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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전례] 주님의 은혜로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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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0-08-13 조회수2,524 추천수0

주님의 은혜로운 해

 

 

신년 벽두 동녘에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보며 가슴이 벅찰 만큼 희망으로 부풀고 기쁨 충만한 생명으로 가득 찼던 일이 바로 얼마 전 같은데, 벌써 올해도 한 달여 남겨 둔 11월입니다. 저 멀리 시야에서 멀어지며 날아가 버리는 화살처럼, 서녘 끝으로 이토록 빨리 달아나 버리는 해를 보며 자연히 상념에 잠깁니다. 나의 마지막을 생각합니다. 나의 죽음을 생각합니다. 성 베네딕도의 규칙서에는 “날마다 죽음이 곁에 있음을 기억하라”는 권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매우 깊은 영적 금언에 속합니다. 스승의 가르침대로 죽음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은 병적으로 자기를 학대하라는 뜻이 아닐뿐더러, 10년 후가 될지 아니면 20년 후가 될지 모르는 먼 훗날 우리가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임종할 순간을 생각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이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시간을 기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성 베네딕도의 이 말씀은 지금 바로 우리 곁에 죽음이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그리고 죽음의 순간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처음으로 자연의 숨결을 들이마시고, 임종하면서 이 숨결을 자연에 도로 내어 놓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간이란 단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반복의 연속이란 말입니까?

 

우리 교회는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면서도 자연적인 시간 안에서 초자연적이고, 성스럽고, 뜻 깊은 신앙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헌장에 따르면“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한 해의 흐름을 통하여 지정된 날들에 하느님이신 자기 신랑의 구원 활동을 거룩한 기억으로 경축하는 것을 자기 임무라고 여긴다”(8항)고 합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도는 주기를 기준으로 하는 한 해를 교회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전례 주년’이라고 부릅니다. 전례 주년은 전례와 시간이 결합된 한 형태입니다. 전례 헌장에서 전례 주년의 본질적 요소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주간마다 주일이라고 불린 날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또 일 년에 한 번 주님의 복된 수난과 함께 이 부활 축제를 가장 장엄하게 지낸다. 한 해를 주기로 하여, 강생과 성탄에서부터 승천, 성령강림 날까지, 또 복된 희망을 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까지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펼친다”(120항). 그렇지만 교회의 전례 주년은 단지 전례 축일들을 한데 모은 전체 목록도, 혹은 단순히 일 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에 교회의 축제들을 멋들어지게 배치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인들은 시간을 두 가지 말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하나는 낮과 밤이 이어지고 주간과 달이 연속되고 한 해에 계절이 다양하게 바뀌는, 길고 짧건 측량이 가능한 자연적인 시간인데 이러한 시간 개념을‘크로노스’라는 단어로 불렀습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특정한 때 혹은 기회를 가리키는 시간 개념으로 ‘카이로스’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때로 이 말은 정해진 때 또는 시기적절함이란 의미로 사용됩니다. 신약 성서에서도 이 두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정하신‘때’(카이로스)가 찼을 때 말씀의 육화로 우리 사람의 시간, 우주적 시간, 우리의 역사적 시간 (크로노스)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요한 1,4; 갈라 4,4 참조).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하느님의 구속 행위가 시간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해에, 정해진 달에, 정해진 주간에, 또는 정해진 날이나 밤에, 정해진 시각 등 시간의 과정 안에서 ‘단 한번’(히브 7,27; 9,12; 10,10 참조) 구원 행업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정하신 구원의 “때”(카이로스)를 강조하셨습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중요한 순간에는 항상 ‘시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첫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낼 때를 말하면서“때는 오후 네시쯤이었다”(요한 1,39)고 하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는 사건에서도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요한 4,6)고 합니다. 더 나아가 요한 복음사가는 죽음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는 예수님에 관하여 서술하면서“예수께서는 아버지께로 건너가야 할 때가 온 것을 아셨다”(요한 13,1)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재판받으시는 시간이“이른 아침”이라고 합니다 (요한 18,28). 이처럼 요한 복음사가는 자연적인 시간을 구원의 시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 역사에 개입하시는 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결정적으로 성취하시기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사건을 공관 복음서는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시간에 따라 기록했음을 발견합니다. 우선 예수님이 수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건이 히브리 백성의 역사적인 탈출을 기념하는 파스카를 거행하는 주간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히브리인들은 파스카를 우주적 시간인 춘분이 지난 보름에 지냈습니다. 그리고 공관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성금요일 ‘오전 9시쯤’에 십자가에 달리셨고, ‘정오쯤’에 어둠이 세상을 뒤덮었으며, ‘오후 세 시’쯤 돌아가셨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자연적 시간에 따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27,45-56; 마르 15,33-41; 루가 23,44-49).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신 것은“안식일 다음날”, “주간 첫날”(마태 28,1; 마르 16,2.9; 루가 24,1; 요한 20,1)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사도들에게 약속하신 성령이 내려오신 때도 유다인의 파스카 다음 여덟째 주 첫 날인 오순절이었습니다 (루가 24,49; 사도 1,4-5 참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진 파스카 사건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모든 시간은 주님의 해 (Anno Domini: AD)로 변모됩니다.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시간의 의미와 가치를 바꾸셨습니다. 파스카 성야 미사 빛의 예식에서 주례 사제는 부활초에 십자 표시를 하고, 알파 (A)와 오메가 (Ω)와 그 해의 연수를 쓰며“그리스도께서는 어제도 오늘도, 시작이요 마침이요,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시대도 세기도 주님의 것이옵니다”하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시간을 이해하기 위한 잣대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제 시간은 단순히 우주적이고 자연적인 변화의 지속 혹은 반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를 담고 있는 성사(聖事)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은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을 담고 있는 구원의 시간으로 고양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신성한 시간 (신들의 시간)과 세속적인 시간(사람들의 시간)이 서로 분리되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상 창조 때부터 시작된 사람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고, 더 나아가 인간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의 행위를 드러나고 하느님의 구원이 수태됩니다.

 

대림과 성탄, 사순과 부활, 연중 시기와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들의 축일 이루어진 전례 주년 안에서 우리가 주일을 지내고 주간 평일과 축일들을 거행하는 것은 시간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시간을 현존하게 하고 우리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혜로운 해” (루가 4,19)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전례 주년 안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시간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시간의 참 뜻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시오, 지금이야말로 알맞은 때입니다. 보시오,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입니다”(2고린 6,2)라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날은 결코 허무하거나 지루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주이신 그리스도의 시간이 바로 ‘오늘’ 완성으로 고양되고 성취되는 은혜로운 구원의 때입니다. 아직 어둠이 깔린 새벽 수도원 기상 종소리에 맞춰 눈을 뜨며 찬미의 노래를 읊조려 봅니다. “이 날은 주님께서 마련하신 날,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시편 117).

 

[성서와함께, 2004년 11월호, 인 끌레멘스 신부 /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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