶庫)를 널리 개방하여, 성경의 중요한 부분을 일정 한 연수(年數) 내에 회중들에게 낭독해 주어야 한다.”

 

말씀을 듣는 우리 신자의 태도는 어떠한가? 한 주간 동안 성서를 몇 줄이나 읽었는가? 우리는 모두 현대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래서 매일 규칙적으로 참을성 있게 텔레비전과 라디오 앞에서 깜짝 놀랄 소식이나 흥미로운 연속극을 두 시간 이상 보고 있다. 그런데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기쁜 소식’인 복음을 듣고 간직하는 데는 너무도 인색하지 않는지 반성해보라.

 

복음은 바로 예수님이시다(마르 1,1 참조). 복음에 대한 응답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복음을 통한 믿음은 또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어 준다(로마 1,17). 복음은 결국 결단을 요구한다. 이 구원의 기쁜 소식,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은 도처에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듣고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다. “내 말을 들으시오.”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듣고 개종한 사람은 삼천 명이나 되었다(사도 2,22-41 참조). 사마리아 사람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8,14 참조).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도들의 수효는 부쩍 늘어났다(6,7 참조). 이와 반대로 시기, 무시, 자만, 경솔한 자는 마음의 문을 닫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스스로 그분 앞을 물러나는 것이다.

 

[경향잡지, 1991년 12월호, 안문기 프란치스꼬(천안 봉명동본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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